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본문영역

[이종원 장편소설 '붕어빵' ] 5화. 그가 시인으로 오해받다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1.01.11 17: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는 붕어빵 틀을 차례로 열어 잘 익은 붕어빵을 꺼냈다. 그리고 붕어빵들이 식지 않게 틀 옆의 따뜻한 면에 가지런히 세워 놓았다. 주전자를 들어 틀에 새 반죽을 부어 넣는데, 문득 지난 토요일 밤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는 기억을 떨쳐 버리고 싶다는 듯 고개를 빠른 속도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날도 그는 어김없이 지구대에서 걸레질을 하느라 바빴다. 그때 저쪽 구석에 앉아있던 무전취식 피의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엉망으로 취해서 옆자리에 늘어져 있던 취객이 요란한 우웨에엑 소리와 함께 우리 동네 지킴이 아저씨의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른 것이다.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각종 도구를 챙겨서 사고 현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토사물과 더불어 다른 종류의 냄새가 강하게 그의 코를 자극했다.

‘토하면서 거의 동시에 똥오줌을 같이 싸다니, 대단한 능력이군.’

이정도 상황에서는 거의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도 약간의 변화가 왔다. 그는 잠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다른 진짜 사건들을 수습하느라 바쁜 나머지 이 처참한 현장 수습을 그에게 맡겨버린 지구대 대원들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정작 미안해야 할 당사자는 으어으어어 뭐 이와 유사한 외계어를 웅얼거리며 안면을 몰수한 채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외계인의 명품 셔츠와 벨트는 토사물로 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 지경이 되기 전의 겉모습은 누구보다도 멀쩡한 신사였음에 틀림없었다.

괴로운 회상을 마치고 가볍게 한숨을 휴 하고 내쉰 그의 눈에 흰 여백이 많은 붕어빵 봉지가 발견되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어 종이봉지 위에 글자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뭔가를 쓰는 행위를 통해 잊고 싶은 기억을 털어 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했다.

펜을 멈췄을 때, 그는 낯익은 얼굴이 그가 좋지 않은 기억을 닦아 낸 붕어빵 봉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와! 아저씨 시 쓰세요?”

요즘 거의 매일 나타나다시피 하는 가부키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런데 이번에는 경이로운 표정까지 담아 그를 올려보았다.

“시? 아냐, 그런 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그는 가끔 가부키와 약간의 대화를 하기도 한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와아! 이 시 근사하다.”

소녀는 얼른 붕어빵 봉투를 집어 들고 거기 적힌 글자들을 음미라도 하듯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인간의 육체는 놀랍다

향기로운 음식을 먹고

냄새나는 똥을

창조 한다

동시에

반대방향으로

구역질나는 토사물을

뿜는다

실로 놀랍다

“아저씨, 이 시 저 가져도 되요?”

그는 당황했다.

‘그거 시 아닌데.’

그는 인간의 육체에 이어 이번에는 가부키의 엉뚱한 발상에 놀랐다.

‘얘는 어떻게 이런 낙서를 시라고 생각할까.’

“가져도 되죠? 그치요?”

어이없는 요구를 하며 졸라대는 가부키에게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가부키는 이를 허락의 표시로 이해했다. 제 멋대로.

“우와, 고맙습니다.”

가부키는 마치 삼장법사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을 거느리고 천신만고 끝에 서역에 도착해서 경전을 얻은 그 순간이라도 되는 양, 붕어빵 봉지를 소중히 고이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더니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제가 요즘 시에 관심이 많거든요.”

가부키는 덤으로 받은 붕어빵 한 개를 잊지 않고 챙긴 후, 잠깐 동안 제법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안녕히 계세요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가부키가 다음에 오면 그 낙서는 시가 아니라고 바로잡아줘야 할지 어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부키는 요즘 아주 바쁘다

가부키가 소년을 처음 본 것은 일학년 때였다. 옆 반 친구에게 놀러갔다가 그 운명의 소년을 만난 것이었다.

