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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 회고록의 재구성 ① :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 기자명 김선태 기획위원
  • 입력 2020.06.24 12:09
  • 수정 2020.08.0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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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2일 현지 시간 오전 9시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갖기 전 기자회견을 하는 두 정상
2018년 6월 12일 현지 시간 오전 9시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갖기 전 기자회견을 하는 두 정상

“북미 정상, 한국 각본 따라 움직여” … ‘종전선언’ 불발은 볼턴-폼페이오 합작품

미 사이먼 앤 슈스터 사가 발간을 맡은 존 볼턴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그 일이 있었던 방 : 백악관 회고록』이 연일 화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이 오로지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건을 조작했다고 격분했다. 백악관은 볼턴에게 400여 항목에 걸친 수정 및 삭제 요청서를 보냈으며, 동시에 이 책이 국가기밀을 광범위하게 누설했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미국 측 입장과 별개로 볼턴 회고록은 2018년에서 2019년 사이에 전개된 남북미 3국 정상 간의 회담과 관련하여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어 우리에게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책의 내용과 관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회고록이 정확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면서 “상당 부분 사실을 크게 왜곡했다”고 말했다. 정 실장과 청와대 측은 볼턴의 책이 “정부 간 상호 신뢰에 기초해 협의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해 외교 기본 원칙을 위반”했으며, 트럼프 행정부에 “이처럼 위험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길 기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특히 싱가포르 북미 회담을 다룬 책 4장과 하노이 회담 및 판문점 회담을 다룬 책 11장은 저 역사적인 회담들의 이면사를 상당 분량 다루고 있다. 그중 많은 부분은 볼턴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용도로 선별해 채택했거나 일부 허위로 가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말의 진실이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힘이다. 이런 이유에서 볼턴 회고록을 ‘역지사지’하여 당시 3국 정상 회담의 내막을 살펴본다. 

볼턴, “남북미 정상회담, 한국이 만든 무도회장”

볼턴은 먼저 2018년 6월 18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면사를 들추어낸다. 볼턴에 따르면 “(3월 8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장을 전하자 트럼프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를 수용했다.” 이를 ‘충동’이라 말하는 이유는 볼턴이 보기에 “북미 정상 간의 회동이란 미국의 국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위험한 연극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볼턴은 이 제안이 순전히 정 실장의 작품이거나 최소한 한국 측 시나리오라고 주장하면서, “후일 정 실장이 김 위원장에게 먼저 그런 초대를 하라고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음을 거의 시인했다”는 말을 근거로 들었다. 이렇게 해서 판문점-싱가포르-하노이로 이어지는 남북미 정상회담이 궤도에 오르게 된다. 

볼턴은 “이 모든 외교적 무도회는 한국이 만든 것(This whole diplomatic fandango was South Korea’s creation)”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남북미 정상회담은 미국의 전략보다는 ‘한국의 통일 방안’에 이끌려 추진되었다고 단정한다. 

4월 12일 정 실장이 다시 백악관을 방문하는데, 이때는 남북정상회담이 4월 27일로 확정된 후였다.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공습을 전격 결정하는 등 국제적으로 강성 이미지를 크게 떨치던 시점이며 따라서 네오콘의 일원이자 주전파인 펜스 부통령이나 볼턴 보좌관에게 그가 크게 의지하던 때였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볼턴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한미일 균열을 유도할 것”이라는 우려를 정 실장에게 전하면서 “(그러한) 시도를 막으려면 비핵화에 대한 논의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이후 정 실장이 “남북공동성명은 겨우 2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라 전하자 볼턴은 합의문에 비핵화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이 실리지 않았을 거라 보아 안도했다고 썼다. 달리 보면 이는 당시 한국 정부가 미국 측 입장을 세심하게 배려했음을 알게 하는 에피소드다. 

