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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는 ‘진보'(progress)가 싫다!

■ 강자가 진리라는 사회적 진화론을 벗어날 수 없는 ‘진보’라는 단어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03.25 08:15
  • 수정 2020.05.2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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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사진/1847년 아일랜드 주둔 잉글랜드 육군 장교 포프 대위, 영화 [블랙 47]에서
이미지=1847년 아일랜드 주둔 잉글랜드 육군 장교 포프 대위, 영화 [블랙 47]에서

영화 <블랙 47>은 1847년 아일랜드 대기근을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원인 모를 병으로 감자가 썩어나가서 아일랜드 인구가 대량으로 아사한 일을 말한다. 얼마나 죽었느냐 하면 현재 북과 남쪽 아일랜드 인구를 모두 합쳐도 1840년대 아일랜드 인구 팔백만 명에 미치지 못한다. 추정치에 따르면 인구 4분지 1 또는 5분지 1일 이상이 죽어 나갔다. 영화 초반 흑백 화면이 선명한 <블랙 47> 줄거리를 간략히 말하면 동인도회사의 켈트 용병이었던 마틴 피리가 대기근 과정에서 죽어간 가족들의 복수를 펼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영화는 복수극이지만 다른 한편 아일랜드 켈트인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인종주의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다. 가령, 잉글랜드 육군 대위 포프는 기차에서도 계급이 낮은 파트너나 중간계급의 기자와 대화하는 대신 꼿꼿한 자세로 성서를 읽는다. 기자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아일랜드 서부에 일어난 대기근의 경제적 원인을 탐사하겠다는 여행 목적을 말하자마자 대위는 단호한 목소리로 갈라디아서 6장 7절 문구를 암기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아일랜드에 기근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술에 쩔어 있고 게으른 인종이기 때문이라고 포프 대위는 단정 짓는다. 나아가 미련하게도 감자라는 단일 작물 하나에 목을 걸고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며 미개한 켈트인들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라고 여긴다. 그의 입장은 마치 '술과 게으름 그리고 구습에 쩔어 있던 조선인 영혼을 구원한다'는 서양 선교사들 그것과 유사해 보였다. 피선교자에 대한 이런 묘사는 동인도회사를 비롯한 영국의 식민 경영기구들이 전면에 내세웠던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감자잎마름병이 유행했던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아일랜드와 같은 대기근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일까? 잉글랜드인처럼 가혹한 착취가 없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지주들은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높은 소작료를 매겼다. 그리고 흉작으로 식량값이 올라간 잉글랜드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한톨 옥수수와 호밀마저 더블린과 벨파스트 항구로 실어냈다. 게다가 지주들은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구빈세 부과에도 반발해 소작농을 땅에서 몰아내고 가옥을 철거하여 감자밭마저 양을 키우기 위한 풀밭으로 바꾸어 버렸다. 영국은 소유권 절대의 원칙, 사적 자치의 자유, 심는 대로 거두는 자기 책임의 원칙을 보장하는 진보한 자유주의 문명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1840년대 아일랜드 인구를 절반이 죽거나 이민을 하게 만든 대기근을 인재라고 말한다.

잉글랜드의 인종주의적 입장은 마가렛 대처에 이르는 현대까지 포프 대위와 달라진 게 없다. 켈트인은 ‘게으르고 술주정뱅이며 게다가 폭력적이어서 테러를 서슴지 않는 인종’이다. 흑백영화의 흑백처럼 다른 인종과 민족, 지역 그리고 타자에 대해 <퇴보 vs. 진보> 시각으로 이원화하는 태도는 약탈자에게 인종적 자부심을 심어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은 수백 년 이어져 온 아일랜드 켈트 민족의 원한을 낳았다. 아울러 대다수 피약탈 민족이 갈라지고 분열하고 가난을 면치 못한 원인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잉글랜드의 교만한 진보가 싫다.

포프 대위의 후예들이 지휘하는 군대를 이남에 주둔시키며 내정 간섭하는 미국의 '인권 진보'도 싫다. 강자가 진리라는 사회적 진화론을 벗어날 수 없는 진보라는 단어 자체도 싫다. 동방의 아일랜드 대한민국에서 서양 흉내 내는 진보 따라쟁이는 좋고 싫고의 범주를 벗어난다. 아예 ‘정신분열자’들이기 때문이다.

 

◇ 글쓴이: 김대규

독일 기센대학 법학(박사),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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