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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이 만난 사람 ②] (주)코트라인 김기창 대표

2화. 첫 사업은 어렵게, 남이 안 해본 일에, 과감하게 도전하자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11.02 05:00
  • 수정 2020.11.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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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클밴드로 말총머리를 한 채 등산을 즐기는 여성. / 사진=픽사베이.
서클밴드로 말총머리를 한 채 등산을 즐기는 여성. / 사진=픽사베이.

 

2화. 첫 사업은 어렵게, 남이 안 해본 일에, 과감하게 도전하자

이제 김 대표의 소신과 철학에 대해 들어볼 시간이다.

사실 ‘시그널이 만난 사람’이라는 이 인터뷰의 취지는 유명하고 거창한 이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지닌 자신만의 인생 이야기, 그리고 진솔한 삶의 모습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담백하고 솔직한 사업가

- 사업하시는 분이 욕심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김) 저는 사업을 하면서 ‘월급쟁이’ 같은 마음으로 했습니다. 어떤 의미냐 하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금씩 꾸준히, 마치 월급쟁이가 회사 출근하듯 그런 자세로 한다는 뜻이지요.

저는 콜라나 에너지 드링크처럼 근사한 음료가 아니라 ‘맑은 물’ 한잔이 되고 싶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존재로 오래도록 가는 것이지요.

보통 사업을 벌일 때 사람들은 소위 ‘대박’을 치겠다는 마음으로 덤벼든다. 그런데 김 대표는 좀 색다른 태도로 임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 보시다시피 제 회사는 작은 소기업입니다. 2019년 매출이 16억 정도 됩니다. 물론 우리는 제조업이니까 유통업과는 매출규모가 다르지요. 이 정도 규모가 유통업으로 가면 100억대는 넘길 것입니다. 여하튼, 작은 규모의 회사이지만 꾸준히 운영해 오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하고, 소위 갑질이라고 하는 모진 짓 안 하고 잘 유지해 왔습니다.

이제까지 접대를 하거나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업 현실에서 절대 쉽지 않은 이력이다.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까 약 30년간 국내에서 사업을 했는데 접대를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제가 90년대 초반에 국내 제조업체들의 제품을 선발해서 일본으로 보내던 시절의 일입니다. 그때는 일본 수출이 호황이라 저와 거래가 되기만 하면 수출업체 처지에서는 제법 돈을 벌 기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거래처의 사장님이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 주신 것을 엉겁결에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열어보니 요즘 가치로 200만 원도 넘는 큰 금액이더군요. 돌려 드렸지요.

사실 당시 저는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경비 등의 소정의 비용만 받고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수입만으로는 그리 큰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경우 뭔가 부풀리거나 뒷거래를 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해를 사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한동안 잘 지내던 제조업자 한 분이 언제부터인가 저를 마땅치 않게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향응도 안 받고, 그분 제품을 일본에 들여가지도 않는 것이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그분과 거래가 되지 않은 이유는 제 판단으로 단지 그분 제품이 적당하지 않아서일 뿐인데 말이지요.

- 그렇게 고지식해 보일 정도의 소신을 가지게 되신 이유가 있을까요?

김) 예. 저는 처음 회사 일을 시작한 일본에서의 첫 3년 동안 아주 중요한 것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첫째, 솔직하게 해야 한다. 둘째, 정도를 걸어야 한다. 셋째, 정확하게 해야 한다.

크게 이 세 가지입니다. 그때 배운 이 자세가 지금까지 제 원칙처럼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양심적으로, 상생하는 자세로 임하면 반드시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세상이다. 특히 돈거래가 있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로열티를 받았던 일에 관해서이다.

- 로열티를 받으셨다면 그 근거가 되는 매출기준이 있었을 것인데, 그 근거를 매번 혹은 주기적으로 확인하셨나요?

김) 아니요. 그냥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 일본 파트너가 ‘이만큼 팔렸으니 이만큼 드립니다’ 하고 주면 저는 그냥 받았습니다.

정말로 상대를 믿었다고 한다. 사실 서로 믿고 신뢰하는 것이 ‘정도’이니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그로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일이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도덕 교과서와는 다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대쪽같은 군자처럼 행동한다면 아마 이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분이 너무 ‘근사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분이 강조하는 ‘솔직함’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 그런데 만일 사장님이 택하신 사업의 분야가 달랐다면, 그리고 그 분야에서는 서로 주고받는 그런 부류의 행위 없이는 사업을 성공시키기 어려운 분위기였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김) 그런 상황에서는 저도 남들과 비슷하게 행동했겠지요.

