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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재용 시대'의 세 원천

故 이건희 회장, 창업주 업적 계승해 '초일류 기업' 도약 
홍 전 관장, '은둔의 지지'로 이재용 체제 확립에 마침표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0.10.25 14:02
  • 수정 2020.10.2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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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6년 간의 투병 끝에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주요 외신이 이 소식을 속보로 타전하는 등, 1987년 그룹 2대 회장에 오른 뒤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고인에게 각계에서 경의를 표하는 중이다.

故 이건희 회장의 생애에 관해 많은 조명이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이 글에서는 특별히 삼남에게 그룹을 물려 준 故 이병철 창업주가 고인에게 미친 영향과, 그간 이 회장의 병상을 지켜 온 부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오늘 이재용 체제 하의 삼성그룹을 이해하는 데 부친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회장. / 사진 = 삼성그룹 제공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회장. / 사진 = 삼성그룹 제공

사업도 아들도 '모질게' 키운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은 훌륭한 기업가가 가져야 할 최고 덕목의 하나로 인재 육성을 들었다. 그의 인재관은 다른 누구보다 그가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룹을 물려준 이건희 전 회장의 성장사에서 잘 나타난다.

호암은 1910년에 태어나 약관 26세에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리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중일전쟁으로 사업이 거덜 나는 시련도 겪었지만 이를 계기로 신수종사업 개척에 나서 1938년 삼성상회를 설립하니 오늘 삼성그룹의 모태가 이것이다.

사업이 잘 된 데는 호암의 모진 성격이 한 몫 했다. 호암이 사업에서 버는 돈을 모조리 재투자하는 바람에 여섯 가족들은 한동안 공장 귀퉁이 단칸방의 새우잠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어머니까지 일을 거들어야 해서 42년생인 삼남 건희는 고향인 의령으로 보내졌고, 때문에 건희는 한동안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지냈다.

일에 대한 호암의 집착은 엄청나서 한 인사는 “차갑다, 매섭다, 냉혹하다, 사정없다, 이런 단어를 모두 나열하면 그의 윤곽이 잡힌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과묵한 데다 자기 의사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해서 주위 사람들은 눈빛과 분위기만으로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희 전회장은 “선대회장이 일정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만나러 갈 때 전화 걸 필요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여러 군데 사업을 펼치면서 자주 이사하는 통에 어린 건희는 국민학교를 다섯 번이나 전학했다.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 5학년이 된 아들을 일본 도쿄로 유학 보냈다. 1955년 겨울, 외로운 유학을 마치게 해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호암은 이렇게 말했다.

“호수마냥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마냥 흔들리지 않는 준엄한 사람이 되라.”

일본으로부터 귀국해 중학교에 진학한 건희는 당시 팽배한 반일 분위기 덕에 다시 외톨이가 됐다. 말벗을 삼으려 개를 키웠는데 워낙 친구가 없다 보니 개와 대화를 나눌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건희를 두고 후일 소설가 박경리는 “그분의 옆얼굴에서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외롭고 깊은 침묵 속에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해가는 과학자나 예술가로서의 단면을 보았다”고 술회했다. 사업에 대한 호암의 집념과 사물을 보는 냉철함이 아들에게 적용된 결과다.

자신은 묵묵히 일에만 집중하며 아들에게는 고립된 생활을 종용하는 호암 덕에 소년 건희는 또래들에 비해 생각의 깊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고교 동창이던 홍사덕 전 의원이 “건희는 불과 며칠 사이에 나를 압도했는데, 이는 그의 독특한 ‘세상 보기 안목’ 때문”이라 말하기도 했다.

호암의 인재 육성 방식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이른바 ‘메기론’이다. 이에 관해 이건희 전 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선친이 20대에 농사를 지었는데 논에 미꾸라지를 키웠다. 그래서 한쪽에는 미꾸라지만 키우고 다른 쪽에는 메기를 한 마리 넣어서 키웠는데, 가을에 보니 메기랑 같이 키운 쪽 미꾸라지들이 살이 더 쪄 통통하더라는 것이다.”

아들 건희가 1961년에 연세대에 입학하자 호암은 다시 그를 일본에 보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아들과 장래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때 호암은 아들에게 매스컴을 공부하라 했다. 

