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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읍참마속‘으로 그치지 않은 이유

“마속의 잘못은 나의 인사 책임”...“허물을 자신에게 돌려 신뢰 회복”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3.30 02:24
  • 수정 2021.04.0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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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인사하는 김상조 전 정책실장대통령비서실 김상조 전 정책실장이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퇴임 인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퇴임 인사하는 김상조 전 정책실장
대통령비서실 김상조 전 정책실장이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퇴임 인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공직자가 사적인 인연에 얽매여 부하의 잘못을 눈감다 대중의 불신에 직면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공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종종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인용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부하 직원의 잘못은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그 통솔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어서, 이 고사는 종종 매우 그럴듯한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제갈량, 승상의 직분으로 황제의 후견인이 되다

중국 후한말 군웅이 할거하던 시절, 조조가 북방에서 한 헌제를 사로잡고 최대 경쟁자인 원소를 없애 중원의 패자로 군림했으니 때는 207년이다.

그해 조조에게 쫓겨 한 치 땅도 없이 변방 익주로 달아난 유비는 삼고초려한 끝에 제갈량을 얻고 재기를 모색했다.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익주에 자리를 잡은 뒤 촉-오 동맹을 성사시켜 남하하는 조조군을 적벽에서 대파한다. 이에 유비는 서천 땅을 장악한 데 이어 유장(劉璋)에게서 익주를 인수하여 촉한의 기틀을 세운다.

216년 조조가 스스로 위왕(魏王)이라 칭하자 3년 뒤 유비 역시 한중왕(漢中王)에 올라 이로써 3국이 솥발처럼 정립한다. 하지만 제위에 오른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갚고자 오를 침공해 이릉의 전투가 벌어졌고 육손(陸遜)의 화공전술에 유비군은 괴멸당하고 만다.

상심한 유비는 이듬해 223년 백제성(白帝城)에서 운명한다. 임종(臨終)에 이르러 유비는 제갈량과 이엄을 불러들였고, 아들 유선에게는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모시라 하고 제갈량에게는 아들을 대리한 통치와 한 왕실의 재건을 당부한 뒤 눈을 감는다.

승상의 직분으로 황제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니, 중국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기 힘든 탁고(托孤)다. 제갈량은 심지어 이후 오장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11년간 흔들림 없이 촉한을 사실상 통치했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제갈량은 먼저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생산을 늘려 촉한을 안정시켰다. 이어 225년 남방의 잔적을 소탕하니 칠종칠금의 고사로 유명한 만왕 맹획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이 무렵이다.

이듬해 위 황제를 칭한 조비가 병사하고 조예(曹睿)가 뒤를 잇자 제갈량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227년 말 제갈량은 유명한 출사표를 올렸고, 해를 넘긴 봄 1차 북벌에 올랐다. 제갈량이 출사표에 “나라의 위기에 직면해 명을 행한 지가 이미 21년이나 되었다”고 적었을 정도로, 당시 그의 말 한마디에 조정과 군사가 한 치 빈틈없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친히 20만 대군을 통솔하며 북벌에 나선 제갈량은 “적을 속여 허를 찌른다”는 계획 아래 대담한 전략을 짰다.

첫째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쪽은 조자룡과 등지에게 맡겨 먼저 기곡(현 산시성 타이바이현)으로 진공하게 했다.

이 군대는 적의 눈을 속이는 이른바 의병(疑兵)이다. 제갈량이 예상한 대로 위의 조예는 대장군 조진을 선봉으로 하는 주력군을 파견해 함곡관(函穀關) 서쪽에서 치고 들어가게 했다.

진수가 ‘삼국지’에서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군은 강해서 기곡에서 패했다”라고 쓴 내막이 이것이다. 당시 조자룡이 패퇴를 거듭하여 100여 리에 이어진 잔도(棧道)를 불태워 파괴했다고 하나 촉의 군사는 전혀 상하지 않았다.

둘째 제갈량은 자신이 인솔하는 다른 한 갈래의 병력을 훨씬 북방인 기산으로 출병시켰는데 실은 이 군대가 진짜 주력군이었다. 기산에 주둔한 제갈량은 그 진로인 가정을 막아선 위의 우장군 장합의 군대를 격파한 뒤 얼마 전 위에서 투항한 강유로부터 길안내를 받아 조위의 수도 낙양까지 짓쳐 내려갈 계획이었다.

‘마속의 실수‘로 사라진, 한 왕실 재건의 꿈

촉한의 대군이 기산에 다다랐을 때 가정 가까이 주둔한 장합의 병사는 5만으로 촉군에 비해 절반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조위를 정복하는 일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기산에서 가정으로 출병한 선봉대를 지휘한 마속(馬謖, 190~228)이다. 마속은 삼국지에서 이민족 마씨 오형제로 유명한, 마량 형제의 막내로 매우 총명했고 군사 전략에 능통했다.