아주 담백한 대답을 들었다.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솔직한 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인터뷰는 성공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사장님만의 중요한 회사 운영 원칙이 있을 것 같은데,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 첫 번째는 결제관리, 즉 수금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든 회사에 나가서 일하든 마지막 단계는 돈을 받는 것입니다. 소득이 없으면 일을 하나 마나 한 일이 되지요.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을 영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결제가 철저히 되도록 관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 그런데, 내가 돈을 받고 싶다고 해서 상대방이 반드시 제때 결제를 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 그렇지요. 그래서 저는 결제주기를 가능한 한 짧게 가져갑니다. 결제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결제 금액도 많아지고 점점 더 결제 부담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돈 받기가 어려워집니다. 저는 시작부터 짧은 결제주기를 제시하고 그에 따르도록 유도합니다. 결제받고 새로 납품하고, 또 결제받고 납품하고, 이런 패턴으로 가도록 합니다.

- 여하튼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 조건을 가지려고 밀고 당기지 않습니까?

김) 그럴 때 제가 가지고 있는 특허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런 것이 특허의 힘이다. 남이 가지지 못한 능력과 특기가 있으면 작은 기업이라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또 다른 원칙은요?

김) 재고관리입니다. 제가 의류 사업을 할 때도 그랬고, 액세서리 역시 재고가 사업에 치명타를 줄 수 있습니다. 보통 많은 사업가가 물건이 좀 팔린다 싶으면 한몫 잡을 생각에 더 많이 주문하고 또 더 많이 주문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최종 주문제품 대부분을 고스란히 재고로 떠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그동안 번 돈 다 날리고 큰 부담만 지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다가 그렇게 되는 거지요.

- 욕심부리다가 실패하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김) 있지요. 전에 정전기 방지용 머리끈을 개발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겨울에 건조하니까 머리카락에서 정전기가 일어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머리끈에 정전기를 흡수해서 발산할 수 있는 접지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끈 안에 구리를 넣었지요. 대박 날 것 같았습니다. 한 8천만 원 들여서 생산했어요. 그런데 한 50만 원어치나 팔았나? 아직도 창고에 쌓여서 창고비만 잡아먹고 있습니다. 하하.

지금은 이런 생각으로 생산합니다. 왜 맛집들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하루에 100인분만 준비하고, 재료가 소진되면 그만 판다”는 것과 같은 원칙으로 생산합니다. 한방에 욕심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가는 것이지요.

누구나 실패의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실패란 어쩌면 겪어야만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진짜 실패는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 그리고 직원들에 대한 관리도 중요시합니다. 저희 회사는 규모가 작아서 직원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대표가 직원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대표가 화날 일이 있을 때마다 화를 낸다면 일할 분위기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대표는 직원보다 훨씬 더 많이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직원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트라인 김기창 대표. / 사진=코트라인
코트라인 김기창 대표. / 사진=코트라인

젊은이들에게 드리는 조언

작은 기업을 약 30년간 꾸준히 유지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 경험을 한 사업가라면 후배들이나 젊은이들에게 들려줄 만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의 경험과 생각이 다 옳으니 잘 배워서 따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삶과 생각도 있으니 한 번 참고해 보라는 의미로.

- 요즘 기업에서 직원을 뽑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업을 해야 할 텐데, 이런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김) ‘어렵게 시작하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재벌기업을 물려받는 경우들은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보통사람이 부모님으로부터 큰 지원을 받아서 시작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시작한 만큼 사업을 쉽게 볼 것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설프게 돈을 쓰기 시작하면 위기 상황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소자금으로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사실 제 경우에도 거의 자금을 들이지 않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제품을 개발하고, 외부에 주문제작을 의뢰하는 식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처음에 들어간 비용이야 직접 구입한 원부자재 가격 정도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온라인에서 오픈마켓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사태로 더 급속하게 발전되고 있구요. 활용할 수 있는 마켓플레이스가 잘 형성되어 있으니까 본인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사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남이 하지 않은 것을 하라’ 고 권해 드립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따라다녀 봐야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남을 따라 하다 실패하고 다른 것을 시작하고 또 실패하고 다른 것을 찾다 보면 시간만 흘러갑니다. 제가 특허를 내고 보니, 누구나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아이템도 나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세 번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 점도 있습니다. 제가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던 때에 IMF를 겪었고 게다가 당시 저는 적지 않은 나이의 가장이자 일곱 명의 동생이 있는, 그야말로 과감하게 뭔가를 저지르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많은 상태였습니다.

물론 저는 기질적으로 큰 욕심이 없기는 했지만 제 여건상 모든 결정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짐을 지고 있지 않은 젊은이들이라면 용기 있게 도전해 보라고 권합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 체험에서 나온 조언인 만큼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례를 덧붙일 수 있을까요?

