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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롯데, 코로나19 팬데믹 ‘희생양’ 되나

‘5대 그룹 옛말’, 시총 상위권에서 빠져...호텔롯데 상장 불발시 경영권 ‘흔들’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1.27 00:02
  • 수정 2021.02.0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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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신격호 명예회장 고향집의 실내 모습. / 사진=롯데그룹 제공
故 신격호 명예회장 고향집의 실내 모습. / 사진=롯데그룹 제공

국내 대표기업 중의 하나로 꼽히는 롯데그룹의 부진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연말 결산 시가총액 30위 기업에서 롯데 계열사는 한 군데도 들지 못했고 그나마 롯데케미칼만이 30위권에 들었다. 한동안 요란했던 ‘형제의 난’을 승리로 이끌며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을 확립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옛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시총 30위 기업에 롯데 계열사 없어
1월 15일 종가 기준 롯데그룹 시가총액은 2019년 말에 비해 8% 증가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삼성·현대차·SK·LG 4대 시총 증가율 35~85%가량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가 40% 올랐고 현재 코스피가 3000을 넘는 등 국내 증시가 거침없는 활황세임을 고려하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롯데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故 신격호 전 명예회장이 맨손으로 세운 회사다.

신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군 상남면(현 울산시 상동면)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순필의 5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농사일을 거들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1936년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다.

졸업한 뒤 종축장 기수보로 취업했는데 관례에 따라 18세의 나이로 당시 부농 집안의 딸 노순화와 결혼했다. 하지만 처가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부업으로 양털 깎기나 돼지 사육을 했어도 늘 가난에 시달렸다.

참다못한 그는 1941년 열아홉 살 무렵 단돈 83엔을 들고 관부연락선에 올라 현해탄을 건넜다. 이어 도쿄로 가서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며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늦지 않게 우유를 배달하는 그를 미더워하는 사람이 늘면서 얼마 뒤 배달 고용원을 두고 일할 정도가 되었다.

이어 와세다중학 야간부에 편입한 뒤 작가가 되고 싶어 시간을 쪼개가며 헌책방에서 문학 서적을 읽었다. 

그러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져들었는데, 후일 롯데라는 사명이 소설의 여주인공 샤를 로테에서 나왔다. 롯데라는 이름은 인간 신격호에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영혼이 지닌 모든 힘을 남김없이 발휘하게 해준, 그의 말을 빌리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당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징집을 면하고자 이공계인 와세다공업고등학교 야간부 화학과에 입학했는데 그로 인해 문학도의 꿈은 접어야 했다.

1944년 하나미쓰라는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에게서 6만 엔을 빌려 군수용 커팅 오일 공장을 차렸다. 당시 회사원 월급이 100엔 내외이던 시절이니 상당한 액수였는데 공장을 가동하기 직전 미군 폭격에 건물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마침 해방이 되어 조선인들이 대거 귀국길에 올랐지만, 그는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그대로 머물렀다.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1주기 온라인 추모관. / 사진=롯데그룹 제공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1주기 온라인 추모관. / 사진=롯데그룹 제공

故 신격호, 혈혈단신 세운 회사 '5대그룹'에 올려 
1946년 5월 낡은 창고를 얻어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수중에 남은 커팅 오일로 비누와 머리기름인 포마드를 만들었다. 이 제품들이 전후 특수 붐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린 덕에 빚을 청산했는데, 당시 그는 하나미쓰 씨에게 이자로 집 한 채를 사주었다 한다.

이어 미군 폭격으로 건물이 내려앉는 사고를 당했지만, 밑천이 든든한 그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업종을 바꾸어 비누 만들던 기계로 껌을 만들어 팔자 사세가 더 커졌다.

그렇게 해서 1948년 6월 28일 도쿄 변방 신주쿠, 오늘날 일본 최대 번화가지만 당시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를 세웠다.

1952년 신격호는 주인집 딸 다케모리 하쓰코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가정을 얻은 그는 본격적으로 껌 연구에 돌입하는 한편 한국의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동생 신철호(작고, 전 농심 회장)에게 경영수업을 시켜 1959년 국내에 주식회사 롯데를 세웠고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인 1967년 자본금 3000만 원에 직원 500명 규모인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그 사이 초콜릿 사업에 진출한 데 이어 사이다, 아이스크림 등으로 제품 라인을 넓혔고 1973년 롯데리아를 세웠다.

이어 산업 영역을 확장해 호텔롯데, 롯데산업과 롯데상사 및 롯데쇼핑을 설립했고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중화학공업에 진출한 다음 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키고 대흥기획과 롯데물산을 세웠다. 1983년 롯데는 24개 계열사에 2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고 2000년대 들어 국내 5대 재벌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그는 홀수달이면 신격호 회장으로 한국에서 일했고 짝수달이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일했다. 그럴싸한 비서진이나 수행원도 없이 양국을 오간 그의 소탈한 경영 스타일이 자녀들에게도 대물림되었다는 것이 주위 증언이다.

