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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연재] 반반(反半)전문가의 전문성 비판 3

채희태의 시대 진단 #17

  • 기자명 채희태
  • 입력 2020.08.07 18:31
  • 수정 2020.08.0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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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에 이어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학자로 떠오르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은 모든 사회체계(전문성?)은 사회의 필요성으로 인해 출발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확대재생산에만 몰입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 평교사 출신 국회의원인 강민정 의원(열린민주당 비례 대표)의 "국가, 지자체 책임 온종일 돌봄 특별법" 발의를 보며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강민정 의원은 "교육은 학교가 전담해야 하지만 돌봄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말꼬리를 잡고자 하는 의도는 없지만, 그렇다면 학교는 국가와 사회에서 떨어진 또 다른 국가, 또 다른 사회라는 의미인가? 필자는 2015년부터 2년 2개월 14일 동안 서울시교육청에서 어쩌다 공무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실재로 필자가 서울시교육청에서 만나본 교육전문가들 중에서는 태초에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를 위해 마을이 존재하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국회의원 당선 후 아이들을 중심에 두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힌 강민정 의원이 교사가 아닌 시민, 그 중에서도 학교 밖 청소년들을 포함한 교복 입은 시민인 학생들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반반(反半)전문가의 전문성 비판" 마지막 글은 전문성이 만들어 낸 역설이다.


3. 전문성의 시대와 전문성의 역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전문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성을 직업으로 치환해 보면 이해가 쉽다. 별의별 고급스런 직업부터 하찮아 보이는 직업까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직업의 수가 그나마 인류의 숫자만큼 분화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오래전에 공연기획을 하는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Beatles와 Led Zeppelin, Queen과 Nirvana의 계보를 잇는 록 그룹 중, Metalica라는 그룹이 있다. 록 음악에 관심이 없는 분은 지금부터 하는 얘기에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잠시 이해를 접어두고 전문성의 과잉이 얼마나 우리를 전문성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실감해 보는 것도 필자의 의도 중 하나이다. 

록 음악이 전문성으로 분화되기 전 Beatles의 음악은 그냥 Rock’n Roll이었다. 시끄럽게 괴성을 질러대는 “I wanna hold your hand”도, 멋진 첼로 연주가 더해진 “Yesterday”도 Bealtes의 음악은 모두 Rock’n Roll로 분류한다. Beatles 해체 즈음 결성되어 1970년대를 풍미했던 록 그룹 Led Zeppenlin의 음악은 Rock’n Roll 중에서도 Heavy Metal, 또는 Hard Rock으로 분류한다. 얼마 전 Bohemian Rhapsody라는 영화를 통해 화려하게 귀환한 Queen은 다양한 멤버의 취향이 결합된 록 그룹이라 딱히 장르를 특정하긴 어렵지만, 멤버들에게 떼창을 강요하고, 테이프가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오버 더블링을 했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추구했던 음악은 Opera Rock 쯤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의 논리에 반하는 음악을 추구하다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타살설도...)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이끌었던 Nirvana는 Alternative Rock으로, 돌고 돌아 처음에 소개하려고 했던 Metalica는 Rock의 한 분류인 Heavy Metal 중에서도 Thrash Metal로 분류한다.

Metalica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내한하여 공연을 한 바 있다. Metalica 정도 되는 그룹이 공연을 다니면 멤버들만 이동하지 않는다. 그룹에 최적화된 음향 장비와 음향 전문가들도 함께 공연을 따라 다닌다. 마이클 잭슨이 한 번 공연을 다니면 비행기 세 대가 함께 움직인다는 다소 과장 섞인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어쨌든,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를 설치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 중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공연장 바닥에 열심히 야광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Melalica 공연을 유치한 한국 담당자가 그 사람한테 뭐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멤버들이 대기석에서 무대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바닥에 야광 테이프를 전문적으로 붙이는 사람이다.”

 

바닥에 야광 테이프를 붙이기 위해 Metalica를 따라다니는 그 전문가의 전문성을 하찮다고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문성의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별의별 전문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든 예일 뿐이다. 하지만, 전문성이 시대를 관통하며 전문성이 수평적 역할로만 분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문성은 수평적 역할이 아닌 수직적 권력으로 분화했다. 애초에 최초의 전문성이 지배와 피지배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쩌면 수직적 권력관계로의 분화가 전문성의 분화가 의도한 애초의 목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성 이면에 존재하는 첫 번째 역설이다. 전문성의 분화는 의도하든의도하지 않든 전문성과 전문성을 수평적 역할 관계가 아닌수직적 권력 관계로 분화시킨다

