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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의 모래알⑥] 노회찬의 풍자적 정치언어

박홍순 / 작가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11.13 00:05
  • 수정 2020.11.1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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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 2019년 7.16(화)~28(일) 사진=필자.
‘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 2019년 7.16(화)~28(일) 사진=필자.

그리운 사람, 노회찬 

‘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에서 관람객들에게 미술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전문 도우미) 역할을 한 적 있다. 노회찬을 추모하며 함께 꿈꾸는 세상을 그린다는 취지에 공감하여 50여 명의 미술가가 기꺼이 참여한 자리였다. 노회찬재단에서 사람들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두말할 필요 없이 알겠다고 했다. 나름대로 선배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는지라 관련한 행사나 교육 요청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따르고 있다. 

행사가 열린 전태일기념관 세 개의 층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작품과 활동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세월이 지나도 그리워하는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이어졌다.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은 가족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전시 기간 관람객들에게 한 점씩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미술작품 속에 담긴 선배의 다양한 표정이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함께 활동하던 꽤 오랜 날들이 떠올랐고, 나중에는 직접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도 겹쳤다. 

그가 대변하고자 했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를 담은 그림, 나아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상을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도 적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노회찬 선배의 탁월함은 이미지 이상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접할 때 제대로 살아날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혼자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보는 도중에, 전시장 한쪽에서 촌철살인의 풍자가 담긴 발언 장면을 모아놓은 영상물을 발견했다. 짧지 않은 영상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풍자가 담긴 수많은 어록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것 아닙니까?” 십여 년 전 대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노회찬 전 의원이 던진 일침이다. 우리 《헌법》은 제11조 1항에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함을 규정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익숙한 내용이다. 공정한 재판은 물론이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점 역시 대부분 알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상식처럼 되어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의 삶조차도 반복이 되는 순간 익숙해지고 순응하며 살기 때문이다. 풍자는 차별과 억압이 습관처럼 스며들어온 일상에 날카로운 경종을 울린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하던 삶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노회찬의 정치 언어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처음에는 웃음이 터진다. 곧이어 현실을 직시하고 분노하게 된다.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의 선거 향응(Election Entertainment), 1755 / 출처 : Wikimedia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의 선거 향응(Election Entertainment), 1755 / 출처 : Wikimedia

새로운 생각을 자극하는 노회찬의 말

노회찬의 말은 예리한 통찰력과 재치로 18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한 윌리엄 호가스의 정치 풍자화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선거 향응>은 선거와 법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대변함으로써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도록 만든다는 사회원리가 얼마나 허구로 가득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렌지색 깃발로 볼 때 토리당과 함께 당시 영국의 양대 보수정당 중 하나인 휘그당의 모임이다. 후보자들이 지지자들과 향응을 즐기는 중이다.

탁자에는 후보자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앉아 있다. 아예 큰 나무통에 술을 부어놓고 퍼마신다.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굴이 탁자 위에 가득하다. 왼쪽에는 한 사람이 돈을 세고 있다. 귀족들이 후보에게 제공한 돈이리라. 푸른색 깃발을 펄럭이는 창밖의 토리당 대열에서 벽돌을 던진다. 방에서도 몇 사람이 밖으로 의자를 집어 던진다. 날아온 벽돌에 이마를 맞고 뒤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토리당의 선거 향응도 별반 다를 리 없으리라 충분히 짐작된다. 현상적으로는 보수정당 사이에서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듯 보이지만, 포장을 한 겹 벗기면 그들의 진정한 벗은 많은 부를 축적한 소수의 부자와 특권층임을 알게 해준다. 

선거 유세를 할 때는 모두를 위한 정치를 펴겠다고 외쳐댄다. 하지만 주요 보수정당의 후보가 되기 위해 상당한 부나 지위를 갖고 있어야 하고, 돈으로 선거를 하는 한 이들이 만드는 법은 돈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법 앞에 부유한 만 명만 평등하게 되는 이유다. 당시 영국인이라고 해서 어찌 이를 몰랐겠는가. 차별의 반복이 만들어낸 무력감, 지배세력이 퍼뜨린 두려움과 정치혐오 등이 작용하면서 순응하며 살아갔으리라. 하지만 호가스의 정치 풍자화를 마주하는 순간 소수만을 위한 법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분노가 고개를 든다. 

노회찬의 풍자적 정치 언어도 마찬가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잘 알려진 조세희 선생이 어느 자리에서 한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노회찬 전 의원은 다른 언어를 사용했어요. (…)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썼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특별한 말을 썼어요.” 새로운 언어가 보통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성과 순응을 넘어 새롭게 자각하도록 만드는 풍자적 언어이리라. 

웃음을 동반하는 노회찬의 언어는 일시적 기분 전환을 넘어서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건이나 현실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통해 진실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삶에 쫓겨 무심코 지나치던 사회 문제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끌게 한다. 나아가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노회찬의 풍자는 두려움의 대상을 희극적 대상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저항의 가능성을 확산시킨다. 웃음의 대상이 된 지배세력은 더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싸울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된다. 그가 우리에게 준 웃음은 권위와 두려움에서 일시적 탈출이 아니라 적극적 저항의 길을 연다. 강요된 엄숙함의 그물을 뚫고 웃음이 터져 나올 때 희망의 숨통이 열린다. 그 웃음을 타고 저항의 심리적 조건이 성장한다. 

* 필자 주 : 이 글은 예전에 노회찬재단 소식지에 실은 내용을 수정·보완하여 쓴 것입니다. 

박홍순 : 인문학·사회학 작가로, 《미술관 옆 인문학》, 《헌법의 발견》, 《생각의 미술관》, 《나이든 채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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