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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복원, “이제야 찾아가 절할 면목 생겨”

온 가족이 독립투쟁...1990년 유해 모셔
고택 절단한 日帝 철길 78년 만에 ‘해체’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0.12.24 00:03
  • 수정 2020.12.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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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철거’, 독립운동 성지 가른 철로17일 오후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 앞에서 열린 철로 방음벽 철거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망치로 방음벽을 부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78년 만에 철거’, 독립운동 성지 가른 철로
17일 오후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 앞에서 열린 철로 방음벽 철거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망치로 방음벽을 부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일제가 비열하게 훼손한 저택, 이제야 '복원'

일제가 멀쩡한 대저택을 반토막 내고는 그 가운데로 철길을 놓았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 이 선생을 비롯하여 무려 열한 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 집이 78년 만에 제 모습 찾기를 시작한 셈이다. 

임청각은 1519년 지어져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 이씨 종택으로 일제 강점 당시 99칸을 자랑하는 안동 대표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상룡 선생이 앞장서고 차례로 동생, 아들, 조카, 손자, 당숙, 부인 등 가족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들자 일제는 복수의 일념으로 이 집 가운데로 떡 하니 철길을 놓는 비열함을 저질렀다. 지금 남아 있는 집도 원래의 절반인 50여 칸 수준이다.

이후 석주 선생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집까지 내놓았고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에도 그 후손들이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임청각은 오랜 세월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2017년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 언급한 데 이어, 지난 16일 마지막 무궁화호 열차가 운행을 마침에 따라 임청각은 뒤늦게나마 제 모습을 찾게 됐다. 

앞으로 문화재청과 경상북도, 안동시가 손을 맞잡고 2025년까지 280억원을 들여 임청각과 주변 가옥까지 복구할 예정이다.

보물 제182호 안동 임청각 (安東 臨淸閣).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53 (법흥동) 소재. / 사진=문화재청 
보물 제182호 안동 임청각 (安東 臨淸閣).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53 (법흥동) 소재. / 사진=문화재청 

“자주독립을 이루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리”
때는 1911년 1월 7일 세한(歲寒)의 아침. 이상룡 선생은 “조국의 산하가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이미 오십대 중반에 이른 나이에다 당시까지 안동 최대 부호집안의 어른이던 그였다. 

그가 결심하게 된 데는 1907년 안창호 선생이 발의하여 창립한 신민회의 영향이 컸다. 애국계몽운동으로 시작한 신민회는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합하자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깨닫고 국외에 군사기지를 세워 무력으로 일제를 물리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먼저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선생이 만주로 향했다. 특히 이회영은 전 재산을 처분하고 가족과 노비까지 포함해 집안 전체가 이주했다. 

이를 전해 들은 이상룡이 그들과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이미 1908년 말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에 취임하여 애국강연회를 열다 일제에 체포되는 등 자강운동에 앞장서던 그였다. 

선생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자신의 재산을 전달한 뒤, 노비 문서를 불태워 그들이 양민으로 살아가도록 배려한 다음 1월 7일 먼저 북행길에 나섰다. 이어 온 가족들이 뒤를 따르기로 했으나 일제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아들 이준형이 끌려가기도 했다.

이상룡은 먼저 서울로 가서 신민회 간부 양기탁의 집에 머물며 정세를 전해 들은 뒤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서 뒤따라 온 가족들과 해후했다. 마침 며느리가 산통을 앓았는데, “일제가 지배하는 곳에서 우리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며 걸음을 재촉하여 압록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상룡 일행이 도착한 서간도(西間島)의 바람과 추위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고 황량한 들판이 끝을 모르게 이어졌다. 일행은 수레 위에서 밤을 지새우며 열흘을 걸어 회인현 항도천에 이르렀다. 

다시 200리를 더 걸어 애초 목적지인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이르자 이회영 형제와 독립운동 가족들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겨울을 넘겨 봄볕이 드는 4월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첫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는데 임시 의장에 이동녕이 자치기관인 경학사의 사장에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임청각 내 군자정 전경. / 사진=문화재청
임청각 내 군자정 전경. / 사진=문화재청

전재산 팔고 황무지 개간해 군사학교 설립
황무지를 개간하고 부설기관을 지어 인재를 양성하는 등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이국땅에서 고초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당장 농사짓기가 어려웠고 자금을 모으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 선생은 임청각을 비롯한 전 재산을 팔아 보탰다. 경학사가 부민단으로, 다시 한족회로 개편되는 우여곡절 끝에 군사지휘본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했다.

1919년 2월 이상룡을 비롯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각 지역 나아가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그 직후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고 그와 함께 한반도 전역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이 중국 주요 도시로 확산하자 삼원보에 모인 지도자들은 한족회 산하에 서로군정서를 설립했다. 그 지도자인 독판으로 선출된 이상룡은 그해 5월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해 국내 침공작전에 대비했다. 

서로군정서는 다음 해에 국내 진공을 시작해 유격대 체제로 압록강 너머 일제 파출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으며 8월에는 2천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보복에 나선 일제는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보이는 조선인을 모조리 죽이는 것으로 대응했으며 이상룡을 비롯한 운동 지휘부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석주 이상룡 선생. / 사진=위키백과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석주 이상룡 선생. / 사진=위키백과

“내 유골은 해방된 고국땅에 묻어다오”
1922년 만주 일대 독립운동 조직이 하나둘 연결되어 통합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결은 잠시뿐, 이내 주도권 다툼과 사상투쟁이 일어나 조직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이상룡이 공식 직책에서 모두 물러난 것도 이 시기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는 등 진통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1925년 9월, 임시정부는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시한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임했다. 

박은식은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임정을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꾸었는데, 그 초대 국무령에 이상룡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상룡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봉합되지 않아, 이듬해 이상룡은 직을 내놓고 남만주의 가족 곁으로 돌아갔다. 

거기서도 그는 국민부를 결성하는 등 독립을 향한 끈을 놓지 않았지만 이미 대륙 중국을 넘보게 된 일제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일제가 중국을 협박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 색출에 열을 올리면서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던 이상룡은 결국 몸져눕고 말았다. 

1932년 5월 12일 이상룡은 지린성(吉林省) 서란 소성자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가족과 자녀들이 모두 비슷한 고초를 겪어야 했으나 해방이 되었어도 그들에게 이렇다 할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1990년 9월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대전 국립묘지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1996년 5월 국립 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임청각이 복원을 시작한다니 이제나마 이곳에 들러 이상룡 선생과 그를 따른 가족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절할 면목이 생긴 듯하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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