김) 저는 현재 월 300만 개 정도의 고무밴드를 생산합니다. 200만 개 내외를 해외 공장에서 제작해서 들여오고 국내에서는 100만 개에서 200만 개 사이를 생산합니다. 그런데 직접 공장을 운영하지는 않고 외주제작을 합니다.

대규모 공장과 설비가 없어도 제품 개발과 제 특허기술 만으로 얼마든지 운영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큰 자금을 들여서 사업을 하지 않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국내에서는 어떻게 생산하시나요?

김) 벌써 20년 정도 되었습니다만, 지역 아주머니들의 부업으로 생산합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여전히 많은 아주머니들이 부업으로, 혹은 소일거리로 고무밴드를 제작합니다.

로봇이 일하고, AI가 바둑을 두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의 손은 요긴하게 자기 몫을 하고 있다. 아무리 첨단이 지배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돈벌이가 된다.

4차산업혁명 시대라고 모든 사람이 다 인공지능 개발에 덤벼들 수는 없지 않은가. 김 대표는 주변의 인력을 충분히 활용하여 사업을 영위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 그러면 가장 오래 하신 분은 20년 정도 되셨을까요?

김) 그렇지요.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는 분도 계십니다.

- 아주머니들이 여러분 모여 계시니 재미있는 일도 있겠네요?

김) 네. 이분들이 계 비슷한 것을 하신대요. 매달 몇만 원씩 모아서 한사람에게 몰아주면 그분은 그 목돈을 받아 냉장고도 바꾸고, 집안 대소사에도 쓰고. 돈 버는 재미가 있겠지요. 그리고 각자가 받는 금액이 많지는 않지만 한 동네에 돈이 몰리다 보니 그 돈이 지역경제에 적지 않게 영향력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어느 직원이 저에게 그러더라구요. 그 동네에 가서 시의원 출마하면 될 거라고. 하하. 저는 그럴 인물이 못 된다고 웃어넘겼지요.

정확한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사업을 벌이면 열에 아홉은 망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10년, 20년 이상 끌고 나가기란 더욱 만만치 않다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이런 현실에서 김기창 대표는 거창하고 요란하지는 않아도 내실 있고 꾸준하게 30년을 버텨 왔다. 세상이 다 아는 성공담은 분명 멋지다. 하지만 김 대표의 인생 이야기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 나와 이웃,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리니까.

- 이제 60줄에 들어서셨습니다. 공무원이면 정년퇴직을 할 때입니다. 앞으로의 인생계획은 무엇입니까?

김) 앞으로 4년만 더 일하고 은퇴하려고 합니다.

- 왜 그때 은퇴를 하려고 하시나요?

김) 사실 지난 30년간 일을 하느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제대로 여행다운 여행을 가 본 적도 없어요.

제가 일본어도 잘하고 일본과 거래를 그렇게 오래 했는데 정작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에 간 적은 딱 두 번입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곳으로 남들 가는 수준의 간단한 여행이었을 뿐입니다. 가족들에게 참 미안하지요.

더 나이가 들어서 기운 없어지기 전에 두루 여행도 다니고 그간 못한 것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아예 시골에 가서 정착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전원생활도 해보고 싶고요.

- 완전히 사업을 정리하실 생각이신가요?

김) 그렇지는 않습니다. 후계자에게 물려주더라도 가끔 들러 보기는 하겠지요. 고문 정도 하면 괜찮으려나?

30여 년을 하루 같이 성실하고 알뜰하게 회사를 꾸려온 김 대표에게 일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아직은 상상하기 힘든 모양이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그때 가서 볼 일이고, 지금은 이분이 하시는 현재의 사업과 미래의 즐거운 계획이 모두 다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늘 그렇듯, 성실하고 겸손한 분과의 만남 뒤에는 기분 좋은 여운이 남는다. 코트라인의 사무실을 나서면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담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이종원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배달원, 청소부, 상점점원, 회사원 그리고 택시운전까지 약 10년간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아이를 기르고 조용하게 지냈다.

30대 초반 쯤에 막연히 이다음에 나이가 들면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세 가지 일 - 수염 기르기, 택시운전, 그리고 책 펴내기를 미국 땅에서 실천에 옮겼다.

2017년 첫 번째 장편소설 ‘용기가 필요하다’에 이어 2019년 4월 두 번째 장편소설 ‘붕어빵’을 발간했으며, ‘다래’라는 이름의 1인 출판사를 운영 중이다.  '붕어빵'은 현재 시그널에서 연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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