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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통해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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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통해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보니
  • 김선태
  • 승인 2020.11.3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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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동서양 두 천재, 탁월한 성취 속 말년 불운도 닮아
세한도, ‘품격과 필치’ 따로 보지 않아야 올바른 감상 가능
사진. 세한도 두루마리 펼친 면 우측.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본. 필자 사진.
사진. 세한도 두루마리 펼친 면 우측.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본. 필자 사진.
사진. 세한도 두루마리 펼친 면.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본. 필자 사진
사진. 세한도 두루마리 펼친 면 좌측.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본. 필자 사진.

세한도 특별전, “추사에 대한 관심 식지 않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특별전이 11월 24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한겨울 지나 봄 오듯 - 세한歲寒 평안平安’을 주제로 한 이 행사에는 총연장 1496.6cm인 국보 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 진본 포함 두루마리와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 등 총 18점이 진열된다.

사전 예약한 티켓으로 필자가 입장한 25일은 코로나19 재유행과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할 정도였고 감상자들의 표정도 더없이 진지해, 추사와 세한도에 대한 세간의 식지 않는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1786년 병오년 불의 해에 태어나 불꽃처럼 살다 간 추사 김정희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더욱이 추사 당대에 그를 능가할 절륜의 인재가 없었으니, 역으로 이는 추사 말년에 불어닥친 불운의 연고이기도 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추사와 거의 동시대를 산 서양의 천재 문인으로 프랑스의 발자크를 볼 수 있다. 영국의 디킨스가 추사에 비해 한 세대 뒤에 활동했으니 겹치는 기간이 비교적 짧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추사보다 13년 늦게 태어나 6년 일찍 운명했으니 장수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프랑스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이자 불세출의 대문장가로서,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말년에 불어닥친 불운이 크게 자신의 재능에 연유한다는 점에서 발자크와 김정희의 삶은 서로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문학을 통한 세계정복’ 꿈꾼 발자크

발자크에게 작가의 꿈을 품게 한 동기는 그의 소년 시절을 지배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약관 30세의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갓 돌아온 패장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손에 넣더니 여세를 몰아 5년 뒤 제위에 올랐다.

이어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을 차례로 손에 넣으며 세계정복의 장도에 올랐으니 그가 활약한 16년이 모두 발자크의 어린 시절이다. 이런 탓에 소년 발자크에게 나폴레옹은 평생의 우상이자 삶의 동기가 되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을 차례로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하자 발자크는 어떤 직업도 갖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청년이 되어 작가의 꿈을 굳힌 그는 나폴레옹의 초상 아래에 이렇게 썼다.

“그가 칼로 이루지 못한 것을 내가 펜으로 이루리라.”(‘천재와 광기’, 스테판 츠바이크, 17쪽)

발자크가 남긴 100여 편의 ‘시민소설’들과 2천 명의 등장인물을 내세운 ‘인간희극’은 칼 대신 문학을 통한 세계정복을 꿈꾼 그의 도발적 의지로 인해 가능했던 결실이다. “가장 사소한 자들도 권력이라면 얻고 싶어 어쩔 줄 모른다”고 한 나폴레옹의 가르침을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에 충실하게 구현해냈다.

‘고리오 영감’을 포함한 1901년 판 발자크 전집.
‘고리오 영감’을 포함한 1901년 판 발자크 전집. 사진 위키피디아.

무엇보다 작가로서 발자크가 지닌 탁월함은 한 편의 소설 속에 세계를 밀어넣어 재창조해내는, 비유하자면 ‘인간사의 수천 가지 유희를 단 한 가지 유희로 모두 포괄해내는 능력’이다. 당대 누구도 근접하기 힘들었던 이 능력을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집 ‘천재와 광기’ 발자크 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비본질적인 요소가 그대로 남아서 순수하고 가치 있는 형식들이 누수될 때는 갖가지 현상을 하나로 결집하여 그것을 여과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렇게 하여 발자크는 문학을 통해 “제각기 분산된 개별 형식을 그의 달구어진 손으로 압축하여” 모든 등장인물을 한 시대의 전형이자 어떤 다수를 대변하는 성격의 본질이 되게끔 했으니, ‘인간희극’ 시리즈는 그 결과 창조된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천재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문학으로 세상을 평정하겠다는 과도한 욕심으로 그는 일찌감치 성공에 집착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던 그는 공증인 사무실 서기로 일하며 허름한 다락방에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생활고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어 뭇 여인들의 후원을 받았지만 그마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무리하게 인쇄업을 벌인 끝에 망하여 빚더미에 올랐는데 이 일은 두고두고 발자크의 발목을 잡았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많게는 하루 16시간을 글쓰기에 몰두했는데,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옥살이 같은 자신의 환각 속으로 유폐되어 들어가 작업실의 고문의자에 틀어박히는 일”이었다.