호암은 5년 뒤 돌아온 아들에게 신문기사를 읽고 삼성과 관계된 부분에 밑줄을 긋는 일부터 시켰다. 그리고 2년 뒤 호암은 아들을 중앙일보사의 전신인 중앙매스컴 이사로 임명했다.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올라 취임사를 하는 이건희 회장. / 사진 = 삼성 제공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올라 취임사를 하는 이건희 회장. / 사진 = 삼성 제공

자신의 첫 사업으로 '반도체' 택한 이건희

1968년 6월 12일, 호암은 소비재 산업 중심인 그룹의 무게축을 바꾸려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삼성의 미래가 여기 있다고 본 것이다. 뒤이어 19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됐고, 그런 가운데 아들 이건희는 특히 반도체에 회사의 미래가 있음을 간파했다.

호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른 두 살인 이건희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한국반도체 지분을 인수했고 1978년 이를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변경했다. 하지만 경영은 쉽지 않아 시행착오가 계속됐다. 이때 호암은 아들을 도우면서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건희 전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선친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선친은 내 속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장에서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는 방식을 묵묵히 지켜나가셨다.”

1979년 2월 27일 호암은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음 날 부회장으로 첫 출근한 아들에게 호암은 붓을 들어 ‘傾聽’(경청)이라 써 내밀었다. 후계자에게 준 최초의 교훈이었다. 그리고는 회사의 의사결정에 일체 참여하지 말라 명했다. 

호암은 자전에서 “인간이 무한탐구, 무한정진을 추구하는 데는 기업가도 예술가도 다를 바가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아버지인 자신을 철저히 지켜보고 연구하라고 아들에게 당부한 셈이다.

1987년 11월 19일 호암 이병철은 자택에서 영면했다. 

방에는 ‘空手來空手去’라 적힌 액자가 붙어 있었는데, 이는 ‘인생이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죽어 본래 자리로 가는 것’이라던 호암의 지론과 맥을 같이 한다. 

호암이 숨을 거둔 지 5분 뒤, 임종을 전해들은 삼성 사장단은 즉각 이건희 부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했다. 잠시의 경영 공백도 용납할 수 없었던 호암이 아들을 위해 배려한 마지막 조치였다.

이건희 전 회장이 호암으로부터 받은 칭찬은 30대 무렵 들은 “변하지는 말고 딱 요대로만 해라”는 한 번의 말이 전부다. 그렇지만 호암은 기업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 아들의 사표(師表)가 됐다.

1988년 3월 22일 치러진 삼성 50주년 기념식에서 이건희 전 회장은 ‘제2창업을 통해 90년대에는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삼성은 93년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눈부신 성공을 거듭한 끝에 그 제안에 어울리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2년 7월 29일 이건희 회장 가족이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을 참관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2012년 7월 29일 이건희 회장 가족이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을 참관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창업주가 각별히 아낀 며느리, 홍라희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은 삼성그룹 경영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남편 이건희 회장의 곁을 지키고, 아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자녀들과 함께 삼성그룹 경영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홍 전 관장의 부친은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씨다. 5‧16 직후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극적으로 생환해 1964년 출소했다. 이후 몇 달 뒤 그는 이병철 회장의 제안으로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 사장에 취임한다.

그가 삼성그룹의 미디어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이 회장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그것이 양가 혼사로까지 이어졌다.

1965년 당시 홍라희씨는 서울미대 3학년으로 국전 공예부문에 입선했다. 홍진기씨는 딸에게 이 회장을 모시고 국전을 안내하도록 했고, 영문도 모른 채 안내를 맡은 홍라희는 한눈에 이병철 회장의 마음에 들어 삼성가의 며느리로 점찍혔다.

그 배경에 미술에 대한 이 회장의 오랜 천착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호암자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선친이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평상시 당신이 아끼시던 필묵이 담긴 문갑이 여러 개 있었다. 찾아오는 문객이라도 있으면 그 문구로 시문답을 했다. 선친은 그것을 병풍으로 꾸미거나 문갑에 붙이거나 하였다. 그러한 선친의 뒷모습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호암자전, 나남, 283쪽) 

더군다나 누구보다 부친을 따랐던 막내 명희(현재 신세계그룹 회장)씨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에 진학한 터였다.

