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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계의 책축제: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다 ③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9.11.18 20:20
  • 수정 2019.11.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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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이상(李相)
저술가, 문화기획가
《실천문학》 편집장, 헤이리 예술마을 사무총장, 파주북소리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세계예술마을은 무엇으로 사는가》 《헤이리 두 사람의 숲》 등의 책을 썼다. [편집자 주]

 
Book Festival이 뜨겁다. 영국에서만 300개가 넘는 책축제가 열린다. 대부분 2천년대 들어 생겨났다. 책축제는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마당이자 아이디어를 나누는 지식 공유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문화가 범람하는 역설은 무엇 때문일까? 독특한 문화 환경을 빚어내고 있는 전세계의 주요 책축제를 소개한다. 
 

 

◆ 이매진 더 월드(Imagine the world): 헤이 축제

헤이 축제에는 개막식이 없다. 개막일 아침부터 대뜸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하루에 오륙십 개씩 해서 모두 7백여 개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밤 10시가 넘어 시작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헤이 축제에는 흔히 다른 축제에서 보는 왁자함이 없다. 축제란 모름지기 재미 있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도 없다.

해외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은 축제, 축제 노하우를 전수해 해외에서만 수십억 원을 벌어들이는 축제, 자신뿐 아니라 후원사들에게도 예술 기업상을 안겨준 축제. 헤이 축제(Hay Festival) 이야기다.

‘영어 사용 세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축제’라는 《뉴욕타임스》의 찬사도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축제가 열리는 5월이면 세계 각지에서 저명한 문인들과 수십만 명의 독자들이 모여든다. 헤이 축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알찬 문학축제이자 규모 면에서도 가장 크다.

책마을 헤이온와이의 중심 헤이 성. 고성을 서점으로 개조하였다. ⓒ이상

“나이는 물론 관심과 취향, 배경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고품격의 이벤트가 넘쳐난다. 헤이 축제의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최측의 말대로 열하루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동시다발로,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백 개의 행사를 뉘라서 다 볼 수 있겠는가?

축제장에 가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증부터 인다. 대도시나 하다 못해 지방 중소도시도 아니고, 변변한 대중교통 편도 없는 벽촌 아닌가.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씩 차를 몰고 가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불편함이 성공의 비결이었다면 비약일까? 헤이온와이(Hay-on-wye)를 찾는 사람들은 진지한 독자일 수밖에 없다. 작은 동네이다 보니 묵을 곳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1시간 남짓 떨어진 인근 도시에 숙소를 잡고, 며칠씩 출퇴근 하듯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어찌 진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축제장에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은 사람들도 제법 된다던가.

헤이온와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계에 위치한 산골마을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성업을 구가하던 작은 도시였지만, 근대화의 물결에서 밀리면서 쇠락한 동네로 변했다. 헤이온와이가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책마을이 되면서 였다.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라는 괴짜 청년이 마을에 들어와 소방서 건물에 서점을 차렸다. 1962년의 일이다. 서적상들이 따라 들어와 하나 둘 서점을 차리면서 책마을의 규모가 갖추어졌다.

“새책은 저자가 결정하고, 헌책은 독자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헌책이 더 민주적이고, 가치가 높지요.”

헤이온와이를 세계 최고의 책마을로 만든 리처드 부스를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이상

리처드 부스에게서 직접 들은 그의 헌책 예찬론이다. 그런 철학과 열정이 있었기에 정신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헤이온와이를 세계 최초의 책마을로 만들어내고, 헤이온와이를 본딴 책마을이 전 세계 도처에 만들어지는 발판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헤이온와이에는 현재 30여 곳의 서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서점들은 특정분야의 책만 취급하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영미문학, 추리소설, 시, 원예, 영화, 아동, 일러스트 등 어느 한두 분야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유명세를 타면서 차츰 관광객이 늘어났다. 마침내 웨일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책축제가 시작되었다. 1988년 봄의 일이다. 첫걸음은 소박했다. 마을 안의 주차장과 초등학교, 그리고 펍 같은 실내 공간이 축제장이었다. 첫해에는 모두 22개의 행사가 열렸다. 용케도 많은 사람이 찾아주었다. 차츰 축제의 규모가 커졌다. 2005년부터는 마을 외곽에 큰 규모의 축제장을 별도로 조성하였다. 수십 동의 텐트가 세워진 행사장 면적만 1만 평이 넘을 것 같아 보였다. 좌석을 계단식으로 만든 큰 텐트는 1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인근의 넓은 초원은 주차장으로 사용한다.

2011년 헤이 축제 첫날에 열린 헤이 피버 프로그램의 하나. ⓒ이상

헤이 축제는 책축제임에도 행사장에서 책을 팔기 위해 안달하지 않는다. 옥스팜이라는 자선단체에서 운영하는 단 하나의 서점만 운영한다.

“모든 아이디어는 어디에선가 시작됩니다. 헤이 축제에서 최신의 아이디어를 따라 잡으십시오.”

헤이 축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아이디어다. 책과 토론을 통해 최신 지식사회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직접 느끼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으라는 의미다.

프로그램에 참가하려는 어린이와 선생님들. ⓒ이상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저자와 독자가 만나는 행사다. 저자는 독자를 만나기 위해, 독자는 저자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책 문화를 즐기기 위해 헤이 축제를 찾는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이 얻은 지식과 아이디어에 상응하는 값을 치른다. 대부분의 강연, 대담, 저자와의 대화 같은 프로그램 하나하나의 입장료가 우리 돈 만 원 정도 된다. 그런 까닭에 정부의 지원 없이도 페스티벌이 자생할 수 있는 것이다.

행사장 뒤편에는 어김없이 텔레비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BBC, 스카이 아츠 같은 방송사들이 프로그램을 찍어 전 세계에 전파를 띄워 보낸다. 헤이 축제의 글로벌 방송 파트너인 BBC는 2017년에만 25개의 방송 프로그램 속에 축제를 담아냈다. 한동안 헤이 축제의 타이틀 스폰서는 《가디언》 《텔레그래프》 같은 언론기관이었다.

피버(Hay Fever)는 어린이를 위한 축제 속의 축제다. 어린이들에게 맞는 책 문화와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기 위해 공들여 준비한다. 축제에 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찾아가 문학 이벤트를 개최하는 프로그램도 비중 있게 진행한다.

헤이 축제는 사람들이 헤이온와이를 찾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축제의 성공은 책마을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보장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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