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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멋, 우리 맛, 시그널이 간다 ! (통영투어)

  • 기자명 이현진
  • 입력 2020.12.07 20:38
  • 수정 2020.12.0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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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리울 땐, 통영에 가자

굴의 계절이 왔다.

시대가 변해 김장을 담그는 집이 많이 줄었지만, 온 식구가 함께 김장을 끝내고, 무쳐낸 겉절이에 보쌈 한조각,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굴은, 그야말로 김장철의 꽃이다. 석화라는 애칭이 부끄럽지 않다.

조선중기 기이한 행적으로 유명한, 곡차를 좋아하시던 진묵대사가 있었다. 김제에 머무르실 때 바닷가에서 굴을 따드시는 걸 보고 과객이 스님이 왜 육식을 하시냐며 시비를 걸었다. 이에 스님은 이게 무슨 고기냐 이것은 석화(石花).’ 돌에 피어난 꽃, 오늘날 굴의 애칭, 석화의 유래이다. 어쨌든 그 굴의 국내 최대 생산지는 통영이다.

석화와 굴
석화와 굴

김장모임에 코로나가 전염됐다는 허망한 뉴스속에, 모든 대외 활동이 위축이 되는 시기, 그래도 통영은 사람이 많다. 중앙시장과 서호시장 언저리는 관광객과 생활인의 발걸음으로 부산하다.

통영은 3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던 곳이라, 통영(統營)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3도 수군통제사는 1593년의 이순신 장군이다. 그래서 한때 충무공 이순신을 기려 충무(忠武)라고 한 적도 있지만, 1995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통영은 3도 수군을 통제하던 곳이라 각지의 배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이다. 덩달아 풍부한 해산물과 먹거리가 발달했다. 짝사랑하던 여인을 찾아 통영을 왔던 시인 백석은 비록 실연을 당했지만, 통영의 먹거리에 대해 시를 남겼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 <통영 2>

통영, 백석 시인의 시비
통영, 백석 시인의 시비

요즈음은 모든 여행이 맛집을 따라다니는 먹방 투어의 시대, 어딘가를 여행하기 위해 그 지역의 맛집부터 먼저 검색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통영은 맛보다는 멋이 먼저인 예술의 도시이다.

토지의 대작가 박경리,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던 청마 유치환,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던 김춘수가 있고, 동백림의 한이 서린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이 있다.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가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또한 통영운하 건너 미륵도에 오르면 법정과 효봉의 미래사가 있고, 그 앞에 한산대첩과 푸르른 한려수도의 바다가 펼쳐지며, 고개 들어 올려보면 벽화마을의 원조인 동피랑 마을이 있다.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은 통영항, 가로수처럼 늘어선 다찌집과 꿀빵과 충무김밥의 긴 행렬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와 산과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 통영. 그 도시를 간다.

물길 아래로는 운하로 이어진, 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다리위에 서면, 왜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는지가 고개가 끄덕여진다.

통영운하
통영운하

박경리 선생은 그의 소설에서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 소반, 경대, 문갑, 투석장, 나전칠기 등)이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 모른다.”

바다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통영에 이러한 장인들의 수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아마도 3도 수군 통제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영에 공급해야할 다양한 무기, 군복, 생활품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마치 사하촌처럼 공방이 성행하였을 것이다. 박경리선생도 이것이 통영의 예술 토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통영에서 예술가가 많이 태어난 것은 이순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순신은 덕장이면서 예술가, 그래서 수군본부가 들어서면서 8도의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기술자(쟁이바치 = 예술가)들이 다 모였다. 통영은 기후, 먹거리, 풍광이 아름다워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눌러 앉아 소목장, 선자장, 주석장이 되었다. 이들이 통영예술의 토양이었다.”

나전칠기의 으뜸이던 통영이 지금은 예술적 전통이 많이 약해지고, 굴과 다찌집과 꿀빵과 충무김밥이 장악한 상업적 욕망의 항구도시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여행객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은 이곳은 이러한 유명인들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이다.

통영은 윤이상의 음악의 뿌리,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기념관
통영, 윤이상기념관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은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윤이상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어머니가 이웃 아낙들과 우물가에서 부르던 민요, 미륵산의 사월 초파일 행사,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 소리, 동네 굿판의 무속음악, 부유한 외가 친척집에서 들은 전통음악 등의 소중한 경험이 그의 음악에 깔려 있다>고 했다.