이 과정에서 볼턴은 일본이 남북미 정상회담 전 과정에 집요하고도 체계적으로 끼어들어 방해 공작을 진행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제 3자인 일본의 행동을 자랑하듯 전하는 내용이므로 이 부분에 관해서만큼은 볼턴의 진술이 대체로 사실에 토대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볼턴이 보기에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의 시각은 한국과 180도 달랐고, 요약하면 자신의 시각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효과도 있다. 

정 실장이 귀국한 뒤인 5월 4일 볼턴은 야치 쇼타로 당시 일본 국가안보국장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야치 국장은 볼턴에게 “북한의 핵무기 보유 의지는 고정불변”이므로 북핵 폐기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야치 국장은 또한 북미가 조율중인 ‘행동 대 행동’ 방식에 따르면 “북의 구체적 비핵화 조치는 먼 미래 일인 반면, 경제적 지원은 먼저 하는 것”이므로 “그게 아무리 적더라도 대북 경제 지원은 무조건 북에 유리한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북의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며 그것도 2년 내에 비핵화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었다고 볼턴은 썼다. 당시 이와 같은 일본 측 주장은 볼턴을 위시한 미국 매파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둘의 입장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보여주고자 볼턴은 애써 사례 하나를 든다. 즉 자신이 트럼프에게 리비아 모델을 들먹이며 “북의 비핵화는 6~9개월 내에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전 4월 18일 싱가포르 마라라고에서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 역시 “북의 비핵화는 6~9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아베는 한 술 더 떠 트럼프에게 협상 방법에 대해 훈수까지 뒀다고 한다. 그 하나는 “북에 대한 최고의 협상무기는 군사적 압박”이라는 것이다. 아베는 그 배경으로 예전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켰을 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공포에 떨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베의 두 번째 근거는 “며칠 전 있었던 미국의 대 시리아 공습이 북한에게 이미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볼턴에 따르면 아베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신은 오바마보다 강한 인물”이라 추켜세우며 김정은에게 이를 일깨워줄 필요가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볼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북미 회담의 성과와 관련해 한국의 문 대통령은 ‘지극히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반면, 아베는 그와 모든 면에서 정반대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볼턴이 보기에 당시 트럼프는 애석하게도 자신의 견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어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중이었다. 

“김 위원장, 문 대통령 설득에 싱가포르행”

한편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볼턴에 따르면 다음날 한미 정상간 통화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포함하는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고 말했다.” 또 문 대통령은 자신의 요청에 따라 “김정은 위원장이 1년 내에 비핵화를 달성하는데 동의”했음을 전했다. 

하지만 볼턴은 판문점 회담이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들만 날아다닐 뿐 실질적 내용은 거의 없는 DMZ(비무장지대) 축제일 뿐”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는 “트럼프에게 전화하는 내내 문 대통령은 (회담이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고 조롱했다. 

그럼에도 볼턴은 남북미 3국 수뇌 사이에 긴박하게 메시지가 오가던 과정에서 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한국이 분명히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었음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회고록 여기저기서 토로하고 있다. 

그중 하나로 북미 싱가포르 회담이 있기 전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남북미 3자 회담을 집요하게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트럼프 대통령 띄우기’ 전략을 구사하자 우쭐해진 트럼프가 “내가 (대북 외교를) 얼마나 많이 책임지고 있는지 밝혀달라”며 문 대통령에게 조르기까지 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하지만 볼턴 등이 나서 “김정은이 싱가포르를 선호한다”는 주장을 펴는 통에 한국 측의 입장은 관철될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의 요청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는 볼턴이 후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당시 두 정상간 통화가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이라고 엄살을 부렸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5월 4일 정의용 실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판문점회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다. 정 실장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에 동의하도록 압박했고, 김 위원장이 공개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합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다만 정 실장은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북미 정상이 어떤 ‘빅딜’에 도달한다 해도, 북한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비핵화를 완수한 뒤가 될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는 게 볼턴의 설명이다. 최종 결정은 북미 양 정상이 내릴 문제이며, 특히 미국의 핵심 요구를 북한이 수용해야 함을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설득한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다면 회담을 미룰 이유가 없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한미 연합훈련이 장애물로 등장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볼턴은 “문 대통령 방미 이전 북미정상 회담 취소를 트위터에 올리도록” 트럼프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며칠 주저하던 트럼프가 문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통에 방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5월 8일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으로 날아가 정상회담 준비를 진행했고 이틀 뒤 세 명의 미국인 인질을 데리고 미 앤드류 공항에 착륙했다. 볼턴에 따르면 트럼프는 그날 내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즐겼고, 다음날 새벽까지도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볼턴 역시 정상회담 준비 차 정 실장과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하게 되었다. 

