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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사랑의 새로운 형태, 시선과 기억

  • 기자명 조동록
  • 입력 2020.02.18 16:15
  • 수정 2020.02.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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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 의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의 원제는 ‘Portrait of a Lady on Fire’이다. 원제를 고려하자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엘로이즈의 드레스에 불이 붙는 장면과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불타는 장면이 모두 등장하기에 이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일러스트 - 조원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일러스트 - 조원희

 

마리안느가 고용되기 전의 화가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실패했다. 엘로이즈가 초상화 그리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하려 자살을 택했다. 결국 엘로이즈는 언니를 대신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했다. 엘로이즈는 이에 대해 분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초상화를 위한 포즈를 잡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 그림은 얼굴 없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마리안느는 촛불을 들고 그 그림을 관찰했다. 마리안느가 들고 있던 불이 그림으로 옮겨갔다. 그림 속 얼굴 없는 여인의 가슴에 붙은 불은 점점 더 타올랐다. 애초에 실패한 그림 자체가 분노의 산물이었지만, 그 불은 엘로이즈의 분노를 더욱 시각적으로 보여줬다.

여인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노래를 시작한다. 그 노래는 신비롭다 못해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들 곁에 있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한다. 엘로이즈는 치마에 불이 붙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마리안느를 응시한다. 이를 단적으로 엘로이즈 마음이 불같이 달아오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불보다는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그을림에 비유하고 싶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법은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선의 상호성: 사소하지만, 숭고한 시발점

마리안느는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엘로이즈의 산책에 동행한다. 첫 산책에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듯 쳐다본다. 엘로이즈의 얼굴을 쳐다보다 엘로이즈와 눈이 마주치면 피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렇게 ‘일방적인’ 관찰로 완성된 첫 번째 초상화는 마리안느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라 미술의 ‘규칙, 관습, 이념’으로 채워졌다. 마리안느는 첫 번째 초상화로 작업을 끝내려 했으나, 엘로이즈의 진실된 모습을 본 후 초상화의 얼굴을 뭉개버렸다. 실패한 화가가 남겼던 그림처럼 얼굴 없는 초상화가 된 것이다. 아예 얼굴을 안 보고 그렸던 그 그림과 마찬가지로 첫 번째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진실된 모습이 투영되지 않았다.

 

불의 의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일러스트 - 조원희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연적이다. 그동안의 시선은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에서 일방적이었다면, 엘로이즈는 시선의 상호성을 상기시킨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굴 보겠어요?’ 일반적인 시선이 아니라 서로를 응시하면서 진실된 모습을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별 뒤에는 다시 일방적인 시선으로 전환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보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보지 못 한다. 엘로이즈는 처음으로 찬송가가 아닌 음악을 들으며 기쁨의 웃음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린다. 이 결말은 영화가 끝나고도 마치 몸이 굳은 것처럼 쉬이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먹먹한 것과는 다른 압도적인 적막이 영화관을 감돈다.

 

■사랑의 또 다른 방법, 기억

오르페우스 신화는 익히 들어 익숙할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로디케를 살리기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가 자신의 특기인 리라 연주로 저승의 신을 감동시켜 아내와 이승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오르페우스는 지하세계의 출구를 눈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이 신화를 들어봤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오르페우스가 멍청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의견이고 바로 소피의 의견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 비극을 예술로, 사랑으로 해석한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이 아닌 시인을 선택했다고 본다. 에우리디케와의 사랑을 추억으로 남기고 그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가 아닌 에우로디케에게 집중했다. 에우로디케가 ‘뒤돌아봐’라고 말했기에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봤다는 것이다. 이는 선택의 주체를 오르페우스에서 에우로디케로 전환하는 해석이다. 뒤돌아보는 행동의 주체는 오르페우스지만, 행동을 시킨 주체는 에우로디케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시선의 상호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로디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이다. 이로써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를 일반적인 관계에서 상호적인 관계로 전환한다.

각자의 해석은 각자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마리안느는 화가답게 이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로디케의 이별을 그린 그림과 타오르는 엘로이즈의 초상으로 사랑을 기억했다. 반면 엘로이즈는 영원한 이별을 선택했다. 그녀는 떠나려는 마리안느에게 ‘뒤돌아봐’라고 외쳤다. 서로 이별의 방법은 달랐지만, 사랑의 형태는 같았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지만 서로를 기억함으로써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 [기고] 시그널강동기자 조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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