특히 1994년 귀국이 좌절된 후 통영시민에게 보낸 윤이상의 육성 메시지는 듣는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 나의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구라파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2010년 개관한 윤이상공원-윤이상기념관은 그가 생장했던 통영시 중앙로 27일대를 통영시에서 매입하여 개관했고 2층 건물에 유품 170여 점이 점시돼 있다. 동백림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것을 시작으로 기념관이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그의 삶과 대비되듯, 2층 전시관의 흉상은 선굵은 모습으로 의연히 관람객을 맞이한다.

 

북한에서 보내온 윤이상 흉상
북한에서 보내온 윤이상 흉상

2층 전시실의 흉상은 북한에서 왔다, 평양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소장한 흉상을 복제한 것으로 85kg의 동()으로 견고하고 육중하게 만든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공개가 어려운 시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전시장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공원에는 윤이상 선생 생가 터에 독일 베를린에 살던 집 모양 그대로 복원한 집이 있다. 그리고 선생이 타시던 벤츠 차량과 차고까지, 주변을 지우고 두 건물만 보면 영락없이 독일의 어느 주택에 와있는 것 같다.

기념관 1층에는 정일근 시인이 윤이상 기념관에 드리는 시 <이 집에 윤이상 선생이 살고 있다>는 시가 금속판에 쓰여 벽에 붙어 있다. “집은 돌아오는 곳이다 ...... 육신은 베를린 묘지에 차갑게 묻혔으나, 혼령은 뜨겁게 살아 이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제의 집이 있어 오늘의 집이 있듯......이집에 이십세기 최고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살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윤이상 선생의 육신도 이제는 돌아와, 한려수도가 내려다보이는 통영의 언덕, 통영음악당 옆에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통영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쉬고 계신다.

 

바다가 보이는 윤이상 묘역, 처염상정(혼탁한 곳에서도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의 글씨가 눈에 돋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윤이상 묘역, 처염상정(혼탁한 곳에서도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의 글씨가 눈에 돋보인다

<나의 음악은 악을 배척하고 삶의 승리를 구가하고 슬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인류사회에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욕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의 고국의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나의 음악을 통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고 내가 절실히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사회와 민족끼리의 화해가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다 같이 노력합시다. 안녕히.....>

미륵도 편백나무 숲길과 미래사

통영운하를 다리로 건너면 미륵도이다. ‘미륵도라는 이름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오신다는 미륵보살이 오기를 바라는 염원이 섬 이름에 담긴 것이다. 유난히 통영 앞바다의 섬들에는 세존도, 연화도, 반야도 등 유독 불교와 관련된 섬 이름이 많다. 불경에 (欲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 “연화세계(극락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그 처음과 끝을 부처님께 물어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욕지도,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의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불경의 한 구절이 통영 앞바다의 섬으로 흩어져 있다.

미래사앞 편백나무 숲길
미래사앞 편백나무 숲길

편백나무숲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이 조성한 숲인데, 해방 후 미래사가 이를 사들여 사찰 임야로 가꾸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한려해상 바다백리길중 하나로 바다백리길은 일부러 만든 길이 아니라, 섬 주민들이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던 지게길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용하던 길을 활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미래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피톤치드가 가장 강하다는 편백나무 숲을 걸으면 갑자기 바다가 나타나며 미륵보살이 맞이한다, 마치 꿈은 이루어진다 그 한복판에 온 듯 탁 트인 바다는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바다백리길은 1구간 이곳 미륵도 달아길부터 2구간 한산도의 역사길, 3구간 비진도의 산호길, 4구간 연대도의 지겟길, 5구간 매물도의 해품길, 6구간 소매물도의 등대길까지 있다

연꽃과 야생화들의 아름다운 자태가 있는 미래사는 1951년 효봉(曉峰)의 상좌였던 구산이 석두, 효봉 두 승려의 안거를 위해 토굴을 지은 것을 출발했다. 효봉 스님(1888~1966)은 일제 시대 판사를 하시면서, 어느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시고는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것에 회의를 느껴 출가를 했다는 이야기가 야사처럼 전해진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조계종의 큰 어른의 한분이셨고, 해인사에 머무르던 중 6.25로 피난길에 올라 부산에 왔다가 다시 해남 대흥사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가다가 배 멀미가 심하여 통영에 내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쉬었다 갈 요량으로 도솔암에 들렀다가, 그대로 눌러 앉게 되었다. 당시 효봉스님을 모시던 제자 구산 스님이 스승인 효봉스님의 안거를 위해 세운 절이 미래사라고 한다.

