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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박정희 ‘경제신화’의 지정학적 조건

■ 책 『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에 대하여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9.10.22 09:43
  • 수정 2020.05.2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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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철/국제정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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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라는 책이 있다. 책 제목이 책 발간 의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347쪽을 가진 이 책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든 경제 참상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박정희 개발독재의 산물이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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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 혹은 ‘압축성장’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경제가 뒤죽박죽되어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는 것이 이 책 요지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양극화, 재벌 중심 왜곡된 경제구조, 토건족 발호, 지가와 물가 폭등, 정경유착, 관치금융, 저임금 노동착취, 노동권 억압, 농촌의 압축 쇠퇴, 무복지 성장, 외환위기 원인 제공 등등 무엇 하나 박정희의 ‘가짜 경제신화’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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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박정희 경제 신화를 무너뜨리기 위해 경제학자 8명이 힘을 합쳐 폭포수 같은 비판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박정희 개발독재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깨알 같은 정보들을 정성스럽게 배열했음에도 불구하고 (1)‘지정학적 통찰의 부재’와 (2)’국제금융 자본에 대한 박약한 이해’로 말미암아 박정희 경제신화의 ‘신화성(神話性)’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결과 박정희 경제신화를 무너뜨린다는 애초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신화를 더욱 고착화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혹을 떼려다 오히려 혹을 붙이는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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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들의 연구는 박통 신화 찬양론자들이 ‘눈을 부라리며’ 제기하는 간단한 다음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질문이 좀 길다).

 

I 질문 I

“그럼 박통 까는 너희 대안은 뭔데? ‘민주적’ 발전국가야?? 장면 민주당 정권이 했으면 뭐가 좀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해? 박통 재임 16년(1963년~1979년) 그 짧은 시기, 지지리도 가난했던 이 나라 경제를 이 정도 발전시켜 놨으면 됐지, 뭘 얼마나 더 바라는 건데?? 세상에 부작용 없는 일이 어딨어? 매사 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아냐? 왜 빛은 외면하고 어둠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데?

1960-70년대 한국을 봐봐!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한국은 일차적으로는 미군이 주둔하는 전략적 군사 거점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슈퍼파워 미국이 주물럭거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틀 안에서 경제발전을 모색해야 하는 월클 수준의 무대책 ‘빈국’이었단 말이야! 자본이 있어, 기술이 있어, 무슨 인력이 있어….?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무소유’ ‘잿더미 국가’였다구! 아프리카의 모잠비크, 앙골라, 잠비아, 적도 기니 수준도 안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구…. 그런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함 생각해 봐봐! 당시 우리 선택지가 무엇이 될 수 있었겠느냐고? 당장은 배고파 뒤질 것 같은 참담한 가난을 면할 수 있어야 겠고, 멀리 봐서는 부국강병 흉내라도 내 볼 수 있는 국가발전의 길을 찾아야 할 꺼 아니겠어?

어차피 해방 이후 센 놈들인 미국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된 거, 아무리 싸워봐야 모두 다 잡혀 죽는 절대적 힘의 우위 아래서, 국제 분위기 파악해가면서 우린 우리 나름대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거 아냐, 죽을 순 없잖아, 살아야 할 꺼 아냐!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처절하고도 필사적인 노력을 한 게 그게 바로 박통의 ‘조국 근대화’ 아냐?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된 건데……. 이 제기랄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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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욕 섞인 질문에서 핵심적 문제 제기는 “그럼 너희 대안은 뭔데?”이다. 일단 접수해보자.

