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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의 모래알②] 화장실 선진국 유감

■ 박홍순 / 작가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0.09.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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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휴게소 화장실
정읍휴게소 화장실 / 사진 = 박홍순

지방 강연을 위해 고속도로 운전을 하다보면 휴게소 화장실을 들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대한민국 화장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이용객이 오가면서도 몸이 닿을 일이 없을 만큼 통로나 변기 주변이 널찍하다. 직원이 수시로 청소하기에 항상 청결하다. 변기에 금이 가거나 물이 새는 곳을 발견하기 어렵다. 화장지가 없거나 부족해 낭패를 보는 일이 없다. 수도꼭지 주변에는 늘 비누가 있고, 겨울이면 따뜻한 물도 나온다. 솔직히 말해 어떤 경우에는 집 화장실보다도 깨끗하다는 생각조차 든다. 지하철 화장실도 쾌적하다.

<정읍휴게소 화장실> 사진은 한 눈에 보기에도 최고급 호텔을 방불케 한다. ‘5성급 호텔 화장실’이라는 말이 그리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화장실 만들기 열풍이 경쟁적으로 분다. 문화 개념을 도입한다는 취지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본을 따기도 하고, 우주선이나 숲에 들어간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예전에 미술관 기행 중에 경험한 유럽의 현실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일단 공중화장실을 찾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다.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로 붐비는 파리만 하더라도 그렇다. 지하철에서는 아예 본 적이 없고, 꽤 유명한 관광지조차도 수월하지 않다. 시내에서도 한참을 헤매야 만난다. 새로 설치하긴 했지만 한국이라면 행사장에서나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는 간이시설 수준이다.

한국인이라면 <파리의 공중화장실>을 보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선진국이고 문화강국이라고 자랑하는 나라가 고작 이 상태냐고 말이다. 연결 파이프가 그대로 드러나고 물을 내리는 버튼도 수동이다. 우리로 치면 20년 전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파리에서 사정이 꽤 괜찮은 편이다. 소변기는 깨끗하고, 벽이나 바닥도 흰색 타일로 깔끔하다.

파리의 공중화장실
파리의 공중화장실 / 사진 = 박홍순

우리는 대부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유럽과 직접 비교하는 순간 ‘화장실 선진국’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뿌듯해 한다. 그런데 나는 첨단 시설에 화려함까지 갖춘 광경을 볼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떠나지 않는다. 사돈이 땅을 산 건도 아닌데 웬 고약한 심정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나의 씁쓸함은 자꾸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OECD 1위인 한국의 현실이 동시에 겹쳐지기 때문에 생겨난다.

유럽의 화장실이 볼품없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사회적·문화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사회복지가 중요한 한 요인이다. 화장실을 화려하게 꾸미는 대신 사회적 취약 계층을 위한 복지로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한정된 자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자원은 무한정하지 않기에 어떻게 배분하느냐가 핵심 과제다. 국가 재정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에 비해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이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친다. 경제 규모는 세계 11~12위로 OECD 상위권에 속하지만 사회복지비 지출 비율은 여전히 최하위 수준이다. 화장실을 호텔급으로 개조하는 동안 취약 계층의 삶은 최소한의 생존조차 위협 당하는 처지에 있다. 화장실에 문화 개념을 입히는 동안 상당수 노인에게 문화 향유는 사치가 되어버리고 동네 공원을 전전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이를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랑스 공중화장실처럼 소변기 물을 내리는 버튼이 수동이면 어떻고, 벽이 평범한 흰색 타일이면 어떤가. 화장실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큰 불편이 생기지도 않는다. 청결하고 제 기능을 다 하면 될 일이다. 세계인의 눈을 놀라게 할 만큼 호화로운 컨셉의 문화 공간으로 만들 재정을 복지비용으로 사용하는 데서 선진국을 향한 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박홍순 : 인문학·사회학 작가로, 《미술관 옆 인문학》, 《헌법의 발견》, 《생각의 미술관》, 《나이든 채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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