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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목회자의 죽음과 ‘자유’의 의미

고 신소걸 목사의 파란만장한 삶, 신앙의 의미 되짚게 해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0.09.09 16:30
  • 수정 2020.09.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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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부터 사랑제일교회 전광훈의 반정부 집회에 이르기까지 길거리 투쟁에 앞장 서 온 신소걸 목사(순복음우리교회)가 6일 별세했다. 향년 79세이며 사인은 코로나19 감염과 그로 인한 합병증에 따른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마음껏 끼를 발산하던 화양연화의 시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성직자가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이상할 것은 없지만 신 목사의 경우는 종교적 명분보다 세속의 정치적 명분을 이유로 수년간 가두 투쟁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한 때 유망한 코미디언으로 일하다 우여곡절 끝에 종교에 귀의했다 한 순간에 정치 투사로 변신해 쓸쓸한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한 번 쯤 그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신소설(申笑杰) 목사는 1941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신준현(申駿絃)이다. 유아기를 홍성 · 천안에서 보내다 1946년 귀향해 예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1960년 천안고를 졸업했다. 이어 입대했고,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뒤 1968년 귀국했다. 2017년 2월 10일자 조선일보 온라인판 팝조선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일제 말, 그 어려울 때 올망졸망한 6남매중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님은 시골 작은 면의 면장을 역임하시다가 6·25때 종북좌파 빨갱이들한테 체포구금되어 모진고문 다 당하시고 결국 처참하게 학살 당하셔서 그때부터 난 진짜 보릿고개, 초근목피 생활을 다 겪은 사람.”

이런 회고와 그의 베트남 참전 이력을 보면 그가 후일 집요하게 보수집회에 참여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타고난 끼를 지닌 사람이었다. 일찍이 1963년에 연극배우로 데뷔하였고 군복을 벗자마자 1968년 TBC 동양방송 특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것을 보면 전쟁의 상흔도 그의 끼를 지우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1969년 서울중앙방송으로, 1972년에는 MBC 문화방송으로 옮기면서 ‘웃으면 복이 와요’, ‘부부 만만세’ 등 당대를 대표한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그의 진술에서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벽촌에 가까운 충남 예산군 신암면 오산리가 내 고향이다. 6남매 중 막내로 부모님과 형제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선지 친구들에 비해 항상 ‘입담’이 좋은 편이었고 일곱 살 때부터 학교 오락회에 내가 빠지면 무엇인가 싱거운 행사가 되곤 했다.

중학교 때 나의 최고 우상은 만담으로 유명한 장소팔, 고춘자 씨였다. 지방 쇼무대에서 두 사람이 쏟아놓는 만담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쇼를 한번 더 볼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곤 했다.

부모님은 나를 공주사범학교에 보내 교사를 만들고 싶어 하셨으나 나는 몸에서 뻗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 주경야독했다.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장소팔 쇼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예명을 지은 것도 이 무렵이다. 코미디언 장소팔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그 이름 가운데 ‘웃을 소’자를 빌려 신소걸이라는 예명을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쇼단의 사회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대타로 무대에 올랐다.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사회자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어려서 가난했고 서울에서도 고학했던 나에게는 ‘돈’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였다. 나도 열심히 벌어 남들만큼 살아보겠다는 의욕이 가득했다.

나이가 차서 군에 입대한 나는 쇼단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군예대를 만들어 월남전에 참전했다. 소속된 십자성 부대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면서 군 장병은 물론 베트콩도 내 이름을 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장병들에게 웃음을 가득 선사했다.”

아마도 전역 직후 그의 인생에서 전성기가 찾아온 듯하다. 신소걸은 71년 일본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초청으로 도일하여 일본 정통 코미디인 만자이(漫才)를 익히는 등 재능을 쌓았다. 돌아와서는 그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TBC TV의 ‘좋았군 좋았어’, ‘둥글벙글’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동시에 창작 욕구도 불태워 코미디 각본 작가(스크립터)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과해진 의욕이 그를 사업으로 이끌게 했고 이어 도박으로 끌고 들어갔다. 인기를 이용해 술집을 차렸지만 그것도 부도로 막을 내렸다.