사실 『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집필자들은 ‘공통으로’ 박통이 한국경제를 괄목할만하게 성장, 발전시킨 것은 맞는데(인정은 하겠는데), 그 ‘유산(legacy)’이 너무나 끔찍해서 그 따위 경제발전 모델을 ‘신화’로 포장하고 칭송하는 것은 도저히 역겨워 못 참겠다는 것이다. 이 취지 자체는 얼마든지 동의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독재자 박통이 아닌 다른 민주적 지도자가 박통식 개발독재 모델이 아닌 ‘아름다운 자본주의 발전 모델’ ㅡ 가령, 노르딕 모델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해법 ㅡ 을 전개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이 암시는 필자가 주관적으로 받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박통식 개발독재 방식 이외의 다른 경제발전 모델이나 해법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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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신화’를 고수하며 ‘아름다운 자본주의로의 길’이라는 가능성을 일축하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박통의 경제발전 노선이 ‘최선’이었음을 강변한다. 따라서 이 논쟁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성격을 가진다. 돌고 돌아 결국 처음 있던 제자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내는 것이 우리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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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8인 저자들은 박통의 경제발전 ‘신화’를 가능하게 했던 ‘미국의 배려와 보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예 그런 언급 자체가 없다. 자신들이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의 ‘구조’도 정확히 모르는 데 그걸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박통 신화 이면에는 미국의 ‘지정학적 양보’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지정학적 중요성이 없는 라틴 아메리카 같은 나라들은 80년대 외환위기가 도래했을 때 IMF 도당들이 쥐 잡듯이 잡아 족쳐 나라를 남미 특유의 라티푼디움 시스템으로 만들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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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IMF나 세계은행은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 국가 주도 경제발전 모델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중국이 하는 것과 같은 발전국가 모델은 그들(초국적 기업 마피아동맹)의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들(가신국들)이 너도나도 자기 완결적 산업구조를 가지겠다고 아우성치면 초국적 기업 마피아들이 세계를 지배하는게 불가능해진다. 서구 선진 산업국들은 아주 오래전 선발 산업화 기간에 ‘보호주의(protectionism)’를 통해 자국 산업을 육성시키지만 단계가 지나면 그들은 타국에 ‘자유 무역’을 강제하며 개발도상국의 홀로서기를 저지시킨다. 경제학자 장하준의 표현대로 말하면 사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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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초국적 기업 마피아동맹 위계서열에서 울트라갑(甲)인 국제금융 뱀파이어들은 ‘자본 자유화’를 통해 타국 경제의 금융 부문에 깊게 자본을 침투시키고 나서(1차 경제 레짐체인지. 우린 80년대 초 두환님 때) 국가에 과중한 채무를 족쇄처럼 씌움으로써 국가가 경제발전의 지휘본부가 되어 부국강병으로 가는 정상적 발전 궤도에 진입할 수 없도록 모든 경제 모세혈관을 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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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자유화 이후 부채 과잉과 버블 경제 폭발로 발생하는 금융위기 발생은 그 나라를 ‘수술’할 수 있게끔 IMF에게 수술 집도권을 부여해 준다. 이게 가장 살벌한 거다. IMF(“International Mother Fucker”)는 잠시 졸도해 있는 경제 시체를 영원히 불구화시키기 위해 발전 동력이 될 수 있는 국민경제의 온갖 장기를 적출해낸다(2차 경제 레짐체인지. 우린 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때 수술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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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모두 그런 수술을 받았다. IMF가 제시하는 긴축 프로그램은 국민경제를 파괴하는 대량살상무기다. 이건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멀쩡하게 놔두면 알아서 회복할 경제를 영원히 못 일어나게 일부러 척추를 부러뜨리는 역할을 바로 IMF가 하는 것이다. IMF는 정확히 말해 ‘국제금융 테러조직’이다. 금융지배를 통한 세계지배를 가능케 하는 도구다. 경제를 경제 프리즘으로만 보는 시각은 글로벌 금융 뱀파이어들의 전방위적 전쟁 전모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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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에서 엮은이 유종일 님은 IMF와 국제금융 자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9쪽)

“외환위기 당시 IMF를 앞세운 국제금융 자본이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강요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이제민, 2007), 이것이 양극화를 심화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양극화 추세는 이미 구조적으로 시작된 이후였다.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면서 IMF와 외국자본의 영향력은 빠르게 퇴조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미국발 외래 사조는 자유화만 원하고 보완장치는 원치 않는 재계의 이해관계와 딱 들어맞아 계속 강화된 것이다(You, 2009).”

여기서 IMF는 그냥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 묘사된다. 꾼 돈을 갚았으니 이제는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는 사채업자쯤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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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사회학자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박정희의 “경제 기적”과 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해주었던 ‘지정학적 이유’를 포괄적으로 설명해준다. 냉전 구도를 배경으로 해 미국이 “붉은 제국” 소련과 대결하면서 아시아 지역 중 중차대한 대소 전진기지인 지정학적 요충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들의 이윤 수탈 탐욕이 억제 당해 왔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냉전 국면이 해체될 즈음 이 요충 지역들은 보호가 요망되는 ‘특수성’을 상실하고 여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약탈 지대(exploitation zone)’가 되었음을 밝힌다.

