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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연재] 반반(反半)전문가의 전문성 비판

채희태의 시대진단 #15

  • 기자명 채희태
  • 입력 2020.08.06 16:21
  • 수정 2020.08.0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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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에 이어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학자로 떠오르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은 모든 사회체계(전문성?)은 사회의 필요성으로 인해 출발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확대재생산에만 몰입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 평교사 출신 국회의원인 강민정 의원(열린민주당 비례 대표)의 "국가, 지자체 책임 온종일 돌봄 특별법" 발의를 보며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강민정 의원은 "교육은 학교가 전담해야 하지만 돌봄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말꼬리를 잡고자 하는 의도는 없지만, 그렇다면 학교는 국가와 사회에서 떨어진 또 다른 국가, 또 다른 사회라는 의미인가? 필자는 2015년부터 2년 2개월 14일 동안 서울시교육청에서 어쩌다 공무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실재로 필자가 서울시교육청에서 만나본 교육전문가들 중에서는 태초에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를 위해 마을이 존재하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국회의원 당선 후 아이들을 중심에 두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힌 강민정 의원이 교사가 아닌 시민, 그 중에서도 학교 밖 청소년들을 포함한 교복 입은 시민인 학생들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글은 전문성의 함정과 시작, 그리고 그 역설적 결과에 대해 총 3편으로 나누어 연재할 계획이다. 


1. 전문성의 함정

변명으로 시작한다. 교육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사실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가끔 나를 특정한 영역의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때마다 난 전문가라는 명칭으로 날 불러주지 말 것을 요청하곤 한다. 수없이 많은 전문성이 난무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그 어떤 전문성도 이 사회의 보편적 성장을 위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불친절한 전문성에 대한 견해를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한번은 학교 밖 청소년들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한 공공기관에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렇듯 운영위원 앞에서 자신들의 전문성과 그 노력을 한껏 뽐내고 싶었으리라. 자신들은 작년엔 몇 명의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났고, 올해에는 더 많은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발표를 들으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기관이 점점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계속 더 불행해져야 하나요?”

 

그 기관을 비난하고자 든 비유가 아니다. 그 기관의 대표는 매우 헌신적이며, 서울시에서 이동 쉼터를 위탁받은 그 기관 또한 누구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한껏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전문성이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성실하게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은 것이다.


전문성을 비판하기 위해 끌어올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분야는 역시 정치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음모 집단의 내부 고발자, 윤태호 원작의 영화 '내부자들'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우장훈 검사(조승우)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이 사건에 유력한 대선주자인 장필우(이경영)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주간인 이강희(백윤식)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장훈 검사는 이들에서 배신을 당한 조폭 안상구(이병헌)가 비자금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폴리페서로 국회의원이 된 대학 은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우장훈 검사 : 교수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폴리페서 : 뭐가?
우장훈 검사 : 걱정이 좀 돼서요. 교수님 같으신 분이 이런 정치판에 계신다는 게 좀...
폴리페서 : 내가 처음 여의도에 들어올 때, 누군가 나한테 그러더라구. 여당, 즉 집권당이 되는 거 외에 국회의원이 정치적으로 지향할 것은 없다. 정치란 큰 의미로 생존! 국가의 생존, 국민의 생존, 그리고 나의 생존이다. 하하….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정치의 목적은 정치인을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은?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정치의 목적은 정치인을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은?

소위 정치의 전문성이 지향하는 바가 과연 국가와 국민의 생존일까? 정치인에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보다 더 중요할까?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치’의 개념과, 현재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어 존재하고 있는 ‘정치’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치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전문적 보편성이라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정치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각국 정부가 다음 선거보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드문 상황”이라는 표현으로 인류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는 전문화된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치의 전문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현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 외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우리나라에서 정치만큼 손쉽게 비판할 수 있는 분야도 흔치는 않다. 오해를 막기 위해 장의 제목을 상기하자. “반반(反半)전문가의 전문성 비판”. 난 정치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으로서 정치를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혐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보편적 정치의 개념을 되찾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참여로 전문성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정치를 구출하자는 의미가 강하다. 이미 다른 전문성에 빠져있어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정치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답이다.


2편 전문성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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