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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말한다-7] 인간 공자의 삶과 논어의 탄생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2.17 02:59
  • 수정 2021.02.2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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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공자, 난세를 살다’리숴 저, 박희선 역, 메디치미디어 간, 672쪽.
인간 공자, 난세를 살다
리숴 저, 박희선 역, 메디치미디어 간, 672쪽.

기질을 발휘하여 부친의 가계에 들어가다

공자(孔子)의 출생과 성장사는 극적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곡부 근교에서 “아버지 공흘과 어머니 안씨의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고 사기에 적었다. 기원전 551년, 지금으로부터 2572년 전 고대 사회에는 이런 일이 흔했다. 글자 그대로의 뜻이라기보다 정식 혼인을 거치지 않은 관계를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공흘이 아들의 출생을 알지 못한 채 전사했기 때문에 공자는 안씨 성을 갖고 안씨 집성촌에서 유복자로 자랐다. 모친은 눈을 감기 직전, 그의 아비가 천자국 주(周)의 제후로 봉해졌으나 지금은 위세를 잃은 소국 송나라 군주 가문의 후예이며, 노나라의 소귀족 출신임을 밝혔다. 그의 나이 15세 때 일이다.

공자는 어릴 때 장례 치르는 모습을 곧잘 흉내 냈는데, 이 능력을 이용해 모친의 무덤을 도성 근처 대로변에 안치하고 소리 내어 곡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물으면 자신의 내력을 밝히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어머니를 합장해 드리려 한다 답했다.

공흘의 가족들이 소문을 듣게 되어 그를 공씨 가문에 입적, 안구(顔丘) 대신 공구(孔丘)라는 이름을 주었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논어 위정편)는 공자의 말이 여기서 비롯한다.

논어에서 공자가 “나는 아랫사람의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배경을 알면 이해된다. 어린 시절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없었던 공자가 빠르게 경지에 오른 것은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배우고자 했던 그의 천성에 기인한 듯하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말도 이런 경험을 짐작게 한다.

노나라 귀족 가문에서 일하며 제자를 받다

공자는 만학도이지만 타고난 영민함으로 학문을 깨쳐 스물이 되자 주위에 소문이 났다. 가계가 풍족하지 못한 탓에 공자는 이렇게 얻은 지식으로 노나라 호족 가문인 계손씨 집안에서 하급 관리직을 얻었다.

당시 노나라는 공(公)이라 불리는 군주의 힘이 약한 대신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의 이른바 삼환 가문이 대대로 전횡하던 터라 공자는 안정된 직장을 얻은 셈이다.

게다가 공자는 일찍부터 관혼상제에 친숙해 점차 이 일까지 맡았고, 이에 서른 살이 되자 수신제가를 이루면서 세상으로 나아갈 꿈을 꾸게 되었다.

논어에서 공자가 “삼십에 이립했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한다.

당장 공자는 사숙을 열어 제자를 받았다. 그를 잘 아는 안씨 마을 친척들과 그 아이들이 배우러 왔다. 공자의 친척이면서 일곱 살 어린 안로(顔路)가 최초의 제자 중 하나이며, 유명한 안회(顔淵, 回)는 그의 아들이다.

논어 선진편에 안회가 죽자 안로가 공자에게 그의 마차를 팔아 관을 사달라고 부탁했는데, 공자가 “내 아들 이(鯉)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며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학비를 받아 수입을 늘리려고 시작한 사숙이 공자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그가 평생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아 제자는 계속 불어났다. 교육 체계가 열악한 춘추 시대에 이는 비교를 불허하는 인재 집단이 되었고, 그로써 형성된 공문(孔門)의 위세는 제자백가의 으뜸이었다.

공자는 34세가 되어 계손씨 일을 접고 맹손씨 가문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이 시절 공자는 주나라 왕도 낙양을 방문하는데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경험이었다.

일찍이 주나라는 은을 멸망시킨 뒤 천자의 지위에 올라 많은 왕족과 신하를 제후에 봉하며 팔백 년 장구한 세월 대륙의 고대 봉건 체제를 이끌었다.

후일 내전으로 서주가 망하자 주 평왕이 낙양으로 천도하여 동주 시대를 열었는데, 이후 주가 쇠퇴하여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천자국의 지위는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봉건 제후국들이 모두 주나라의 유서 깊은 문물과 예법을 따랐으니, 공자에게는 귀중한 산 경험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의 중국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의 중국. 위키백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전에 휘말려 망명하다

주나라가 봉건 제후국을 만든 이래 대부분의 군주들은 귀족 과두체제에 의지해 통치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점차 군주와 과두의 갈등이 정치의 핵심이 되고 말았다.