친구의 옆의 뒤의 뒷자리에서 어떤 밝은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책상 위 한 점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조용히 앉아있는 그 발광체를 본 순간, 가부키는 난생 처음 심장이 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쿵.’

그때부터 가부키는 거의 매 쉬는 시간마다 옆 반 친구를 찾아갔다. 반갑게 맞이하며 조잘대는 친구의 말이 가부키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응 응 하며 건성으로 대답만 했다. 가부키의 모든 감각기관과 의식은 오로지 그 발광체에만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발광체는 가부키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 가부키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이거나, 가끔 눈을 들어 창밖 저 멀리를 멍하니 바라보곤 하는 것이 전부였다.

소년의 눈망울을 보고 가부키는 책에 나오는 ‘우수에 젖은 눈빛’이라는 표현이 어떤 눈빛을 묘사했는지 생생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소년은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가부키는 그 또한 너무나 좋아보였다. 소년과 닮고 싶었다. 가부키가 지금과 같이 가부키의 형상과 닮은꼴이 된 이유는 소년의 흰 얼굴색에 대한 흠모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소년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얼마 전 까지 가부키를 열광하게 만들던 아이돌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소년이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부키는 그 문고리를 부러워하기에 이르렀다. 소년이 쓰는 샤프펜슬, 소년이 메고 있는 백팩, 소년이 들이마시는 공기이고 싶었다.

가부키는 난생 처음 제대로 이성에게 빠졌다. 그 나이에 걸맞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가부키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말 한마디 못 걸고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 때 까지 가부키는 아직은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중학교 일 학년짜리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머릿속에 마음대로 그린 상상의 세계에서 이미 소년과는 동화와 소설에 나오는 모든 장면을 두루 다 함께 한, 이제는 더 이상 가까워지고 말고 할 것 조차 없을 정도의 깊은 사이가 된지 오래이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나누어 본적도 없는 전혀 남남일 뿐이었다.

혼자 꾸는 몽상의 맛은 달콤했지만, 꿈에서 깨어난 순간의 느낌은 그 달콤함에 비례해서 씁쓸했다. 가부키는 인생의 쓴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소년과 마주서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 소년을 눈에서 떼어낼 수 없었던 가부키는 마침내 자기도 모르게 하교 길에 소년을 따라가기에 이르렀다.

‘내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거지?’

무턱대고 소년을 쫓아 길을 가던 가부키는, 자신이 낯선 곳에 있음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쟤네 집이라도 알아 놔야지.’

어디에 사는지 알면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억지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소년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민첩하게 담장 모퉁이와 전봇대 등등에 몸을 숨겨 가며 드디어 집 앞까지 따라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부키는 집을 알아낸 것이 소년에게 접근하는 데에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그 집 초인종을 눌러 소년을 불러내거나 집 안으로 뛰어들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두 뭐, 아무것도 모르는 것 보다 집이라도 아는 게 낫지.’

가부키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결국 일학년이 끝날 때 까지 가부키의 안타까운 짝사랑은 단 한 뼘도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을 지나치게 한탄한 나머지 가부키는 공부를 포함하여 매사에 자신감도, 의욕도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이런 가부키의 일편단심을 불쌍히 여겨, 드디어 이학년 때에는 소년과 가부키를 같은 반으로 배정해 주셨다. 가부키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신 그 위대한 어떤 존재에게 진지하게 감사기도를 드렸다.

‘감사하옵나이다.’

그리고 단호한 마음으로 새 학년의 목표를 세웠다. 이대로 또 한 해를 허송세월 할 수는 없었다.

「올해의 목표 : 소년을 반드시 나의 남친으로 만들고야 만다.」

문제는, 이 소년은 말이 거의 없고 늘 혼자였으며, 그런 탓에 그에 대해 애들이 아는 바도 전혀 없었고, 따라서 주변 친구를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기도 어렵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방법에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지난 경험을 통해 가부키는 머뭇거리고 애만 태운다 한들 그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남의 힘을 빌거나 도움을 얻는 것은 그저 사용가능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결국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문제에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다.

‘용기가 필요하다.’