“펜타곤 관리들은 원료 공급지로서 동남아시아가 가진 중요성에 대해서는 발 빠르게 그 이유를 급조했지만 한국과 베트남에서는 기업 이익이 거의 관철되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이 지역에서는 경제적 이익이 아닌] 전략적, 정치적 우선순위로 말미암아 다른 방향으로 선회해 냉전 기간 일본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호주의, 투자 차별 그리고 해당 국가 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국가 지원 발전 정책을 쓰도록 허용해 주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 기업들과 무역업자들에게 심대하게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워싱턴은 이러한 비용이 아시아 엘리트들로부터 보상으로서 끌어낼 수 있는 전략적 정치/군사 동맹의 대가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기로부터 냉전이 점차 이완되면서 [그동안 지정학적 안보라는 이유로 이윤 추구 금지의 재갈이 물려왔던] 초국적 기업과 무역업자들의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동안 무차별적 약탈로부터 일시적으로 보호받아왔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경제 침투가 시작되었다. 예외가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대한 압력은 하루 이틀 만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년간에 걸쳐 꾸준히 그리고 정확한 판단에 기반을 두어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 마침내 표면화된 것에 불과했다. 즉, 미국 기업의 최고 경영자층과 무역 관련 행정부 관리들은 그간 미국의 [국가안보와 관련된] 이해 때문에 자신들이 일본과 소위 신흥공업국가들(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NICs)의 번영을 ‘방치’해 두었던 것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미국은 이 지역들을 더 이상 ‘정치적 동맹’으로 바라보지 않고 공격적인 무역전쟁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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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치학자 에릭 투쌍(Eric Toussaint) 또한 월든 벨로와 유사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이미 한국은 외국은행(주로 일본계 은행)에 심각한 채무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당시 이자율이 가파르게 상승해 다른 개발도상국들보다 훨씬 타격을 더 많이 받았다. 변동이자율로 빌렸기 때문이다.

1983년에 한국은 세계 4위의 국가채무를 가진 나라였다(430억 달러). 1위는 브라질(980억 달러), 2위는 멕시코(930억 달러), 3위는 아르헨티나(450억 달러)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즉 일본이 전쟁 배상금 형태로 한국에 30억 달러를 건네주었으며 이 돈을 일본계 은행에 지불함으로써 유동성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IMF에 구제 요청을 하지 않아도 됐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다.

이때 한국은 거대한 대외 부채로 인해 나라가 절단날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동아줄을 건네주었다.

'한국 경제에 관한 14번째 발견: 세계은행이 꾸며낸 가짜 스토리'와는 정반대로, 민간 은행들에 의해 촉발된 대규모 해외 부채는 한국을 거의 부채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만약 미국과 일본이 보기에 한국이 핵심적 지정학 요충지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이 굳이 구원의 손길은 뻗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도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가 갔던 길을 가야만 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지정학적 양보는 한국이 80년대까지 ‘부분적으로 독립적인 발전의 경로’를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즉, 특별 대우, 특혜, 다시 말해 ‘우월적 열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세계은행은 수입대체를 통한 [국가 주도의] 산업화 모델를 용인했던 ‘양보’를 철회했다. 1981년에 레이건 집권기부터 국가 개입을 선호했던 경제학자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수석 경제학자인 앤 크루거(Anne Krueger)를 필두로 하는 하드코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메꾸었다.

이미 몇 해 전에 그녀는 수입대체 산업화가 아닌 수출 대체 산업화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경제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수출을 위해 자동차를 생산하겠다는 서울의 결정이 있자마자 그녀의 주장과 일치하는 수출 대체화 산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서울의 결정은 세계은행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서울의 결정은 미국의 자동차 산업계가 보기에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반영해 기존 태도를 순식간에 철회하고 미국 산업계의 이해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갔으므로 한국의 자동차산업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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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 ㅡ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지정학적 전략(특히 군사적 차원에서)은 초국적 기업들의 이해를 ‘규율’했다. 남미국가들처럼 마구잡이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냉전 시대 대결 국면이 IMF나 세계은행으로 대표되는 국제금융의 이익을 무차별적으로 실현하는 데에 제동을 걸어주고, 보호무역과 자국 산업 보호에 기반한 박정희식 국가주도 발전국가 모델에 대한 관대한 허용이 있었다. 이로 인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후발국가의 따라잡기(catching up)가 가능했다. 즉 ‘사다리’가 걷어차이지 않는 조건을 가지게 되었다. ㅡ 그러나 1991년 구소련 붕괴라는 지각변동이 일어남으로써 기존 냉전 대결국면 아래에서 유의미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 과시와 이를 통한 체제 내 민심 이반을 관리해야 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이제 이제는 경제적 양보를 할 필요 역시 사라졌으며 그간 부분적으로 허용해왔던 국가 주도 발전모델에 대한 전면적 파괴 작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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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의도는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로 표출되었으며 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내 다양성은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어 갔다. 따라서 그간 지역에 따라 다소 달랐던 자본주의의 다양한 모델들 ㅡ 홀과 소스키스(Hall & Soskice)가 제시하는 영미식 자유시장경제, 유럽형 조정시장경제, 동아시아 모델 같은 부류의 ㅡ 이 프라이팬에서 달걀 노른자위 터지듯 터져 나가면서 3개 달걀이 하나로 뭉쳐져 완숙으로 잘 익혀져서 그것이 국제금융 뱀파이어들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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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들은 냉전 시기 소련의 영향력 억제라는 당위 앞에서 몇몇 지정학적 요충 국가들을 제멋대로 삼키지 못하고 내키지는 않지만 달리 어쩔 도리 없이 혓바닥만 날름거리며 넘치는 탐욕을 자제해야만 했다. 펜타곤의 전략적 군사 목적을 위반하면서까지 식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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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한국에서 박정희는 미국을 상대로 나름의 레버리지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경제 신화’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 ㅡ 물론 스스로는 독재정권 유지라는 ‘불순한’ 목적 달성이 아니라 ‘우국충정’의 발로로서 국가 대계와 부국강병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였을 테지만 ㅡ 협소한 경공업 테두리 안에서는 수출주도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 요원하다는 계산 아래 중화학 공업(1973년 1월 연두 기자회견서 공표함)을 통한 울트라 메가급 '수출 입국 노선'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기계, 정유 화학, 제철, 조선업 등을 육성하기 위해 대단위 기계공업단지, 종합화학단지, 제철소, 조선소 등을 건설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런 움직임에 대해 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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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계은행은 한국 정부가 중공업 발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설득했다.

