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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연재] 코로나 시대의 교육, 당연한 것을 먼저 의심하라!

채희태의 시대 진단 #10

  • 기자명 채희태
  • 입력 2020.06.17 14:56
  • 수정 2020.06.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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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촉매가 되었을 뿐,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이미 “뉴노멀(New Normal : 새로운 생활표준)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불확실한 미래를 누가 감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뉴노멀 시대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실의 질서를 의심하는 것이다. 니체가 중세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한 것처럼... 

"프리드리히 니체", 내가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는 것 뿐...
"프리드리히 니체", 내가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는 것 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대표하는 질서는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자본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capital)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세계를 동경하며 우리가 태어난 고향을 등졌고, 추억이 묻어있는 골목을 지웠다. 세계화의 균열은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하라 1988’를 보며 아무런 의심 없이 부르짖었던 세계화가 지워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로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세계화를 통해 소비가 주도하는 경제성장정책을 펼쳐왔다. 소비가 주도하는 성장이란 자본이 과잉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소비자에게 과잉, 중복 소비를 유도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공동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때문에 과잉 소비에 방해가 된다. 또한 유행을 통해 멀쩡한 물건도 쓸모없게 만들어 새로운 물건을 구매할 수밖에 없도록 중복 소비를 부추긴다.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주체는 소비자인데, 소비주도 성장에서의 소비는 생산자인 자본이 주도한다. 핀란드 등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시도한 바 있는 기본소득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인 ‘소득주도 성장’은 바로 이러한 소비주도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의 파이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다. 소위 경제성장률(GDP)이라는 수치를 통해 늘어난 파이를 비교하며 끊임없이 국가를, 기업을, 개인을 경쟁으로 몰아간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빵을 100개 생산하는 기업은 빵의 생산량을 200개, 300개로 늘려야 성장을 할 수 있다. 인구가 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더 많은 빵을 먹어야 하는데, 인간의 위가 아무리 커져도 먹을 수 있는 빵의 양은 한계가 있다. 이렇게 생산을 통한 부가가치의 창출이 한계에 다다르면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평당 100만원 하던 땅이 1,000만원이 되면 늘어난 땅의 가치가 경제성장률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가치의 변화는 곧바로 양극화로 이어진다. 경제성장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아이러니하게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이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는 IMF에서도 이러한 문제로 인해 소위 낙수효과를 부정하고 나섰다. 2015년 IMF는 150여 개국의 경제 지표를 분석한 결과, 상위 20% 계층의 소득이 1%포인트 증가하면 이후 5년의 성장이 연평균 0.08%포인트 감소하며, 하위 20%의 소득이 1%포인트 늘어나면 같은 기간의 성장이 연평균 0.38%포인트 확대된다고 밝혔다. 또한 IMF는 "우리의 결론은 하위 계층의 소득을 늘리고, 중산층을 유지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표준(Normal)이 세계화였다면 새로운 표준(New Normal)은 지역화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 지역중심 세계화)라는 신조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자본의 과잉생산을 해소하기 위한 소비주도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다면 소비자가 주도하는 소득주도 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성장이 양극화로 귀결된다면 어떻게 파이를 분배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교육 분야에 대입해 보자. 

첫 번째, 교육은 세계도, 국가도 아닌 교육의 현장인 마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교육에도 지역(local)화가 필요하다. 

두 번째, 교육의 주체가 교육의 제공자인 교사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학생으로 이동해야 한다. 지식이 고정되거나 서서히 확장되는 시기에는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읽고(Reading), 쓰고(wRiting), 계산(aRithmetic)하는 3R이 교육의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보의 확장이 빅뱅 수준으로 팽창하는 시기에는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소통(Communication), 협업(Collaboration),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창의력(Creativity)이 중심이 되는 4C가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4C는 일방적인 주입의 방식으로 길러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필자는 한국의 교육이 하루빨리 학생, 교사, 학부모의 교육3주체론에서 벗어나 학생을 유일한 교육의 주체로 세우는 교육1주체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은 기성세대가 가진 ‘경험의 답습’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확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교육부-교육청-학교-학생으로 이어지는 교육의 권력관계를 교육의 역할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과거에 국가라는 집단을 위해 국민이라는 개인이 존재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민이라는 개인을 위해 국가라는 집단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집단과 개인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는 권력관계가 아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역할관계이다. 권력은 수직적이지만, 역할은 수평적이다. 이른바 교육 분야에도 분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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