2년 뒤인 1967년 4월 이 회장의 삼남 이건희씨와 홍 사장의 장녀 홍라희씨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새댁 홍라희는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간 시어머니 박두을 여사가 살던 서울 장충동 본가에 머물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반 가량 지낸다. 그 때 부부는 첫 아들 재용씨를 얻었다. 

이후 1966년 이른바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져 시아버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어 '청와대 투서 사건'으로 이맹희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거쳐, 1987년 남편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홍라희씨는 1975년 중앙일보 출판문화부장을 거친 뒤 1980년 퇴직했고, 다시 1985년 중앙일보 상무직에 올랐다. 그런 이력들은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이어서 세간의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1993년 이건희 회장이 경영 전면에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해 6월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자"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대대적인 혁신에 나섰다. 그룹의 제2창업이라고 할 이 때를 계기로 삼성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같은 시기인 1993년 6월 홍라희씨는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를 맡았는데 자신의 전문 분야여서인지 이후 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삼성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그룹 주요 행사마다 회장 부부가 동반하면서 언론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이후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된 삼성미술관 리움의 관장직에 오르면서 홍 전 관장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고 실제 영향력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자신의 분야를 다져나가던 중 돌발 사건이 터진다. 지병인 폐 질환 때문에 건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온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

삼성그룹이 매출 300조원, 자산 500조원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에 총수 유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지난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베트남 출장을 마친 뒤 서울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지난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베트남 출장을 마친 뒤 서울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조용한 관전자 되어 '이재용 후계' 뒷받침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계자 승계 구도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희 회장은 이미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을 지목했고, 이에 따라 대체적인 상속 절차는 밟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상속시 거액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대책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간의 일이므로 홍라희 전 관장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했다.

게다가 이건희 회장에게 더 큰 문제가 생겨 실제 상속이 집행될 경우 홍 관장의 지분이 얼마나 될지, 그 결과 삼성그룹의 지분 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런 세간의 이목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자 홍 관장은 일체의 공식 행보를 자제했다. 해를 넘겨 2015년 5월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잠실구장을 찾아 야구를 관전하거나 그해 가을 다시 자녀들과 함께 야구장을 찾은 모습이 사진에 찍힌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후에도 홍 전 관장을 거론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터졌다. 2016년 7월에는 이건희 회장 성매매 동영상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10월에는 이른바 '최순실 태블릿PC' 내용이 공개되면서 삼성의 국정농단 연루 의혹이 광화문 집회에서 연일 성토되었다. 

해를 넘겨 지난 2017년 2월 17일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자 삼성은 침묵과 당혹에 빠졌다.

홍 전 관장을 두고도 무성한 소문이 일었다. 2월 6일자 경향신문은 최순실 씨가 한 말이라면서 "홍라희씨가 이 부회장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 진위 여부에 세간의 이목에 집중된 가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3월 6일 삼성미술관 리움측이 "홍라희 관장이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틀 뒤 홍 전 관장의 막내 여동생인 홍라영 부관장도 사퇴했다. 이어 18일에는 홍 전 관장의 동생이자 이재용 부회장의 외삼촌인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마저 사퇴했다.

이후에도 홍 전 관장의 말없는 행보는 계속됐다.

그의 딸 부진씨는 이건희 회장 발병 직후인 2014년 10월 이혼조정 신청을 냈는데 그 재판이 두어 해를 끌다 2017년 7월 20일 판결이 났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던 홍 전 관장은 딸의 판결이 있던 날 부산 해운대구 해운정사를 찾아 가족을 위한 의식인 수륙재(水陸齋)를 올렸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대웅전에는 이건희 배상, 이재용 배상이라고 적힌 꽃이 세워져 있었다"고 보도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일련의 사퇴로 인해 삼성가 외척의 그룹 후계 구도 개입 의혹은 꼬리를 내렸다.

2018년 2월 5일 이재용 부회장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될 즈음 적어도 그가 그룹 총수로 일하는데 외가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그날에 이르기까지 홍 전 관장의 조용하고도 단호한 관전자의 자세가 뒷받침된 결과였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별세한 2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취재진이 대기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별세한 2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취재진이 대기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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