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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의 모래알 ⑦] 정치를 관전한다고?

“넘쳐나는 정치평론, 주권자를 상품 소비자로 전락시킬 우려”
박홍순 / 작가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12.0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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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브룩 비어드(William Holbrook Beard), ‘저녁식사 후의 토론’, 1885년 작.
‘저녁식사 후의 토론’, 윌리엄 홀브룩 비어드(William Holbrook Beard), 1885년 작.

정치평론의 홍수 시대를 살다

윌리엄 홀브룩 비어드는 주로 동물을 통해 인간사회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동물이 인간보다 오히려 인간의 특성을 더 잘 설명해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동물을 등장시킨 우화가 대개 그러하듯이,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다가 조금씩 우리 현실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녁식사 후의 토론>은 유럽인들의 흔한 저녁식사 광경을 보여준다. 본 메뉴를 먹은 후에 디저트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대화에 열중하고 있다. 복장을 보니 다들 나름대로 ‘한 지식’ 하는 모양새다. 왼쪽에서 열변을 토하고, 대부분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듣는다. 고개 뒤로 손을 돌리며 따분해하는 이도 보인다. 웨이터가 추가로 술을 가져오는 것을 보니 이야기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질 태세다. 

유럽 사람들의 저녁 식사는 두 시간을 넘기는 일이 많다. 많이 먹어서라기보다는 많은 이야기를 하기에 시간이 길어진다. 대화가 끊기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는 걸 좋아한다. 상대에게 반론을 제기하며 따지는 경우도 자주 일어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다가서는 논쟁적인 대화를 즐긴다. 정치나 책과 관련된 주제가 상대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독서를 하지 않으면 저녁 대화에 끼어들기 힘들다. 유럽인들이 지금도 책을 꽤 많이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식탁에 책이 없으니 독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정치나 사회 관련하여 열띠게 토론하던 중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비어드가 풍자를 통해 메시지를 담는 경향이 다분하니, 원숭이의 부정적 특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흉내를 잘 내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원숭이의 비유는 흉내에만 능할 뿐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 겉치레에 머무르는 경박함, 남의 흉내만 내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행위를 조롱할 때 주로 쓰인다.

화가는 현실의 정치 토론이 정치 ‘활동’이기보다는 정치 ‘흉내’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게 아닐까? 단지 정치를 소재로 한 풍성한 수다, 현실 개선보다는 자기만족에 허우적대는 소란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 

나는 TV나 유튜브에서 이른바 ‘정치평론가’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 그림이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제부턴가 공식 직업이 되었고, 이를 내세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정치평론가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매체에서 논평과 논쟁을 한다. 지상파에 이어 여러 종편 채널이 생기면서,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팟캐스트와 유튜브까지 가세하면서 정치 토크쇼가 큰 인기를 끈다. 다양한 입장을 가진 정치평론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정치에 대한 평론이 나쁠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반길 일이다. 문학·미술·음악·영화 등에 대한 평론처럼 정치도 평론 대상이 된다. 직접 창작을 하는 예술가나 감상자가 미처 보지 못하는 점이 있을 수 있다. 평론가의 도움을 받아 인식 지평을 넓힌다면 꽤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가나 정당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분석하고 설명해주는 작업도 의미가 있다. 나아가 현실에 널리 퍼져 있는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고, 관전평을 한다? 

하지만 정치적 인식에 상당히 해악을 미치는 내용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정치를 ‘관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수동적인 관람객에 머물게 하는 경향이 큰 문제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는 이게 ‘관전 포인트’라는 식의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한 그에 대한 자기 나름의 관전평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표현만이 아니라 실제의 내용도 관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루가 멀다고 그날의 정치적 사건과 쟁점을 다루기 때문에 마치 스포츠 중계를 보는 기분이다. 아무런 수고로움이나 손해 볼 일 없이 편하게 앉아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듯 보기만 하면 된다.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운동장 관람석이나 TV 앞의 소파에 앉아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분위기 말이다. 매주 방영되는 시리즈 드라마나 쇼를 기다리듯이 시간을 죽이는 수단이 되어버린다. 정치라는 장에서 직접 뛰는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의 자세로 관찰하고 비평을 하는 게 세련된 정치적 태도라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준다. 

설사 관전으로서의 정치평론이 어떤 실천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해도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나기에 십상이다. 정치를 백화점이나 시장의 진열장처럼 여기게 만든다. 정치 행위를 진열된 여러 상품 가운데 비교적 괜찮은 것 하나를 고르는 능력으로 좁혀놓는다. 정치 행위를 유통 중인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선택 행위로 변질시킨다. 주권자이자 정치적 주체인 인간을 협소한 유권자의 지위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정치는 곧 삶과 생활의 문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치만큼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는 영역이 드물다. 정치평론의 역할은 사람들이 정치를 관람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데에 두어져야 한다. 제삼자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상에서 직접 참여하는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기자에 대해 기자 정신이라든가 기자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저 월급을 받는 직업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정치평론가는 어떨까?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기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정치평론가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특히 TV나 유튜브 방송에 자주 노출되는 인기 평론가라면 더욱 그러하다. 단순히 방송 출연자라는 생각을 넘어 다수의 정치의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치평론가로서 가장 먼저 스스로 의심하고, 늘 경계해야 할 태도가 관전으로서의 평론이다. 관전에 안주한다면 비어드의 <저녁식사 후의 토론>에 나오는 원숭이들처럼, 정치 이야기를 술자리 안주로 삼는 정치 흉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박홍순 : 인문학·사회학 작가로, 《미술관 옆 인문학》, 《헌법의 발견》, 《생각의 미술관》, 《나이든 채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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