코미디언 다음으로 그가 열성을 보인 곳은 참전 모임이었다. 그에게 월남전 참전은 영원한 반공투사임을 입증하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렇게 해서 1989년 8월 9일 그는 옛 월남참전용사 모임인 따이한중앙회 임시대의원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무렵 다른 악운이 끼었다. 6월 14일 그가 피보호자 간음혐의로 입건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시내 모 술집에서 따이한중앙회 경리사원 에게 술을 먹인 뒤 경기도 부천시 모 여관으로 유인,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수 정치에 뛰어들어 태극기부대에 앞장서다

이도 저도 풀리지 않아 인생이 벽에 부딪힌 시점, 신소걸은 아내의 권유로 개신교에 입문했다. 1990년 조용기 목사를 만나 한세대학교의 전신인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4학년이던 1993년 안산에 상록수순복음교회를 개척하였고 석사를 수료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02년부터 9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선교사로 생활하며 일본에 여러 교회를 세웠다. 이어 2011년에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에 순복음우리교회를 창립하여 이후 이 교회 목사로 활동해 왔다.

신소걸에게 목회자의 길은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길이었다. 그의 진술을 보면 당시의 환희를 알 수 있다.

“새벽 4시.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새벽기도 인도를 위해 교회로 향한다. 내가 시무하는 안산 본오동 상록수교회까지는 불과 10분여. 차안에서 들리는 은은하고 잔잔한 찬송가 소리와 함께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온다.”

“하나님. 제가 목회자가 된 것 맞죠. 600여 평이나 되는 교회도 크게 짓고 목회도 잘 하고 있지요.”

그의 말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은혜 그리고 사랑이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정치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의 인생 여정이 말해주듯 당연히 보수 정객의 길을 걸었다. 2006년에는 기독교 우파정당인 기독사랑실천당에서 활동했고, 3년 뒤 순복음우리교회를 세운 다음에는 교회 대표 자격으로 정치 일선에 점점 더 깊이 개입해 들어갔다.

그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각인된 때는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무렵이었다. 집회마다 해병대 마크가 새겨진 붉은 운동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는 이제 이른바 태극기부대 집회의 단골 연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를 넘겨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확정되자 2017년 3월 18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날 신소걸 목사는 “이번 대선은 다른 것 없다. 우파 보수와 좌파 종북, 자유 대한민국과 공산주의 이념의 싸움”이라며 “지금 정신 차리지 못하면 월남 꼴 나고 캄보디아 같이 된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독자적으로 무궁화기도운동총연합회(무기총)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2018년 8월에는 기독교우파 단체인 ‘성경대로 믿고 행하며 믿음의 선조들의 순교 및 순국신앙을 계승하는 포럼’(성순포)을 출범시키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자칭 정통 태극기부대 지도자임을 자부하며 본격적으로 우파 정치인의 행보를 걷게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나타났으니 당시까지 태극기부대에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막말을 내뱉고 다니던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가 그였다. 그 행보를 더는 볼 수 없었던지, 2019년 1월 7일 신소걸은 무기총 대표 직함을 걸고 전광훈에게 ‘돈통이나 돌리는 거짓 선지자’라며 장문의 글로 공격을 퍼부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전광훈 목사는 앞으로 태극기 보수집회에 나서지 말라. (당신은) 입만 열면 ‘선지자’ 타령만 해대는데 신성한 선지자의 반열을 더럽히지 말라. 우리 태극기 집회의 애국자들은 당신이 물질과 유익을 위해서라면 적과 동침이라도 하는 거짓 선지자라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들 한다.

당신은 지난 대선 때 느닷없이 김대중의 동교동계 비서출신으로 ‘낮은 연방제’를 선호하던 장성민을 내세워 한국 목회자들을 모으기에 혈안이 됐다. 결국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태극기 집회를 매번 분열 시키고야 말았다. 출처불명의 물질공세로 태극기세력 안에 들어와서도 계속 분열과 분탕질을 해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으로 당신은 ‘보수팔이 태극기집회’를 절대로 인도하지 말 것이며, 광화문에서 돈통(?) 돌리는 집회도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태극기 보수집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목회자 내부의 갈등은 당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그러다 2020년 2월 전광훈이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자 신소걸 목사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내내 전광훈 목사를 옹호하던 그는 지난 8월 15일에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여 역시 전광훈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이틀 뒤인 17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서울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9월 1일 심정지 판단이 내려져 관계자들이 급히 후원계좌를 개설했다. 당시 부인은 폐질환으로 보훈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고 자녀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그를 돌볼 형편이 되지 못했다. 9월 6일 그는 합병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와 관련된 절차는 시민단체에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렇게 하여 그는 화장으로 이승을 마무리했다.

