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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의 모래알①] 왜 모래알인가?

■ 박홍순 / 작가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09.01 21:53
  • 수정 2020.11.1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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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흔하고 사소한 무언가를 떠올린다. 셀 수 없이 많이 널려 있거나 너무 작아서 보잘 것 없는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대중가요에서 감정 표현 수단으로 곧잘 등장하지만 별로 다르지 않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이라든가, “부서져버린 모래알처럼”이라는 식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덧없음을 비유하는 정도다. 

한국 사람들만의 고유한 정서는 아니다. 서구적 사고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서도 모래는 종종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가 대표적이다. 예수의 말을 따르면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사람, 그 말에서 벗어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된다. 반석이 무너지지 않을 믿음과 풍부한 지혜라면, 모래는 금방 무너져버리는 불신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클로드 모네 <생트 아드레스 해변> 1867년

그나마 해변의 풍경과 어우러질 때 조금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국인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생트 아드레스 해변>처럼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해안가 절벽이나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바위는 그 자체로 주목을 받는다. 언덕 위로 보이는 마을이 가슴 설레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푸른 바다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보트가 낭만을 자아낸다.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응시하는 한 쌍의 연인도 무언가 짙은 사연을 담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하지만 이 때도 광활한 모래사장이 눈길을 끌 뿐이고, 한 알이나 한 줌의 모래는 관심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이물질로 느껴지기 십상이다. 모래사장을 걷다가 알갱이 몇 개라도 신발 안으로 들어오면 서걱거리는 느낌이 불편해서 수시로 털어낸다. 그런데 나는 왜 하찮은 취급을 받는 모래알을 간판으로 내걸고 글을 쓰려고 하는가? 차라리 손에 두툼하게 쥐어지고 꽤 단단한 자갈이라면 모를까, 고작 1mm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광물 조각이 무슨 그럴듯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이다. 

정기적인 칼럼 요청을 받고 무얼 써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일단 ‘큰’ 이야기는 목소리가 큰 이른바 ‘스피커’들이 이미 많으니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게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전통적인 언론 매체는 물론이고 유튜브나 SNS도 당장의 정치 이슈로 넘쳐난다. 그렇다고 큰 이야기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반대로 아주 중요하고, 제대로 방향이 잡힌 큰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다만 그만큼이나 작은 이야기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평소에 청와대나 국회, 혹은 재벌기업 본사를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일상은 지극히 사소한 사건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군다나 큰 것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보다는 주로 작은 것을 통해 스며든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래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은 법이다. 

영국 시인 블레이크의 “한 알갱이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본다”라는 구절이 문학적 수사만은 아니다. 사실 모래가 만들어지는 과정만 봐도 간단치 않다. 처음부터 왜소한 돌조각은 아니었다. 해안의 큰 돌에 파도가 쳐서 셀 수 없이 오랜 기간을 부서지고 갈려 작은 모래가 만들어진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가 있다. 모래를 있게 하는 원리가 곧 세계를 만들어낸 원리이기도 하다. 비슷한 의미에서 당장 보기에 정지한 듯 보이는 일상의 짧은 시간 안에 견고한 사회구조를 만든 오랜 역사가 녹아있다.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절실한 삶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나 사회와 만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대충 이런 식으로 ‘모래알’이라는 말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본다. 어쩌면 내 자신에게 제공하는 핑계이자 마음속의 주술일 수도 있겠다. 한가하게 사소한 이야기나 늘어놓느냐는 비난에 방어막을 미리 쳐놓는 것이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사회로의 지평 확장 동기를 불어놓는 압박이니 말이다. 

박홍순: 인문학·사회학 작가로, 《미술관 옆 인문학》, 《헌법의 발견》, 《생각의 미술관》, 《나이든 채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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