명나라 사람인 나관중은 제갈량을 흠모한 나머지 연의에서 반신반인의 경지로 묘사했다. 실은 이와 같은 생각이 당대에 민간은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도 만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지략과 무훈, 역사를 넘어 신화로 남아대표적인 사료가 송대에 집필된 『십팔사략』이다. 송이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전승과 사료를 모아 방대한 전사를 쓴 증선지는 삼국지의 주요 전사를 제갈량에 할애했다. 증선지가 묘사한 제갈량의 활약상은 나관중의 연의에 고스란히 이어졌다. 207년 유비가 서서의 추천에 따라 남양 땅 융중(隆中)에 사는 제갈량을 세 번
“그는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의와 법도를 보여주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때에 알맞은 제도를 따랐으며, 성실한 마음으로 공정한 정치를 폈다. (...) 여러 사무에 정통하고 사물의 근원을 이해했으며, 명분을 따르고 실질을 구하여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았다. (...) 그는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인재로서 제나라 관중, 한나라 소하와 비교할 만하다.”- 진수(陳壽),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제갈량은 선대 황제 유비의 명에 따라 평생 재상의 자리에 머물며 수렴청정하였고, 전장에서 보인 지략과 통치에서
공직자가 사적인 인연에 얽매여 부하의 잘못을 눈감다 대중의 불신에 직면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공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종종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인용된다.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부하 직원의 잘못은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그 통솔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어서, 이 고사는 종종 매우 그럴듯한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이 현실이다.제갈량, 승상의 직분으로 황제의 후견인이 되다중국 후한말 군웅이 할거하던 시절, 조조가 북방에서 한 헌제를 사로잡고 최대 경쟁자인 원소를 없애 중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