발자크는 이후 평생 과도한 집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만년의 그를 심장질환의 고통이 덮쳤다. 그런 가운데 20여 년에 걸친 연정이 결실을 보아 미망인 한스카 부인과 결혼했지만, 그로부터 5개월 뒤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스카 백작부인(Countess Ewelina Hańska). 1825년, Holz von Sowgen 작.
발자크 평생의 연인 한스카 백작부인(Countess Ewelina Hańska). 1825년, Holz von Sowgen 작.

하지만 글을 통해 사물들의 표면을 벗겨내고 그 내적 본질을 드러낸 발자크의 ‘무섭도록 뛰어난 직관적 통찰력’은 그의 방대한 작품들을 통해 영원히 우리 곁에 남게 되었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평했다.

“발자크와 더불어 소설을 내적 세계의 백과사전으로 보는 사고가 시작되었다. 그의 작품들 안에 한 시대와 세계, 한 세대가 들어앉게 되었다.”

추사, 불혹에 이미 조선 지성계를 평정

다시 추사로 돌아가 그가 이룬 성취를 보자.

오늘날 학계는 추사가 시서화(詩書畵) 전반에 걸쳐 나아가 유학·불교·다도 이론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학예의 최정상을 차지했고 수많은 제자와 아류를 낳았음을 인정한다. 이미 20대 중반부터 두각을 드러내 50대 중반이면 자신의 모든 분야에서 정상에 올라 당대는 물론 조선사를 통틀어도 그와 같은 인물을 찾기 어렵다.

다만 그의 재기가 너무 일찍 드러난 탓인지, 사도세자의 스승으로 삼정승에 오른 채제공이 추사의 글을 보고는 “이 아이는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라 예언했다.

젊은 날의 추사는 넘치는 행운을 누렸으니 스승 박제가를 만난 일이 그렇고 24세에 부친을 따라 동지사로 연경 땅을 밟은 일도 그렇다. 특히 연경에서 만난 실학자들과 스승으로 모시게 된 완원과 옹방강, 친구 격인 주학년 등은 추사의 시야를 훌쩍 넓혀 주었다.

이 경험에 그의 성실함과 재능이 결합하니 얼마 안 가 조선에서 추사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관운까지 따라 181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당시 예조판서이던 부친 김노경의 후원 아래 거듭 출세를 이어갔다.

학문에 대한 추사의 관심은 특출난 것이었다. 청나라 경학의 총서 황청경해 1408권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쳐 수소문한 끝에 기어이 입수할 정도였다. 게다가 금석학에 비상한 열정을 쏟아 벗 권돈인을 졸라 산간오지에 파묻힌 황초령 진흥왕비를 찾게 하기도 했다.

이미 40대에 조선의 학문 전반에 걸쳐 대가의 경지에 올랐는데 그 뒤로도 추사는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시에 추사는 주변에 대한 비평에 매섭기 짝이 없었으니 송나라 소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지론으로 삼을 정도였다.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知無不言 言無不盡).”

노자 갑본 3장에 “화는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禍莫大乎不知足)”고 했다. 추사는 청조의 대가들과 교류하며 국내외에 문장을 떨쳐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지만 자신의 지식과 기예에 만족할 줄 몰랐고 더하여 상대방의 부족함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 서예계를 지배하고 있던 원교 이광사를 평하며 “(그가 진체니 촉체니 하는데)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아 가소롭다”고 썼다. 고승 백파의 글을 비평한 ‘백파 망증 15조’에서는 “유불 비유를 일삼으나 무엄하고 기탄없음이 이와 같음을 일찍이 보지 못했노라”며 조소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화근이었다.

관용을 모르는 자만 탓, 정점에서 추락

1840년 6월 55세의 추사는 동지겸사은부사가 되어 두 번째로 청나라 연경에 갈 기회를 얻었다. 이미 명성이 자자한 그가 중국의 명사들과 다시 교류하여 얻을 지위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정적들이 그를 모함하고자 했고 추사는 허위 상소문의 작성자로 몰려 손 쓸 틈 없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8월에 구금된 추사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 목숨만 건진 채 제주도로 위리안치되었다.