초기에는 일본롯데가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었지만 지금은 한국롯데가 일본롯데를 압도한다. 다만 그 배경에 롯데가 다른 재벌에 비해 유독 많은 부동산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문제였다.

신 회장은 일본에서 장기간 부동산 매입에 열중해 1970년대에 이미 현 시세로 1조 원이 넘는 부를 챙겼다. 그는 한국도 일본과 같은 성장 궤적을 그릴 것이라 보아 선제적으로 국내 부동산 투자에 임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 본업보다 호텔, 백화점, 유통과 관련된 부동산 매입으로 부를 키워 ‘재계 부동산 서열 1위’가 되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었다.

2010년 들어 신격호 총괄회장의 노환으로 롯데에 경영 공백 우려가 커졌다. 후계구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가운데 2015년 들어 경영권을 둘러싼 두 아들 사이의 분쟁이 세간에 불거져 나왔으니 이른바 ‘롯데가 형제의 난’이다.

둘 다 일본 태생으로 형인 동주는 당시 아오야마(靑山) 학원을 나와 일본 미쓰비시 상사에서 10년을 일하다 87년 한국롯데에 입사했고 일본롯데 부사장을 지냈다.

동생인 동빈은 형과 같은 아오야마 학원을 나온 뒤 일본 노무라 증권에서 8년을 일하고 1988년 일본롯데상사 이사로 재직했다. 이어 한국으로 건너와 19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일하다 1997년 한국롯데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2011년 회장에 취임했다.

동생이 롯데 경영에 긴밀하게 결합한 셈이지만 형은 롯데그룹의 지주사격인 일본 광윤사를 장악하고 있어 둘의 관계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두 사람이 한 치 양보 없는 세 대결을 펼친 결과, 2019년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에 오른 신동빈 회장이 이후 한일 양국을 통틀어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다른 불운도 롯데가에 불어닥쳤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2017년 12월 배임·횡령 혐의로, 이듬해 1월에는 신동빈 회장이 국정농단 사건 뇌물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것. 신 총괄회장은 고령으로 구속을 면했지만, 아들 신 회장은 10개월간 수감되었고 2019년 10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뒤에야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2020년 1월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신동빈 롯데 회장, 고 신격호 명예회장 1주기 헌화신동빈 롯데 회장이 18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 마련된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1주기 제단에 헌화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신동빈 롯데 회장, 고 신격호 명예회장 1주기 헌화
신동빈 롯데 회장이 18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 마련된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1주기 제단에 헌화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절체절명의 과제, ‘코로나19 팬데믹 극복’
그룹 내 주요 직책에서 밀려나 실권은 잃었지만 신동주 전 부회장이 완전히 밀려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일 양국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롯데그룹의 지분 구조 때문이다.

먼저 양국 롯데그룹 계열사 지분을 하나로 엮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호텔롯데(또는 롯데호텔, 이하 호텔롯데)다.

호텔롯데는 일본 롯데홀딩스가 19.07% 최대주주이며 나머지 주요 지분을 일본롯데 투자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신동빈 회장이 4.0%의 지분을 지닌 채 대표이사 회장으로 재직중이며 최대주주는 일본 광윤사로 28.1%, 다음으로 종업원 지주회사가 27.8%의 지분을 보유중이다.

문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이 광윤사(고준샤, 光潤社) 대표이사이자 그 지분 50%+1표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형이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 복귀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롯데홀딩스 종업원 지주회사를 설득할 경우 상황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최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의 보유지분을 정리해 확보한 자금이 무려 9300억 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왔다.

이 자금을 무기로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재진입이나 동생의 지위 상실을 겨냥한 일본 내 소송전에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크고, 이는 동생에게는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동빈 회장에게도 이에 대항할 무기가 있는데 호텔롯데의 상장이 그것이다.

기업집단으로서 롯데는 2020년 1분기 말 현재 롯데지주를 정점으로 총 86개의 계열회사를 보유중이다. 그중 상장사는 10개사, 비상장사는 76개사인데 그룹의 핵심고리인 호텔롯데가 비상장사다.

만일 호텔롯데가 상장되면 주주 구성이 다양해지면서 최대주주인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을 희석할 수 있다. 그 결과 형의 지분을 줄인다면 동생 신동빈 회장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간 롯데호텔은 이를 위한 기반 조성 작업을 치밀하게 추진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호텔롯데의 주 매출원인 호텔과 면세점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이 일이 암초에 부딪히게 됐다. 이미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액만 전년 대비 48% 감소했고 영업적자가 났다. 그밖에 호텔롯데는 자회사인 롯데렌탈의 기업공개(IPO)로 자금을 조달할 계획도 세웠지만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전망이 불투명하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롯데가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며 그룹의 성장과 경영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면 그야말로 비상한 수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 순간 롯데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벽, 절체절명의 암초일 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인지, 연초 신년사에서 신동빈 회장은 “눈앞에 벽이 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함께 벽을 눕혀 도약의 디딤돌로 삼는 한 해를 만들자”고 말했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Walls turned sideways are bridges)’는 인권 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롯데가 담대한 혁신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아니면 코로나19의 또다른 희생양이 될지, 재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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