미래사는 또 하나의 법정 스님이 효봉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절로 유명하다. 1955년 초 효봉스님은 불교 정화운동에 참여하느라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몹시 추운 날 24살의 청년이 효봉스님을 만나게 되고, 이곳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이곳에서 법정스님이 출가하셨을 때, 이곳에 출가했던 선배가 고은시인이다. 불경보다는 글을 더 잘 써서 결국 환속해서 시인으로 인생을 살아간 고은 시인과의 인연이 이렇게 윤회의 질곡처럼 이어져가는 곳이 이곳 미래사이다.

 

미래사 천왕문, 삼회도인문이 걸려있다
미래사 천왕문, 삼회도인문이 걸려있다

천왕문의 편액에는 삼회도인문(三會度人門)이라고 쓰여 있다.

삼회도인이란 미륵불이 3차례의 법회(三會)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란다. 미륵도에서 미륵이 오실 것을 염원하는 미래사, 그리고 삼회도인문, 중생은 언제나 구세주를 갈망한다.

박경리 기념관, 원주 하동 그리고 통영에 있다.

통영시 산양읍 커다란 통유리로 통영의 바다를 바라볼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이 기념관은 입구에서부터 그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박경리기념관의 동상
박경리기념관의 동상

19261028일 통영에서 태어난, 엄마 옆에 서있는 7살 당찬 소녀의 모습이 통영의 박경리이다.

 

이곳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여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을 새로이 부각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 박경리를 기념하고 특히 고인의 대표작인 토지친필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녀의 실제모습이 담긴 영상실, 집필한 책과 작품에 관한 논문 등을 모아놓은 자료실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박경리선생의 고향으로 선생문학에 끊임없는 영감을 제공한 고향 통영을 모형도로 소개함으로써 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 정도는 다시 읽어보고 오면 좋다.

박경리 선생은 남편이 6.25 전쟁 중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남동 오거리 부근에 수예점을 열었었다. 그리고 여기서 딸아이가 다니던 충렬초등학교의 총각 선생과 재혼을 하였다가, 과부가 총각과 재혼했다는 사람들의 눈총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하고 통영을 떠나, 그리고 소설 <토지>로 하동에는 두 번인가 왔지만 고향은 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원주에 정착한다.

원주는 선생의 사위 김지하가 구속되어 있을 때 김지하의 아내 김영주는 원주에서 아들을 데리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박경리 선생이 본인의 삶과 비슷한 고통과 외로움을 겪고 있는 자식들과 가까이 있으려고 이사간 것이 그대로 원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대소설가가 원주에 터를 잡았으니 원주시로서는 엄청나게 반가운 일이다. 선생이 살고 있던 집도 보존되어 있고, 토지문학관도 건립되어있다. 불세출의 명작 <토지>의 무대인 하동에서도 그냥 있을 수는 없는 일, 평사리 문학관을 열었다, 3군데 도시에서 한명의 작가를 추모하는 기념관을 열다니 우리 문화계에서의 선생의 위치가 짐작이 된다.

2004115일 고향을 떠난 지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통영을 찾아와 강연을 한 박경리선생, 결국 고향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한다. 기념관위로 올라가면 한려수도가 보이는 언덕위에 대문호이자 긴 인생을 살아온 한 여인의 묘가 곱게 단장되어 있다.

아직도 다 채우지 못한 청마 유치환의 우체국, 당포해전의 바다, 동피랑의 벽화, 이순신의 세병관...... 끝이 어딜지 모르는 통영 투어는 1박도 2박도 모자르다, 눈의 호사가 마음의 풍요를 불러 오듯, 통영은 그래서 누군가의 인생과 사랑, 미련이 많이 남는 도시이다. 겨울 통영은 그래서 맛이 있고, 멋이 있다.

 

* 통영먹거리

통영의 저녁은 무조건 다찌집이다. 다찌는 모든 해산물이 다있지 또는 일본어의 다찌노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술만 시키면 안주를 푸짐히 주는데, 최근에는 술과 안주가 세트화되어 나온다. 안주고를 고민 없이 그저 바다와 항구를 바라보며 한잔 나누기엔 적당하다. 8,90년대 익산의 강경식당류의 술값만 내면 안주가 푸짐히 나오던 것을 생각하면 유사하다,

대추나무 다찌 055-641-3877

저녁에 술을 한잔하고 나면 아침 속풀이 해장국의 최고는 물메기탕이다, 특히 겨울은 물메기탕이 제철이다, 젓갈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밑반찬으로 나오는 전어내장젓이 일품이다.

분소식당 055-644-0495

통영이 초행이면 오미사 꿀빵- 최근엔 5가지맛을 한 상자에 담아준다. 한번은 먹어볼 충무김밥 충무김밥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국풍81 때문이었다.

<이현진 우문현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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