그가 모함으로 유배에 오른 일은 애석한 일이었지만, 부족한 관용 탓에 세간에 형성된 악평이 추사의 입지를 좁혔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목숨을 부지해 귀양을 가는 와중에도 추사의 교만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가 전주를 지나다 시골 선비인 창암 이삼만이 평을 부탁하자 “노인장께선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했다. 이어 친구인 초의선사가 있는 해남 대둔사에서는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내고 자신의 글을 달아두라 했다.

하지만 제주 유배는 끔찍했다. 가끔 이상적, 허련 등의 방문으로 생기가 돌기도 했으나 실상은 육신의 고통이 극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헌종이 묻고 소치 허련이 답한 그의 근황을 보면 모든 걸 고려하더라도 그가 수년에 걸쳐 삶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종 : 완당의 귀양살이는 어떠하던가?
소치 :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안에, 벽에는 도배도 하지 않은 방에서 북창을 향해 꿇어앉아 고무래 정(丁) 자 모양으로 좌장(坐杖, 짧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밤낮 편히 자지 못하여 밤에도 등잔불을 끄지 않습니다. 숨이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헌종 : 먹는 것은 어떠한가?
소치 : 생선 등속이 있으나 비린내가 위를 상해 못 먹으며, 혹 본가에서 반찬을 보내나 너무 짜서 잘 먹지 못합니다.(‘추사 김정희’, 유홍준, 340-341 요약)

추사는 8년 만에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는데, 3년 뒤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의 나이 이미 67세였다. 기나긴 유배 생활이 신체를 갉아 먹어 그로부터 추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겨우 4년 남짓했다.

완당 선생 초상. 소치 허련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완당 선생 초상. 19세기 중반, 소치 허련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런 시련 속에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성숙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10여 년에 걸친 고립 가운데 마침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초의선사에게 원교의 현판을 복원해 달라 부탁했으며,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백파에게 쏟아낸 비평을 반성했고, 이삼만의 묘비를 찾아 절하고 묘문을 썼다.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자신을 노인네라 멀리하며 저들끼리 노는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적었다.

눈썹 깔아 소년 섬김 감히 하지 못하니
혼자 남아 어느새 참선객 됐네그려.
동쪽 방의 떠들썩함 어인 일로 저러한가
즐거운 일 눈앞에 가득한 줄 알겠네.

유홍준 교수는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가 천재에게 따르기 마련인 인간적 결함을 넘어선 끝에, 비로소 “뛰어난 솜씨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을 터득했다고 지적한다. 일평생 흔들림 없이 오직 해결책을 찾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면모다.

“세한도, 오래 남아 아둔한 이들 일깨울 것”

추사의 세한도를 평하는 말을 들으면 종종 추사가 화를 입게 된 배경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중 흔한 평이 “세한도는 작가의 품격이 잘 드러난 것이지 그림의 수준은 별 것 아니다”라는 것이다. 조선 산수화의 전문가에게서 언론인에 이르기까지 이런 평이 다양하게 변주된다.

개중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말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유홍준 교수는 앞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추사가 산수화를 즐겨 그리지 않았고 잘 그리지도 못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의 명작 ‘세한도’도 거기에 서린 고아한 품격이 좋은 것이지 경물을 묘사한 필치의 능숙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유 교수가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의 경지로 돌아가게 하라”는 추사의 말에 근거해, 기교를 부질없어한 추사의 정신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그림에서 품격과 필치를 떼어놓고 평하는 것은 올바른 감상법도 아니며 제대로 된 평가도 되기 힘들다. 필치에서 품격이 드러나고 품격에서 필치가 여무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진 위) 김정희 필 세한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사진 아래)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준다는 내용을 쓴 글.
(사진 위) 김정희 필 세한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아래)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준다는 내용을 쓴 글.

추사에게서 세한도를 얻은 제자 이상적이 이 그림을 들고 연경으로 가서 쟁쟁한 문인화백들에게 보이자 그들이 일제히 발문을 썼는데, 어디에도 그와 같은 감상이나 평은 없었다. 세한도에 적힌 당대 발문들은 하나같이 추사의 필치와 품격을 구분하지 않았으니 가령 다음과 같다.