고 신소걸 목사의 고단한 영혼이 부디 그를 가엽게 여기는 이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루터, “인간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어”

‘루터의 밧모섬’ = 제임스 레스턴 저, 이른비 간, 332쪽
‘루터의 밧모섬’ = 제임스 레스턴 저, 이른비 간, 332쪽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려 개신교의 선구자가 된 마르틴 루터가 생전 애송하여 그의 동상에 많이 새겨진 성서의 시편 119편 46절 문구는 아래와 같다.

“왕들 앞에서 거침없이 주의 교훈을 말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루터에게 성서는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되며, 강요할 경우 이는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웃음거리로 만들게 될 뿐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루터는 “저는 누군가에게 강제로 신앙을 갖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됩니다”며 그 일은 “하나님의 소관이며 그 결실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남겨져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루터에게 신앙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스스로 믿음을 갖는 일이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은 고린토전서 5장 13절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이러한 신념을 역설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쫓으십시오.”

이와 같은 성찰 끝에 루터는 성서의 핵심적 가르침을 요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압니다.”

‘루터의 밧모섬’의 저자는 “이 급진적인 해석으로 ‘sola fide'(오직 믿음만으로)라는 탁월한 개념이 확립되었다”고 말한다. 그 생각은 루터가 일찍이 아우구스티노 수도사로서 수련 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일시할 때부터 싹텄을 수도 있다고 필자는 추정한다.

자신이 주관적으로 믿는 선행을 행함으로써 믿음 즉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하면 저절로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 믿음이 선행의 뿌리라는 것, 루터가 보기에 그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이고 촉매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신념은 개신교 태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나아가 오늘날 모든 개신교인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공통된 근거가 되었다.

(이상 인용은 ‘루터의 밧모섬’, 제임스 레스턴 저, 이른비 간, 180, 221, 256쪽)

피에르 신부, “자유는 사랑에 봉사할 때만 의미를 갖는 것”

구 기독교인 가톨릭의 성직자 가운데 대표적인 휴머니스트로 꼽히는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Abbé Pierre) 신부(1912~2007)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활동할 정도로 현실정치에 참여한 인물이다. 당연히 그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필연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영향이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아베 피에르 신부 / 사진 = 위키백과
아베 피에르 신부 / 사진 = 위키백과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일반적인 정치인들과 달리 그리스도 교인에게 이러한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피에르 신부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보다 영적인 것임을 잊은 채 그러한 영역만을 강조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모든 사회적 불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해방이란 사랑 안에서 불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는 것이 피에르 신부의 생각이다.

피에르 신부 역시 루터가 경고한 것처럼 인간의 주관적인 선악 구분과 현실 참여를 경고한다. 하느님에게 의존하기를 원치 않고 하느님의 도움 없이 오로지 인간만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피에르 신부는 나아가 죄란 “선과 악을 혼자서 구분할 수 있으며 혼자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아무것도 신세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임한다는 착각 아래 자신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행하는 데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려는 것,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만심의 발로다. 결국 자만심이야말로 인간을 어리석음으로 몰아가는 진짜 죄라고 그는 강조해 말한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피에르 신부는 “자유는 사랑에 봉사할 때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킬 때 자유를 잃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구원은 이와 같은 자유의 특성과 목표를 밝혀준 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항상 공격받고, 억압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움 속에 살고 있지만 사랑으로 그 두려움을 대체함으로써 믿음 속에서 자유를 되찾게 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런 이유에서 인간의 진정한 해방은 내면적인 것”이라고 피에르 신부는 말한다.

이와 같이 자유의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외부의 공격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역으로 인간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외부를 향해 퍼붓는 공격 또한 더 이상 자유의 실천이 아니다.

“자유는 외부의 적이 퍼붓는 공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의 진정한 목표인 사랑을 부인하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이상 인용은 ‘단순한 기쁨’, 피에르 신부 저, 마음산책 간, 172-177쪽)

9월 9일 예하운선교회(대표 김디모데 목사)와 바른미디어(대표 조믿음 목사), 나음과이음(대표 오재호 목사) 등은 서울사랑제일교회 인근 소상공인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인 ‘오병이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오병이어’는 예수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 성서의 기록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운동의 주최자들은 이번 프로젝트가 ‘교계의 반성운동’ 차원이라고 밝혔다. “전광훈 목사가 오래 전부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해왔음에도, 개신교계가 나서서 ‘이단’이라고 신속하게 얘기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반성 아래 “이번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가장 피해가 큰 소상공인 분들을 돕고자 한 것”이 운동의 배경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지난 7일 시작한 모금은 다음달 30일까지 진행한다. 자세한 내역은 예하운 선교회 블로그(https://blog.naver.com/ysmcn7)를 참고하면 된다.

글. 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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