노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낙양에 다녀온 지 1년 뒤 공자가 군주인 노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타의지만 그 스스로 춘추 시대 과두 정치에 뛰어든 일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로써 공자는 자신의 학문을 하나의 통치 사상으로 가다듬을 계기를 얻게 된다.

이후 30여 년에 걸쳐 공자의 삶은 정치와 학문의 긴밀한 경계선 위로 펼쳐졌으며 파란만장한 주유천하와 풍찬노숙의 행보로 이어졌다.

40세까지는 제나라에서 기회를 엿보며 지냈는데,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을 한 때가 이 무렵이다. 제경공이 정치의 요체를 묻자, 노소공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상황 인식을 담아 말한 것이다.

녹록치 않은 망명 생활을 접고 노나라로 간신히 돌아간 공자는 크게 결심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정치적 곤혹을 겪지 않았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기존 질서의 벽에 막힌 ‘성인과 군자의 나라’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공자가 생각한 이상향은 천자가 실권을 쥐고 예악과 상벌을 결정하며 귀족과 평민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성인과 군자의 나라다.

하지만 춘추 시대에는 그것이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 혹여 자신의 노력으로 이를 바꾸어볼 수 있을까 하여 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대부분 허사였다. 고국에서 법무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르며 일부 성과도 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귀족 과두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과두 가문 출신이 아닌 그가 기존 지배질서에 끼어들기는 애초 무리였다. 위, 조, 송, 정, 진, 채, 초 등 주요 제후국을 두루 다니며 때로 고관으로 발탁되고 때로 추문에 휩싸이고 심지어 ‘상갓집 개’라 불리는 수모까지 당하면서 그가 확인한 사실이다.

대신 공자는 작은 사숙에서 출발, 고대 중국을 통틀어 비근한 예를 찾기 힘든 거대 민영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전성기의 공자 사숙은 핵심 제자만 72명이고 그 아래 수십 명이 포진하여 적게는 3천 많게는 5천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당시 노나라 인구가 30~50만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온 천하가 보지 않고도 공자의 명성을 알게 되었고, 제후국들이 저마다 공자의 제자를 받아들였으니, 논어 공야장편에서 노나라 대부 맹무백(孟武伯)이 물었던 자로·염유나 제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자공(子貢)은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자는 만년에도 직접 제자를 받은 뒤 그들의 수준에 따라 여러 수제자들에게 맡겼다. 교육 내용이 글쓰기 정도에서 높은 수준의 고전에 이르기까지, 마차 모는 법에서 악기 연주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고 방대하며 체계적이서 어느 시점이 되자 다른 어떤 학파의 사숙도 이를 모방할 수 없었다.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공자 상 / 사진=위키백과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공자 상 / 사진=위키백과

공자가 제자에 따라 인(仁)을 달리 설명한 이유

공자의 교육 가운데 가장 특출한 점은 대화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각자의 처지에 맞는 답을 주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먼저 잇속이니 천명이니 인이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子罕 言利 與命 與仁).

대신 그는 제자와 상대에 따라 그 뜻을 달리 표현했다. 가령 논어에서 인(仁)과 관련된 공자와 제자의 대화들을 일부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사욕을 억누르고 예법대로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克己復禮).

- 중궁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하고 답했다(己所不欲 勿施於人).

- 사마우가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사람다운 이는 말을 더듬거리는 법이다. 실행이란 힘든 것인데 말을 안 더듬을 수 있겠느냐” 하고 답했다(其言也訒 爲之難 言之得).

- 자장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공손함(恭), 너그러움(寬), 미더움(信), 민첩함(敏), 은혜로움(惠) 이 다섯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공손하면 업신여기지 않고, 너그러우면 사람들이 따르고, 미더우면 일거리를 얻고, 민첩하면 공을 세우며, 인정이 있어 은혜로우면 사람을 잘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어려운 일은 자신이 맡고 이익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다”라고 답했다(先難 而後獲 可謂仁矣).

- 다른 곳에서 번지가 인(仁)에 대하여 다시 묻자 공자는 “남을 사랑하는 일이다”라고 답하고(愛人), 번지가 재차 물으니 “집안에서는 공손하고, 일 처리는 반듯하게 하고, 진정으로 남과 사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居處 恭 執事敬 與 人忠).

