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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연재] 사이코’니까’ 괜찮아!

채희태의 시대 진단 #13

  • 기자명 채희태
  • 입력 2020.07.27 19:14
  • 수정 2020.07.28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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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책을 하나 쓰고 있어서 칼럼 연재의 속도가 더딥니다. 당분간 양해 부탁드립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는 누가 봐도 사이코인 동화작가 ‘고문영(서예지 분)’이 등장한다. 인간에게 있어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왜곡된 관계는 때때로 가식으로 치장된다. 의미 없는 관계를 지키기 위한 가식이 난무한 사회에서 진실은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진실이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관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관계가 진실보다 중요한 사회에서의 관계는 진실을 왜곡시킨다.

고문영의 독설 섞인 진실도 불편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숨긴 채 자폐에 걸린 형(성태)을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강태(김수현 분)의 상황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고문영은 그런 강태에게 ‘위선자’라고 독설을 퍼붓지만, 오히려 강태는 그런 고문영에게 끌린다. 익숙한 것은 사실 매력이 없다. 우리는 늘 익숙함을 추구하지만 정작 우리의 뇌리는 언제나 낯섦이 차지한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이 길라임의 낯섦에 빠지는 것처럼,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강태는 문영의 사이코 같은 성격에 매료된다. 그렇게 인간은 마치 이가 빠진 동그라미처럼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낯섦이라는 조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잃어버린 조각, 고문영과...
서로의 잃어버린 조각, 고문영과...
서로의 잃어버린 조각, 고문영과 문강태
문강태

그리고 강태를 좋아하는 착한 캐릭터 ‘남주리(박규영 분)’도 술을 마시고 자신의 양심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놓은 본심을 꺼내 놓는다.

진짜 나쁜 년이 되어야 강태의 결핍된 조각이 될 수 있을텐데...
진짜 나쁜 년이 되어야 강태의 결핍된 조각이 될 수 있을텐데...

영화, “조커”가 악당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라면,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왜곡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이코의 사정을 다룬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사이코패스(paychopath)’ 또는 ‘소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성 인격장애)’라고 비난한다. 사이코의 입장에서 보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진실을 당장의 왜곡된 관계를 위해 숨기고 살아야 하는 이 사회 자체가 사이코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을 소시오패스로 몰아세우기 전에 내가 소시오패스는 아닌지 먼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주변엔 지극히 멀쩡한 사람을 소시오패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10화, ‘양치기 소년’ 편에서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 성태는 동생, 강태가 자신을 물에 빠뜨여 죽이려고 했다는 왜곡된 기억을 사람들한테 이야기한다. 성태가 진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고문영 작가와 1박을 하고 온 강태에 화가 나 그렇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른다.

진실은 이렇다. 어렸을 적 형만 두둔하는 엄마에게 화가 나 “형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집을 나온 강태는 자신을 따라온 성태가 얼음물에 빠지자 처음엔 못 본 체 도망치려고 하지만, 결국 형을 구해주고 자신이 물에 빠진다. 물에서 나온 형은 그 자리를 피하고, 정작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강태를 구해준 것은 사이코, 문영이었다. 강태는 형에게 실행에 옮기지 못한 그 마음을 들킨 것에 대한 죄책감에 문영에게 그때 왜 자신을 살려 줬냐고 원망한다.

그리고...
성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각자 진실과는 무관한 왜곡된 진실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외눈박이가 사는 사회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 취급을 받는다. 진실보다 왜곡된 관계로 유지되는 사회라면 차라리 사이코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원순 시장에 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진실보다는 왜곡된 관계에 더 집착하는 듯 보인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관련해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억울’이라는 단어는 오직 한글에만 있다는 사실을... 영어로도 억울하다는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억울할 때 사용하는 영어 표현이다.

 

It’s not my fault. I’m really frustrated.

 

여기에 쓰인 frustrate는 억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짜증, 좌절, 화가 난다는 의미이다. 만약 영어에 ‘억울’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면 굳이 이렇게 긴 문장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일본어를 살펴보자. 우리는 피겨 여왕 ‘김연아’를 사랑하는 만큼, 그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미워한다. 아마 아사다 마오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사다 마오를 미워하는 데에는 한국 언론이 한몫을 했다. 김연아와의 경기에서 진 아사다 마오는 ‘쿠야시이(悔しい)’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한국 언론은 이 단어를 ‘억울하다’로 해석해 실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당한 경기 결과를 억울해하는 아사다 마오를 ‘사이코’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쿠야시이의 의미는 ‘억울하다’ 보다는 ‘분하다’, 또는 ‘후회스럽다’에 가깝다. 그리고 일본어에는 ‘억울’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사다 마오는 억울하다" (링크 클릭)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제 의심을 해봐야 한다. 왜 한글에만 억울하다는 단어가 있을까?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 번째, 우리 민족이 겪은 '억울하다'는 감정을 다른 언어권에 살고 있는 민족은 안 겪었을 수 있다. 두 번째, 우리가 느끼는 억울한 감정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에게 억울한 감정을 느끼게 한 타인을 향한다. 즉, 우리는 유전적으로 자기 성찰을 못하는 민족일 수 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대한민국의 다양한 사회문제는 우리가 함께 책임을 느끼고 헤쳐 나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억울하다는 말로 그 책임을 나에게서 분리시켜 평소 꼴 보기 싫은 누군가에게 전가한다. 마치 미국에서 범죄의 용의자로 흑인과 백인이 동시에 지목되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흑인부터 의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실은 그 결과도,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불편하다. 그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수 없다면 쉽게 감정을 선택해 입 밖으로 배설하는 행위를 삼가야 하지 않을까?

 

난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며 오히려 사이코가 될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사이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중 누가 감히 사이코’지만’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사이코’니까’ 괜찮은 게 아닐까? 관계로 엮여 있는 인간사회에서 개인화된 사이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사회의 편의를 위해 불편한 무언가를 사이코로 규정해 분리하고 싶을 뿐이다. 사회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사회를 통해 행복할 수 없다면 그 사회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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