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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의 모래알③] 야~ 이 책 재미있겠다!

박홍순 / 작가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10.0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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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책 무진장 재미있겠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낮에 한적한 카페에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옆자리에 앉으면서 한 말이다. 내 자신이 글쟁이여서인지 귀가 솔깃해진다. 북 카페는 아니었지만 한쪽 벽에 책장이 있고 백여 권의 책이 있는 곳이었다. 그 무리 중 한 명이 책꽂이에 있던 책 하나를 꺼내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책장을 뒤적인다. 

‘껍데기’에 인생을 내맡기는 시대

“에이, 이게 뭐야!”

몇 초 정도나 됐을까, 여기저기를 펼치더니 이내 탁자 구석으로 휙 던져놓는다. 다들 실망스러운 눈치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듯이 툴툴거린다. 이어서 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직장 얘기며 사소한 일상 대화를 나눈다. 무슨 책이기에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궁금해진다. 한동안 왁자지껄 수다를 떨던 이들이 나가고 나서 슬그머니 옆 탁자 위의 책을 집으니 《신동엽 전집》이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그들이 보인 양 극단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너무나 분명하기에 입가에 쓴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만약 일상적인 농담 따먹기를 하던 와중에 신동엽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면 개그맨을 떠올리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책에서, 그것도 ‘전집’이라는 묵직한 글자 앞에 놓인 신동엽이라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누가 우리의 마음에서 시인을 빼앗아갔는가?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다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차피 방송 스타와 비교되면서 생긴 에피소드이니 대중매체와 관련해서만 고민 한 자락 던져놓자. 이제 TV는 거실 한 구석에만 있는 게 아니다. 스마트폰과 함께 지하철이나 카페, 심지어 길에서도 우리의 의식 안으로 파고든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프로그램 내용이 어떠하냐와 상관없이 각종 대중매체가 우리가 혼자 있을 시간을 앗아가 버린다는 점이다. 도무지 외롭거나 고독할 틈을 주지 않는다.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 영상의 자극성은 의존을 넘어 중독 상태에 빠트린다. 오죽했으면 최대의 벌이 스마트폰 없이 지내게 하는 일이라는, 우습지 않은 우스갯소리가 생겨났겠는가. 

하루 일을 마친 밤 시간,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도 집요하게 발목을 잡는다. 더이상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다. 경쟁과 복잡한 인간관계로 뒤얽힌 낮의 세계를 대신하는 도구가 여전히 우리를 밖에 묶어놓는다. 그래서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텔레비전은 문명이 만들어낸 공포스러운 물건”으로, 전화는 “어느 때든 부르면 모습을 보여야 하는 하인처럼 사람을 불러대는 방해물이자 훼방꾼”으로 규정한다. 

고독하지 않으니 사색이나 시적 감흥이 끼어들 자리도 없다. 대중매체가 조장하는 경쟁과 효율성,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대만이 머리 안에 가득하다. 단편적 정보 조각의 집합이 곧 지식이나 지혜라고 착각하며 검색하는 손놀림이 갈수록 빨라진다. 오직 더 많은 자극을 향한 질주만이 있을 뿐이다. 가끔 의미 없는 말장난과 웃음으로 경쟁에 지친 마음을 치료하는 듯하지만, 내일의 더 치열한 다툼을 위한 충전기에 불과하다. 

 

대중매체에서 벗어나 고독과 벗해 보기를

신동엽은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해진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4.19혁명의 이름을 팔아 처세하려는 껍데기 정치인들은 가라고 한다. 동학혁명에서 직접 피 흘린 민중의 함성에는 눈을 감고 앙상한 이론으로만 긁적거리는 책상물림도 껍데기일 뿐이다. 또한 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군사적 긴장도 흉측한 껍데기라고 한다.  

신동엽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떤 껍데기를 추가할까? 일단 1960년대보다 훨씬 많은 껍데기가 득실거리는 현실에 아연실색했으리라. 썩 꺼져버리라고 호통을 칠 껍데기 가운데 대중매체의 온갖 연예·오락 프로그램도 분명 한 자리 차지하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들의 정신작용 자체에 매일 마취제를 집어넣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타인과 싸워서 앞서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주입하는 경쟁 지상주의도 삶을 옥죄고 숨통을 막는 단단한 껍데기라고 질타했으리라. 신동엽은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에서 “오늘 인류의 외피는 너무나 극성을 부리고 있다. 키 겨룸, 속도 겨룸, 양 겨룸에 거의 모든 행복을 소모시키고 있다. 헛것을 본 것이다.”라고 한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온 지 50년도 더 흘렀으니 그가 느끼던 겨룸, 즉 경쟁의 속도감은 현대인의 감각으로 볼 때 걸음마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친 듯이 정신과 육체를 뒤흔들어대는 그 헛것을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벗으로 느낀다. 오히려 언제든지 뒤처지거나 탈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대중매체의 유혹에 기꺼이 온몸을 맡긴다. 진정 자기 인생의 주인이고자 한다면 고독해져야 한다. 내 안에서 성찰과 시인의 감성을 만나고자 한다면 외로워져야 한다. 최소한 밤 시간만이라도 자기 안을 고독으로 채우자. 

 

박홍순 : 인문학·사회학 작가로, 《미술관 옆 인문학》, 《헌법의 발견》, 《생각의 미술관》, 《나이든 채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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