가부키는 단단히 용기를 내고 결심을 굳게 다졌다. 거울을 마주 보고 그 안의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정면으로 부딪치자.’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 부끄러워하거나 애태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무기력한 소녀는 어디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과감하고 적극적이고 씩씩하고 자신감 충만한 소녀가 거울 안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

이제 가부키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소년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는 자신이,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후 서서히 다가가는 표범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가부키에게 드디어 너무나도 중요한 장면이 목격 되었다. 그날은 소풍날 이었다. 그저 그런 별로 재미없는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 모두는 집을 향해 출발 했다. 다른 애와 나란히 걸으면서도 줄곧 레이더망에서 소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던 가부키는 소년이 붕어빵을 파는 손수레 앞에서 멈춘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붕어빵을 한 봉지 샀다. 하나를 꺼내 잠시 바라보더니,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옳거니.’

그간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과는 달리 소년은 입이 아주 짧았다. 점심시간에도 깨작거리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그렇다고 매점에 가서 뭘 사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웠다. 그런 아이가 방금 산 붕어빵 한 봉지를 걸어가면서 순식간에 해치우는 것이었다.

‘드디어 너와 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했도다.’

가부키는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벅찬 가슴으로 등교한 가부키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기가 막힌 현실에 부딪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교 매점에서는 붕어빵을 팔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1,2 교시를 낙담 속에서 혼수상태로 보낸 후, 가부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가부키는 무릎을 탁 쳤다. 점심시간에 식당으로 가는 대신 가부키는 비장한 표정으로 지갑을 움켜쥐고 학교건물 뒤편, 담장이 비교적 낮고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지점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다시 교실로 되돌아온 가부키의 손에는 종이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너, 이거 먹어.”

운동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있는 다른 사내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소년은 제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소년은 가부키가 불쑥 봉지를 내밀자 흠칫 놀랐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이봉지와 가부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부키가 봉지를 열어 그 안에 있는 붕어빵을 하나 꺼냈다. 아직 따뜻했다.

“붕어빵 좋아하지?”

소년이 천천히 손을 내밀어 붕어빵을 받아들었다. 붕어빵을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이 참으로 묘했다.

‘붕어빵을 보고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나?’

가부키는 약간 의아했다.

하지만 곧 소년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를 발견한 가부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소년이 붕어빵을 한 입 베어 물자 가부키의 미소는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 날이 가부키가 붕어빵 아저씨의 비상의약품을 축내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이제 소년과 자연스럽게 마주앉을 수 있게 된 가부키는 하루하루가 꿈결같이 즐거웠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에 취해 지내는 것도 잠시, 가부키는 자신은 열심히 담치기를 해서 붕어빵을 공급하고 소년은 맛있게 먹는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붕어빵을 맛있게 먹고 난 소년은 빙긋 한번 미소를 짓고 나서는 다시 침묵 모드로 돌아갔던 것이다.

소년의 미소 속에는 언제나 처연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고, 침묵 속에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외로움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소년과 가까운 사이가 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부키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인생살이는 왜 이리도 험난하단 말인가.’

가부키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약간 철학적이 되어 갔다. 이제 전에 비해 용기도 강해지고 자신감도 많이 생기기는 했지만, 인간관계에 관한 철학적 사유에 깊이 빠진 나머지 가부키는 덧없어 보이는 일들에는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 겨를이 없었다.

요즘과 같은 급변하는 세상에 곧 바뀔지도 모를 전국 각 지역의 산업지도 외우기 따위의 시험공부라든가, 휴식과 사색 혹은 가까운 주위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과 정을 나누기에도 모자란 짧은 저녁 시간에 학원에 쳐 박혀서 선행학습 따위로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을 허망하게 날려버리는 것 등등의 일들 말이다.

역시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가부키의 청춘사업이 더욱 번창할 수 있도록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부키가 붕어빵 봉지를 들고 소년의 자리로 갔을 때, 책상 위에 펼쳐진 그의 공책에 뭔가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 이거 뭐야. 시 썼니?”