번지는 공자에게 곡식과 채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타박 맞은 인물이다. 그가 동료들을 잘 따라가지 못하니 자세하게 일러준 것이다.

반면 국가의 중책을 맡은 자공이 인(仁)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공인이 제 구실을 잘하려면 먼저 연장을 예리하게 벼려야 한다. 어떤 나라에서 일할 때는 그 나라 대부 중에 현명한 이를 섬기고, 그 나라 선비 가운데 인(仁)을 갖춘 이를 벗삼아야 한다.”(子貢問爲仁 子曰 工 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

이미 학문이 경지에 오른 자공에게 굳이 인을 설명할 필요가 없으나, 다만 고위 관료로서 그가 취해야 할 자세를 당부한 것이다.

그러한 자공에게도 인의 핵심을 강조하는 일은 잊지 않았다. 자공이 평생 지켜야 할 한 마디를 청하자 공자는 “그것은 서(恕, 미루어 생각하는 것)라며, 중궁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하고 답했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이처럼 공자가 묻는 제자마다 다른 답을 준 이유는 그 시점에서 당사자의 문제해결에 필요한 방안을 제시하려 함이니, 이 점이야말로 제자들이 진심으로 스승을 따른 이유라 할 것이다.

제자를 기르고 경전을 엮어 후세를 기약하다

공자는 자신이 비록 인(仁)을 따른다 하여 세상을 뜻대로 바꿀 수 없음을, 30여 년에 걸친 주유 천하를 통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와 관련, 공자는 고대 은나라에 “세 분의 인자가 있었다”면서 “미자(微子)는 떠나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고 비간(比干)은 간하다 죽었다”고 말했다.

은 주왕의 폭정에 맞서 각자의 입장에서 사람의 도리를 다 했다는 뜻이지만, 달리 보면 이는 주어진 신분으로는 천하를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담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공자는 대신 60대 초반부터 각국의 고대 문헌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에 매달렸는데, 이후 10년에 걸쳐 애쓴 결과 시경, 춘추, 주역 등의 6경(經)을 펴냈다.

이 6경이야말로 후일 공자의 제자들이 대대로 뭉칠 수 있었던 이론적이고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토대이자, 오늘날 유가 사상이라 불리는 공자 학문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노나라 애공 11년인 기원전 484년, 권력을 장악한 계강자가 사람을 보내 국사로 맞아들임으로써 공자는 생의 마지막 6년을 고국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인간 공자, 난세를 살다’의 필자에 따르면 위에 나온 ‘극기복례’는 실은 공자가 안회에게 매우 상세히 설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논어에서는 이와 관련, 공자가 “언젠가 극기복례를 이루게 된다면 천하가 인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귀국한 지 3년째에 아들 리를 보내고 이어 애제자 안회마저 저세상으로 보내면서 공자는 천하에 인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꿈을 영영 접었다.

설상가상으로 3년 뒤 위나라 가주 공회의 대신이던 애제자 자로마저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시신이 장으로 담가졌다는 그의 처참한 소식이 전해진 뒤 공자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해 4월 노나라 재상으로 지내던 제자 자공의 문안을 받은 지 일주일만에 눈을 감았다.

공자 사후 자공은 위와 노 두 나라 재상을 거치며 공자 문중에 닥친 여러 위기를 극복, 스승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자공이 동문수학한 증점의 아들 삼을 월나라에 추천한 일이 있는데, 관직을 맡으러 갔다 곧 돌아온 증삼(曾參)은 당시까지 생존한 제자들과 힘을 합쳐 공자가 평생 남긴 말을 모아 정리하는 일에 매진했으니, 그로써 논어가 탄생했다.

논어 선진편에 공자가 “증삼은 미련하다(參也魯)”고 평한 대목이 나온다. 두 사람의 나이차가 46살이나 되니 이는 애정의 표현일 수 있는데, 다만 증자는 그 말처럼 어리석을 정도로 성실하게, 술이부작(述而不作)하지 않고 스승의 언행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이런 이유에서 논어는 교조를 벗어나 살아 숨 쉬는 인간 공자의 어록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의 편찬에 증삼의 공이 크므로 다른 제자들은 이름 혹은 자로 기록되지만 그는 특별히 증자(曾子)로 기록되었다. 증삼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 자사)을 제자로 거두었는데 그가 중용(中庸)의 저자이다. 공급의 제자로 맹자가 있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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