숲의 나무는 명예와 절조와 같으니 송백은 본연의 절조를 갖고 있네.
군자는 곤궁할수록 더욱 굳세지니 받아주지 않은들 무엇을 걱정하랴?
- 해우(海虞) 오찬(吳贊)

하늘과 땅이 씨앗을 내려 타고난 본성을 북돋아주었네.
바위와 벼랑, 봉우리와 언덕에 자리를 잡아 뿌리 내렸네.
서리 맞은 다른 잎은 시들어도 시원스레 가지 뻗었네.
올곧은 절개 바꾸지 않으니 그 덕은 옥을 닮았네. (...)
완당 그림의 뜻을 써서 우선(이상적)에게 주며 질정을 바란다.
- 남난릉(南蘭陵) 조진조(趙振祚)

새 그림에 경계와 잠언을 담았으니 오래도록 요구할 것은 잊지 않는 데 있네. (...)
붓을 휘둘러 곧게 뻗은 나무를 그렸으니 사귄 벗에는 노성한 학자가 많네.
- 다마산인(茶磨山人) 반준기(潘遵祁)

우연히 훑어보다 찬 숲에 눈길이 이르니 한 폭의 그림은 분명 좌우명이로구나. (...)
눈과 서리 겪을수록 더욱 푸르거니 이러한 절조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우습구나 어지러운 복사꽃 배꽃의 아름다움은 봄바람에 기대어 살랑거릴 줄만 아는구나.
- 귀안(歸安) 오순소(吳淳韶)

차가운 싸라기눈이 막 내려도 굳센 가지는 자태가 늠름하고, 해가 바뀌어도 아름다운 둥치는 평소의 모습을 자랑한다. 영고성쇠의 순환 속에서 운수가 기박해도 절조가 드러나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바뀌어도 때가 되면 평소 지킨 것이 드러나기 마련 아니겠는가? 세속의 울타리를 멀리 벗어나 부박한 습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와 군자라면 여기에서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그림 오래도록 남겨 나약하고 아둔한 이를 일깨우리라.
- 양호(陽湖) 장수기(莊受祺)

발자크의 눈으로 세한도를 다시 보면

발자크는 글을 쓰기 위해 문학‧역사‧미술사는 물론 군사학‧화학‧생물학‧점성학을 연구했다. 뇌수의 능력과 심령 연구에 빠지는가 하면 수상학과 점성술을 파고들었으며 생업을 위해 인쇄소와 신문사를 차리고 투자와 투기에도 뛰어들었다. 그가 기존 화단의 문제점과 한계를 꿰뚫고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는 이유다.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 흉상, 1892년 작,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 흉상, 1892년 작,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그런 이유로 발자크는 당대 주류 화풍에 대한 회의를 자신의 작품에서 곧잘 드러냈다. 특히 그는 기존 화단이 경쟁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데 앞장서는 점을 못마땅해하여, 1831년에 쓴 단편 ‘미지의 걸작’에서 주인공 프렌호프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말이야, 형상을 정확히 그려내고, 각각의 것을 해부학의 법칙에 따라 제자리에 놓으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이라네.”

발자크가 당대 프랑스 화단을 주도했던 고전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전주의자들은 발자크가 지적한 바로 그 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로부터 30여 년 뒤 등장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밀려나게 된다.

놀랍게도 고전주의를 전복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핵심 사상이 발자크의 다음 주장과 일치한다.

“인간이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이해하는 방법이 바로 선(線)이라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득 찬 자연에는 선이 없다네. (…) 빛의 분배만이 육체에 외관을 부여하지.”(‘미지의 걸작’에서)

당대 화가들의 ‘모사주의’를 비판했던 발자크가 추사의 세한도를 보았다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에도 말년의 고단한 삶을 천형처럼 짊어졌던 이 작가는, 자신과 닮은 점이 참으로 많은 추사의 작품을 어떻게 평했을까.

세한도에 발문을 남긴 숱한 청조의 문인화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마도 발자크 역시 세한도에서 필치와 품격을 떼어놓고 평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만일 발자크가 추사의 삶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아래와 같은 자신의 주장이 추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고 말했을 성싶다.

“천재는 언제든지 그의 사고를 행위로 옮길 수 있는 자이다. 그러나 정말 위대한 천재는 이 실행력을 부단히 펼쳐나간다. 실천하지 않고 천재가 될 수 있다면 그는 신과 진배없으리라.”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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