가부키가 공책을 집어 들려고 하자 소년은 순간 제지하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냥 멈추었다. 가부키가 읽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 같았다.

 

붕어빵

건네받은 붕어빵을 살며시 쥐어본다

아직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나는

어렴풋이 떠오르려다

이내 아스라이 사라지는

아지랑이 같은 따뜻한 기억도 쥐어보려 애쓰지만

어쩌면 덧없는 일일지도 몰라

가슴이 시려 진다

따뜻한 붕어빵보다

더 따뜻한 소녀의 마음이 고마워

시린 가슴 잠시 덮어두고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뜨겁고 달콤한 단팥 따라

내 가슴

조금 녹아내리지만

따뜻한 기억은

여전히 희미할 뿐

소녀의 따뜻한 마음으로

시리고 슬픈 가슴을

억지로 달랠 뿐

그래도 여전히 먹먹하기만 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나는

그저 이렇게

하릴 없이 앉아만 있고

소년의 시를 몇 번이나 곱씹어 읽고 난 가부키의 얼굴이 약간 발그레 해졌다. 물론 진한 화장 때문에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거 내 얘기가 들어 있잖아.’

하지만 차마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쑥스러웠다. 그리고 시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기도 좀 어려웠다.

‘왜 가슴이 시릴까. 무슨 추억을 움켜쥐려는 걸까.’

가부키는 소년을 졸랐다.

“야. 이 시 해설 좀 해줘. 무슨 소린지 알 듯 모를 듯 하다구.”

그러나 소년은 가부키에게 옅은 미소를 한번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부키는 집요하게 졸랐지만 소년은 이제 아예 들은 척도 안하고 고개를 돌려 먼 산만 바라보았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서 가부키는 일단 자기 자리로 후퇴했지만 손에는 소년으로부터 낚아챈 그의 공책이 들려 있었다. 거기에는 다른 시도 있었다.

‘오호, 이 시 좀 봐.’

기억

손을 펴면

꼭 움켜쥔 기억이

다시는 닿지 못할 머나먼 곳으로

사라져 버릴까봐

나는

누가 뭐래도

손을 펴지 않았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던

그 말

그 마지막 기억의 작은 조각을

잃어버릴까봐

남몰래

움켜쥔 손을

살그머니 펴보는데

이제

그 조각마저

지쳐버렸나

미소조차

힘겨워 보인다

지금의 나처럼

희미해진 기억만큼

빛바랜 사진

이제 더 이상

움켜쥘 것조차

남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근심에 두려움에

애써 다시 움켜쥔 손도

내쉰 한숨만큼이나

힘이 없는데

 

그리움

그리움은

그리운 이를

그리는 마음

이제는 아스라이 사라져만 가는

옛 기억의 희미한 흔적만

움켜쥔 내 작은 손아귀에

몰래 감추어져 있고

가물거리는 그 모습 떠올리기에

그리는 것 마저

점점 더 힘이 겨워라

이는 그리움인가

그리움보다 더한 무엇인가

아니 이제 그리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

영영 사라져 버리려나

혼란스러움 가눌 수 없어

또 한 밤

울다 지쳐

무너지듯 스러진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가부키는 소년의 속마음이 시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떤 뜻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반복해서 읽었다. 그 시들을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느라 수업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를 다 외우게 되었을 즈음, 가부키는 소년과 가까워질 수 있는 또 다른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그래. 붕어빵은 성공했고, 이제는 시야, 시.’

시를 이해하면 소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더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었다.

며칠 후 가부키는 붕어빵 아저씨의 시를 성공적으로 입수했다. 시를 공부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 이종원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배달원, 청소부, 상점점원, 회사원 그리고 택시운전까지 약 10년간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아이를 기르고 조용하게 지냈다.

30대 초반 쯤에 막연히 이다음에 나이가 들면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세 가지 일 - 수염 기르기, 택시운전, 그리고 책 펴내기를 미국 땅에서 실천에 옮겼다.

2017년 첫 번째 장편소설 ‘용기가 필요하다’에 이어 2019년 4월 두 번째 장편소설 ‘붕어빵’을 발간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