전문성의 두 번째 역설은 무엇일까? 사회가 복잡해지며 우리는 한 사람이 어설프게 감당했던 모든 일을 잘게 쪼갠 후 다양한 전문가에게 위임한다. 교육은 교사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 법은 판, 검사와 변호사에게, 행정은 관료에게,.. 단순히 역할과 권한만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역할과 권한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전문가가 져야 하는 책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설픔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문가에게 마치 신에 준하는 역할과 책임을 요구한다. 하지만 교사도, 정치인도, 판사도, 공무원도 나와 다르지 않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모두’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인간인 동시에 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그 역할을, 권한을, 역할과 권한에 따른 책임을 전가해 왔다. 한낱 인간인 전문가가 신에 준하는 책임의 요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 있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전문성 안에 숨는 것이다. 그래서 숙련된 전문가는 절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배가 침몰하고, 그 안에서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가도, 배를 띄워 그 아이들을 구조해야 할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소용이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전문가라면 누구난 한 번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의 책임을 넘어서는 오지랖을 발휘해 보려는 시도를 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전문가 선배로부터 이런 충고를 듣지 않았을까? 

 

“그 사람을 구해주고 나면, 그 사람이 요구하는 보따리도 줘야 하는데, 책임질 수 있겠어?”

 

우리가 전문성에 과도한 책임을 물은 결과 전문성과 전문성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을 메울 전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성의  번째 역설은  시대 모든 책임은 신이 아닌 인간 전문가에게 전가되지만인간 전문가는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성의 첫 번째, 두 번째 역설은 전문성의 세 번째 역설로 이어진다. 특정 분야에 대해 역할과 권한, 그리고 부담스런 책임까지 위임받은 ‘인간’ 전문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이 곧 자신의 밥그릇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비전문가인 시민들은 대체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만약 시민이 상식에 기초해 전문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다. 그 전문성의 분야가 정치든, 경제든, 그리고 교육이든… 

 

교육이 엄정한 선발 과정을 통해 공인한 교육 자격을 다른 체계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들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

 

전문성에 위임된 ‘역할  권한에 따라 전가된 ‘책임’, 그리고 역할과 책임에 따른 ‘밥그릇 크기는 전문성을 구성하는 3요소이다. 전문성은 생산성 확대를 위한 노동 분화의 결과이고, 그 분화된 최초의 전문성이 계급이다 보니 그런 요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전문성의 분화, 그리고 분화된 전문성 안에서 수없이 많은 전문성들이 각개약진을 한 결과 마침내 인류는 생존을 위한 충분한 크기의 파이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를 계속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선해 보이는 의도’는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전문성을 부여하고 인정해 준 시민과 시대의 상식에 반하는 ‘악한 결과’로 이어진다. 

전문성의  번째 역설은 전문가는 전문성의 시대 안에서 그저 전문성의 밥그릇을 지키는 이해당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책 결정 권한을 이해당사자인 전문가에게 쥐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전문성의 3요소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보다 구체적인 예와 함께 다루어 보겠다.

전문성의 3요소, 권한과 책임, 그리고 밥그릇...
전문성의 3요소, 권한과 책임, 그리고 밥그릇...

마지막으로 전문성의  번째 역설에 대해 살펴보자결론부터 말하면 복잡하게 분화된 전문성으로 인해 시대를 관통하는 상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잘게 쪼개진 전문성의 상식만이 존재한다. 민과 관의 상식이 다르고, 마을과 학교의 상식이 다르고, 진보와 보수의 상식이 다르다. 근대 초기 맑스는 자본을 가지지 않은 무산자 계급인 노동자에게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으로 자본가계급과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 소위 노동자의 당파성은 귀족 노조 노동자의 당파성과, 공무원 노조 노동자의 당파성과, 정규직 노조 노동자의 당파성과, 그리고 노조라는 틀로 묶이는 것이 쉽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당파성으로 쪼개져 각각의 입장만을 대변할 뿐이다. 서로가 상식을 주장하되 시대를 아우르는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 그리하여 서로 다른 상식과 상식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갈등하고 투쟁하는 시대가 된 것은 전문성의 과잉이 만든 도착(倒錯)적 결과이다. 