흰 눈썹(白眉)으로 유명한 마량은 출중한 무예를 지닌 데다 촉 주변 이민족들을 대거 귀순시켜 유비가 서천에 자리 잡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이릉 전투에서 전사했다. 마속은 제갈량에게 ‘절세의 책사’라는 말을 들었지만 마찬가지로 요절한, 방통과 동향이기도 하다.

마속은 약관의 나이에 현령과 태수를 거쳐 걸출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제갈량을 따라 남만정벌에 나서 지략을 발휘했고, 군사전략을 논하면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게다가 참군(參軍)으로 일하면서 거짓소문을 흘려 위의 표기대장군 사마의를 한때 물러나게 만들어 제갈량의 총애가 대단했다.

하지만 마속은 대군을 직접 움직인 적이 없어 제갈량은 그가 실수할 것을 염려해 장군 왕평(王平)을 비장으로 삼아 매사 함께 상의해 처리하라 했다.

그런데 마속은 기산 입구인 가정, 지금의 간쑤의 촹랑현(莊浪縣)에 이르러 위병의 포위가 염려된다는 왕평의 조언을 무시하고 산 위에 진을 쳤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마속이 “높은데 기대서 아래를 보니 형세가 대를 쪼개는 것 같다(憑高視下 勢如劈竹)“고 으스댄 장면이 이를 말한다.

결국 사마의의 명을 받은 장합이 급히 왕평의 부대를 가로막고 산을 포위해 퇴로를 끊어 버리니 마속의 군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 궤멸당하고 말았다.

마속은 가정을 뺏기고 정예군을 대부분 잃은 채 목숨만 부지해 탈출하였고 “오직 왕평이 인솔하는 1천 명만이 북을 울리며 스스로 굳게 지켰는데, 장합이 복병을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아” 그 병사들만 무사히 퇴각했다.

그로써 촉군의 예봉이 꺾이니 제갈량은 “대사거의(大事去矣)” 한 마디를 내뱉고는 철군을 명하게 되었다. 혹자는 마속이 산에 진을 치고 보급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고도 하지만 어느 쪽으로 보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속으로 인해 전군이 위험에 처한 제갈량은 간신히 군사를 물려 촉한 성도로 귀환했고, 이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울며 마속의 목을 쳤다는 이야기다.

마속은 비록 교만했어도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알았다. 배송지는 ‘진수 삼국지’에 마속이 죽음에 이르러 쓴 편지를 주석으로 추가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공은 저를 자식처럼 돌보았고 저도 공을 아비처럼 여겼으니 되돌아보면 순임금이 곤(鯀)을 죽이시고 그 아들 우(禹)를 쓰신 의리처럼 깊습니다. 평생의 교분이 여기에서 무너지게 하지 않을 것이며, 제가 비록 죽어 황천에 가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패인은 나 한 사람의 허물에 있다”

마속을 뽑은 것은 분명히 제갈량이 한 일이니 그에게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마속의 참모로 가정 전투에 참가했다 함께 처벌받은 부친을 둔 진수는 ‘삼국지‘ 촉지 마속전에서 “기산으로 출병할 당시 경험이 풍부한 장수 위연과 오일 등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천거했지만 제갈량은 기어이 마속을 뽑았다”며 책망했다.

자신의 과오를 잘 알았던 제갈량은 스스로 승상에서 3등급 아래인 우장군의 직위로 낮추었다.

반면 왕평은 참군의 지위로 올리고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지위를 올려주었다. 이후 231년 제갈량이 5차 북벌에 나서 기산을 포위하자 다시 장합이 쳐들어왔는데, 왕평이 수비를 굳게 하여 제갈량이 무사할 수 있었다.

마속의 처형 문제를 놓고, 후일 제갈량 사후 승상에 오른 참군 장완(蔣琬)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략 있는 인재를 주살하시니 아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자 제갈량은 글을 써 이렇게 답했다.

“손무가 천하를 제압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엄격히 집행했기 때문이다. 지금 천하는 분열되어 있고 북벌은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법과 규율을 폐지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도적을 토벌할 것인가?”

제갈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군에게 교서를 내려, 자신의 과실을 기탄없이 지적할 것을 ‘명령’했다.

교서에서 그는 “우리가 적군에게 패한 것은 그 원인이 나 한 사람에 있다”며, “지금부터 무릇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항상 나의 결점과 잘못을 지적해 준다면 북벌의 대업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승상 제갈량이 군사를 줄인 뒤 과실과 상벌을 분명히 하고 무기를 단련하며 뒷날을 도모하니,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이를 두고 “제갈량이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자 병사들은 간결하게 정련되고 백성들은 그 패배를 잊었다(民忘其敗)”라고 기록했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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