“아니, 이 사람들아, 중화학공업은 아무나 하나! 당신네 나라, 변변한 자본이 있어, 기술이 있어, 그렇다고 관련 인력이 있어…? 쥐뿔도 없잖아, 중화학공업이란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정신들 좀 차려, 간밤에 마신 술들이 아직 덜 깼나…?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서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래? 뭘 좀 알고 덤벼야지, 가당치도 않은 일이나 계획하고 있고 말이야…. 박통 말이야, 세계은행이 보기에 아주 상태가 안 좋아…. 헛바람이 너무 들었어! 쯧쯧 쯧 . . .”

그러나 박통은 이런 냉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박박 우겨댔고 세계은행 담당자들은 태도를 바꿔 ‘수입 대체 산업화 정책’을 허용했고 심지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반공(反共)’ 열심히 해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도와주는 정권이니 그냥 봐주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해야 박정희의 경제 신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20
한국이 세계은행과 첫 대출 관련 계약을 맺은 것은 1962년이었고 미국의 압력 하에 1965년에 IMF와 최초의 협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50년 세월이 흘렀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며 모두 환희에 차 있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자영업자 대출을 포함한 가계부채는 2013년 1,019조원에서 작년 2018년 1,737조원으로 불어났고, 올해 말 1,8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 되었고,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의 초 팽창예산 기조에 따라 국가채무는 지난해 680조 5000억 원에서 2023년 1,061조 3,000억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공공기관 부채는 2017년 384조 4000억 원에서 2023년 477조 2,000억원으로 100조 원 가량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며 이 둘을 합치면 2023년 공공부문 부채 총액은 1,538조 5000억 원에 육박한다.

 

21
결국 박정희 경제신화는 미국이 세계지배를 위한 지정학적 고려에서 일시적으로 허용했던 작은 틈새에 불과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온 국민이 뼈 빠지게 만들어 놓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의 과실은 모두 워싱톤 금융가와 초국적 기업들과 국내 재벌 과두들이 싹 쓸어갔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끝나도 오래전에 끝났다. 그리고 그 잔치는 모두를 위한 잔치도 아니었다. 잔칫상 밑에 음식 찌끄레기라도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ㅡ 배고프고 분노가 치민다!!

___________________

주1)
https://focusweb.org/u-s-imperialism-in-the-asia-pacific/
Jun 30, 1998
「U.S. Imperialism in the Asia-Pacific」
By Walden Bello
(published originally in 『Peace Review』.10:3 (1998), 367 – 373)

 

주2)
http://www.cadtm.org/The-South-Korean-miracle-is-exposed
1 July 2019
Series: 1944-2019, 75 years of interference from the World Bank and the IMF (Part 13)
「The South Korean miracle is exposed」
by Eric Toussa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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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진 출처
https://kimsoonjong.com/672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국제정치완전정복(완정넷) 대표작가로 이 글은 https://wanjeong.net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글쓴이: 신현철
국제정치완전정복 대표작가, 국제정치 분석가
지정학적 연구 분석틀을 바탕으로 국제정치의 이면을 파헤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유라시아 시대의 도래를 준비하여 ‘전통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정치학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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