필자는 전문성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농경사회 이후 분화된 전문성은 경제적으로 생산력의 확대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관료제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리해 복잡한 인간사회를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영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 또한 앞에서도 밝혔듯 인류가 계급의 전문성으로 분화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빛나는 문명의 성취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컵에 반쯤 차 있는 물을 보고도 ‘반이나’ 또는 ‘반밖에’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듯, 긍정성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측면, 또는 부정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살피는 것은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긍정성이 과하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고, 과잉된 부정성은 역설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와 맹자가 과유불급과 중용을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전문성에 반(反)하는 반(半) 전문가의 관점으로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살폈다. 전문성에 대해 더 전문적으로 파헤치고 싶은 마음 없지 않으나, 그렇게 되면 필자 또한 지금까지 비판한 전문성의 역설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전문성에 대해 필자보다 먼저, 이 장황하고도 촌스러운 문장의 비논리적 나열이 아닌, 촌철살인의 시로 비판한 이가 있다. 바로 페이스북에 주로 활동하며 빼어난 시와 더 빼어난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주대 시인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김주대 시인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에서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대해 우리나라 최고의 법 전문가 집단인 대법관들이 사상 초유의 전원반박성명을 낸 것과 관련, 이들을 비판하는 격문형태의 장시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발표했다. 김주대 시인에게 허락을 득하고 시의 전문을 싣는다. 만약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법관이 아닌 자신의 전문성에 빗대어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뼈를 때리는 북한 아나운서의 말보다 더 아프게 마음을 베일 것이다. 

 

<반박 성명 발표한 대법관 13인에게 고함> 김주대

너희들 고운 손 깨끗한 피부 다칠까봐
땅 파고 농사짓는 일, 바닷바람에 살점 파먹히며 물고기 잡는 일, 공장 돌리는 일은 우리가 하였다.
영하 20도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 농성하는 일은 우리가 하였다.
촛불 들고 언 손 불며 청와대로 행진하는 일은 우리가 하였다.
 
너희들 판결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될까봐
너희들은 판결에만 전념하라고
비린내 나는 생선은 우리가 팔고
육중한 기계음 들리는 공장 컨베이어벨트는 우리가 지켰다.
너희들 월급 받아 판결 잘해 달라고
나라에 꼬박꼬박 세금 바쳤다.
 
너희들이 빵 한 조각 훔친 아이는 징역을 보내고
수백억 갈취한 파렴치범은 집으로 돌려보낼 때
너희들 지위를 지키며 겸손한 척 더러운 판결을 내릴 때
너희들 좋은 머리 아플까봐
너희들의 판단이 맞겠지 하며
첫 버스를 타고 출근하여 막차를 타고 퇴근하였다.
 
우리는 농사 전문가
우리는 기계 전문가
우리는 노동 전문가
우리는 알바 전문가
우리는 예술 전문가
우리는 장사 전문가
우리는 사무 전문가
우리는 택시 전문가
우리는 버스 전문가
우리는 서비스 전문가
우리가 판단하는 것보다
법 전문가 너희들이 더 잘할 것이므로
우리는 못하니까
우리는 법을 못 배웠으니까
기꺼이 너희들을 인정하며 너희들에게 법의 칼을 쥐어주었다.
너희들 법복 앞에 떨며 서서
때로 꾸중도 듣고
시키는 대로 감옥에도 가고 벌금 내며 살았다.
 
우리는 환경미화 전문가
너희들이 버린 쓰레기가 너희들을 더럽힐까봐
너희들 눈에 띄지 않게 치우고 줍고
너희들이 화장실에서 묻혀온 더러운 발자국을
대법원 복도마다 소리 없이 지워주었다.
우리는 위생 전문가
너희들이 싼 똥이 너희들을 더럽힐까봐
너희들이 싼 똥 냄새가 너희들 법전을 더럽힐까봐
너희들 눈에 띄지 않게 수거하여 먼 바다에 뿌려주었다.
너희들이 죽어도 못 하는 일
우리가 살아서 다 해주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라고
우리는 언 땅에 서서 두 손 호호 불며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야간 근무를 하였으며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고
과로로 죽었고
뿔뿔히 흩어진 가족들 살 길 찾다 죽었다.
절망으로도 죽고
희망으로도 죽었지만
 
사법권은 그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독립되었다고 믿고
법은 너희들에게 맡겼다.
아니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희들과 다른 우리의 일을 해야 하니까
너희들이 결코 못 하는 일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못 하는 일은 너희들이 하라고
너희들에게 맡겼다.
 
너희들이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하여도
우리의 노동
우리의 예술
우리의 사무
우리의 아르바이트
우리의 장사
우리의 눈물로부터
아니 우리가 낸 세금으로부터 우리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너희들은 우리가 언 손 불며 돈 벌어 월급 주며
우리가 고용한 알바생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개 숙였다.
너희들은 우리가 법의 이름으로 고용한 알바생들이다.
그래서 따랐고 인정했고 심지어 복종했다.
너희들은 우리 국민들이 고용한 임기 6년의 장기 알바생들이다.
 
대법원장인 법관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은 대법관이 된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 대통령을 우리가 뽑았다.
 
너희들의 위에 법이 있고 법 위에 우리가 있다.
 
(건방진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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