존 볼턴의 『그 일이 있었던 방 : 백악관 회고록』 영문판 책자 표지
존 볼턴의 『그 일이 있었던 방 : 백악관 회고록』 영문판 책자 표지

펜스-볼턴-폼페이오 합심해 ‘종전선언’ 삭제

워싱턴 정가가 북미 정상회담 문제로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물밑에서 바빠진 쪽은 매파들이었다. 이번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나섰다. 마침 한미 정상회담이 있던 5월 22일 펜스 부통령이, “리비아 모델이 (카다피의 죽음으로) 끝난 것처럼 김정은 위원장도 합의를 하지 않을 경우 끝장”이라는 말폭탄을 퍼부었다. 

이에 북한 외무성 최선희 부상이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도 않으며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이라 응수하면서 회담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양 정상이 이 문제를 실무선상의 일로 치부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는데 볼턴에 따르면 그보다는 한국 측이 문제였다. 

22일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싱가포르 회담에 참석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난색을 표했지만 한국 측은 남북미 3자 회담을 끈질기게 요청했고 심지어 회담 전날까지도 참석을 타진해 왔다고 볼턴은 썼다. 

볼턴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참석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은 쪽은 북측이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막은 현 단계에서는 알 길이 없다. 6월 1일 북한 김영철 부위원장이 백악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북미회담이며, 남한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지만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언제든 말려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남북미 3자 회담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러므로 그가 “북한이 3자 회담엔 관심이 없다고 한 것이 트럼프-김영철 회동의 유일한 좋은 소식”이라고 쓴 것은 그 나름 일리가 있다. 

볼턴은 김영철 방문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존 켈리 비서실장이 대통령 집무실로 김 부위원장을 안내했는데, 김 부위원장이 얼마나 긴장했던지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차에 두고 내렸다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볼턴 자신은 “북측이 끔찍하게 싫어한 인물”이다. 이에 관해 볼턴은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을 배석한 북측 관리들이 정 실장에게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나(볼턴)의 역할은 무엇인지 거듭 캐물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북측은 볼턴 한 사람으로 인해 전체 판이 깨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영철 방문 당시 주 의제 중 하나가 ‘한국전쟁 종전선언 합의’ 건이었다. 볼턴은 “처음에는 그게 북한의 아이디어라 생각했지만 상황을 되새겨보니 문 대통령이 밑그림을 그린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고 썼다. 게다가 “트럼프마저 회담 일주일 전까지 종전선언을 ‘언론에게 점수를 딸 기회’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24일 북측이 회담 취소를 밝혔음에도 이틀 뒤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예정된 날짜에 회담을 열 수도 있다”고 발언한 것이 그 근거다.

아니나 다를까, 볼턴은 회담 전 일주일 동안 폼페이오 장관을 포함한 네오콘 전략가들과 머리를 맞댄 채 대책을 숙의했다. 그로써 “종전선언 대가로 핵·미사일 신고를 포함하는 방안”에 트럼프가 기어이 동의하게 만들었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볼턴을 비롯한 미국 매파들이 치밀하게 움직인 결과 ‘종전선언’ 문구는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회담 공동성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공표되었지만 그에 상응할 정치경제적 보장은 제시되지 않았다. 

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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