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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민주의 몰락과 핀란드 성냥팔이 소녀

■ 68시대 히피 좌파의 고전적인 컨셉에 집착하는 유럽 사민주의의 풍경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9.12.19 09:05
  • 수정 2020.05.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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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부산 영도 바다 건너 대마도
사진 / 부산 영도 바다 건너 대마도

 

김대규/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이태가 쓴 수기 '남부군' 바람을 타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가 태종대까지 간 적이 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가 보인다고 했다. 오륙도와 대마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처지에 돈 내고 보는 망원경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대마도에서는 부산이 확실히 보였다. 거대한 육지 덩어리가 바다 건너 있다는 걸 망원경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부산과 대마도까지 최단 거리 오십여킬로, 가까운 히타카즈항까지는 쾌속선으로 1시간 10분에서 1시간 30분 사이면 도착한다. 대마도 최북단 한국 전망대에서는 우리나라 핸드폰 기지국 신호도 약하게나마 잡힌다.

핀란드 헬싱키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도 부산-대마도 만큼이나 멀지 않다. 뱃길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비행기로 가면 십오 분이면 넉넉하다. 이륙했다 싶으면 곧 착륙한다. 우리나라에서 에스토니아를 가려면 헬싱키를 거쳐야 한다. 반대로 에스토니아 사람들도 국제선 좀 타려면 헬싱키로 가는 게 좋다. 그만큼 인구 130만의 소국 에스토니아 경제는 이웃 대국 핀란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미지 1] 핀란드의 신임 총리, 34살의 산나 마린(Sanna Marin)그녀는 ‘백화점 계산원(a department store cashier)’으로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 / 핀란드의 신임 총리, 34살의 산나 마린(Sanna Marin)그녀는 ‘백화점 계산원(a department store cashier)’으로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서방뉴스 통신원인 연합뉴스는 소국 에스토니아의 늙다리 내무장관이 젊고 예쁜 핀란드 새 총리를 '여점원'(sales girl)이라고 "조롱"했다가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부랴부랴 사과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동시에 "수납원(cashier)도 총리 되는 핀란드가 자랑스러워"라는 새 총리의 반응을 대비시켰다. 과연 유럽 사민주의를 흠모하는 이들이 좋아할 만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단발성 기사는 새겨 읽어야 한다. 기사를 읽고 나면 MSG 가득한 오뎅 국물을 마시고 난 뒤의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후진 에스토니아, 선진 핀란드'라는 이미지가 곧장 각인되기 때문이다.

 

이미지 / 에스토니아의 내무장관 마트 헬메(Mart Helme. 그는 자신의 당(Ekre)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토크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여자 판매점원이 수상이 되었는지를 보고 있구요, 그리고 어떻게 다른 거리 활동가들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핀란드] 내각에 모여드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이미지 / 에스토니아의 내무장관 마트 헬메(Mart Helme. 그는 자신의 당(Ekre)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토크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여자 판매점원이 수상이 되었는지를 보고 있구요, 그리고 어떻게 다른 거리 활동가들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핀란드] 내각에 모여드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우선 에스토니아 내무 장관이 언급한 "여점원(sales girl)"과 총리가 말한 수납원(cashier)과의 개념상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나아가 사민주의 정당이 몰락을 거듭하는 유럽의 정치풍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에스토니아 장관의 눈치 없는 'sales girl' 발언을 가볍게 웃고 지나치기 어렵다.

유럽에서는 근래 사민주의 정당의 '퇴조'와 '몰락'이 두드러진다. 독일에서는 사민당이 민족주의 대안정당(AfD)보다 지지율이 낮고,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대선 지지율이 6% 정도였다. 영국에서도 노동당이 집권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유럽에서 보호무역과 자국 우선주의로 재무장한 보수주의자들이 하나둘 집권하는 이때 사민주의자들은 여전히 68시대 히피 좌파의 테마인 여성, 동성애, 흑인, 인권 등 고전적인 컨셉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쪽 변방 핀란드에서 여전히 68시대의 정치 동화가 미약하나마 실현되고 있으니 영국의 가디언이나 뉴욕타임스가 주목할만하다.

일천한 경력으로 단기간에 정치 엘리트로 성장한 산나 마린이 내세운 핵심 열쇠는 젊음, 여성, 동성 부모다. 반세기 이전, 부모 세대인 68시대 히피 좌파의 그것과 닮았다. 몰락하는 핀란드 사민당이 집안을 구하기 위해 마린이라는 어린 소녀를 판매원(sales girl)으로 내세워 마지막 남은 성냥갑을 팔려는 것을 빗댄 것이라면 쬐그만 나라의 경망스러운 늙다리 내무장관이 내지른 'sales girl'이라는 발언은 "핀란드는 수납원이 총리가 되는 나라"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시그널]

 

◇ 글쓴이: 김대규

독일 기센대학 법학(박사),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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