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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의 국토순례 - 경북 내륙을 가다 1

- 경북내륙의 보물, 예천을 걷다.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1.04.10 17:45
  • 수정 2021.04.1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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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송령 나눔을 베푸는 부자 나무 공동체

LH 직원들의 땅 투기와 집값의 고공행진으로 인해 내집 마련의 꿈이 요원해진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는 2021, 1,800여평의 자기 소유의 땅이 있어, 세금도 내고 나눔도 베푸는 나무가 예천에 있다. 부자(富者) 나무, 석송령(石松靈) 이야기이다.

예천군 감천면 석송령
예천군 감천면 석송령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입구에는 700년 수령의 반송(盤松)인 석송령(석평마을의 영험있는 소나무)이 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소나무 숲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한그루의 소나무란 걸 알면 누구나 놀라 저절로 감탄사를 낸다. 높이 10미터에 수폭이 남북 22미터, 동서 32미터에 이르러 그늘 면적만 300평에 이르는 천연기념물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정월대보름 즈음엔 농촌 어느 동네에서나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동신제는 마을의 큰 나무나 숲 등의 자연물을 신성하게 여기고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매년 마을과 주민들의 평안, 번영을 비는 풍습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석평마을 동신제의 대상은 석송령이다.

석송령 -그늘이 넓다
석송령 -그늘이 넓다

석송령은 다소 과장섞어 이야기하면 세계 유일의 토지 소유목이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마을의 이수창(안내판에 의하면 이수목)이 후손의 행방이 묘연해 임종 직전에 본인의 토지를 마을의 영험한 소나무에게 기증을 했고,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뜻을 이어 <석송령>이란 이름을 부여해서 일제강점기에 등기를 했다고 한다, 주민등록이 없던 시절이라 자연인처럼 등기가 가능했고, 이제는 자연인이 아니니 인감증명 발급, 등기이전도 못하니 누구라도 그 재산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유 토지의 일부에서 도지를 받아 공동관리를 하고,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석송령 보존기금도 적립해서 해마다 마을 전체의 화합과 안녕을 비는 동신제도 지낸다.

또한 석송령은 마을 출신 자녀들에게 장학금도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적립한 보호기금에 1985년 당시 대통령이 하사한 석송령 보호기금 500만원을 합해 장학회를 만들고 1986년부터 4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농촌 고령화로 더 이상 동네에 장학금을 줄 학생이 없다고 하니 이도 우리 농촌 현실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나무가 주는 장학금>이 아름다운 이름의 혜택을 받은 학생들은 소중한 나무과 베품의 정신을 이어 갈 것이다.

* 강변에 우뚝 선 아름다운 고려 석탑

개심사지 오층석탑
개심사지 오층석탑

예천읍 남본리, 예천읍을 질러 흐르는 한천의 체육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강변 너른 땅에 우뚝 선 아름다운 석탑을 만나게 된다, 보물 53호 개심사지 오층석탑이다.

고려 현종 1(1010) 건립된 탑으로 상층기단에 14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내용은 현종 1년 건립공사를 시작해 광군사(光軍司)와 육대차(六隊車)와 소 1,000마리 승려와 속인 10,000명이 힘을 모아 다음 해인 101148일 완공했다고 한다.

개심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음을 연다는 의미를 담은 개심사(開心寺)의 터는 예천을 관통하는 한천(漢川) 주변이고, 정확히 언제 어떤 이유로 폐사가 되었는지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강변 가운데 우뚝 선 오층석탑이 있어 이곳이 한때 규모가 당당했던 절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오층석탑에 새겨진 12지신상과 팔부중상
오층석탑에 새겨진 12지신상과 팔부중상

오층석탑은 하층기단에 각 면 3구씩 모두 12구의 십이지상을 조각했고. 상층기단에는 각 면 2구씩 팔부신중을 양각했다. 1층 탑신석에는 남면에 문비(門扉)를 내고 중앙에 자물쇠를 조각하고 좌우에 인왕상을 표현했다. 이 석탑은 고려 초 신라 석탑 양식을 유지하면서 점차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장식성이 매우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라 하대로 오면서 석탑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강화하면서 등장하는 신장상 가운데 십이지신상, 팔부신중상, 인왕상 등 3종류의 도상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특히 상층기단에 새긴 석탑기를 통해 정확한 제작 시기와 탑을 세운 과정과 목적을 알 수 있어 고려 전기 석탑의 기준이 되고 있다.

고려 현종 때는 거란의 침공이 끝난 직후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복구 노력으로 특히 이 시기 제작된 석탑에는 명문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예천 북쪽 월악산 자락 제천의 현종때 세워진 빈신사지 사사자탑처럼 공통적으로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축원하고 있다.

강변의 개심사지와 오층석탑
강변의 개심사지와 오층석탑

해질녘 한천 강변에 서면 석양을 받는 그림자에 대비된, 개심사지 오층석탑과 예천읍내의 풍광이 한폭의 그림처럼 보여진다.

* 강둑을 마주한 보물, 동본리 삼층석탑과 불상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불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불

개심사지를 나와 예천 읍내 한천을 건너면, 강변의 주택 사이로 동번리 삼층석탑과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절터의 정확한 위치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땅에 묻혀있던 석불을 캐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건너편의 개심사지와 마찬가지로 강변의 사찰이 홍수나 어떤 다른 이유로 폐사되었음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보물 427 석조여래입불
보물 426호 동본리삼층석탑
보물 427호 석조여래입불
보물 427호 석조여래입불

보물 426427호인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 역시 장식된 사천왕상이나, 거대한 석조불의 특징으로 신라말기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한복판에 가까운 위치에 있어, 신라 시기 사찰의 입지조건을 추측해보기도 하고, 운동 삼아 강변을 걷는 이들에게 작은 소망을 기원하게도 한다. 이런 보물들을 가까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예천 사람들의 행운이다.

* 무릉도원을 꿈꾼 선비의 초당, 초간정

황장산 자락 물길을 따라 용문면으로 올라가면 계곡 한쪽에 마치 신선이 자연과 벗하고 있는 듯이 자리한 정자가 보인다. 선조 때 권문해의 초간정이다.

초간정 풍광
초간정 풍광

기암괴석 사이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꺾어지듯 흐르는 곳, 노송과 울창한 숲사이의 풍광이 절묘한 초간정은 권문해가 고향 예천에 내려와 지은 초당이다. 원래 이름은 초간정사였다. 이름처럼 처음에는 풍류보다는 주자의 무이정사와 같은 서재의 용도로 지어졌다.

초간 권문해, 역사·지리·인물·문학·동식물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사람이다. 초간본이 간행된 것은 1589년 대구부사로 재임 중일 때였지만, 책의 대부분을 집필은 고향 땅에 지은 초간정사에서 이루어졌다.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虌)도 이 자리에서 해동잡록을 저술하였다.

초간정
초간정

과거를 공부하는 선비들이 초간정의 기운을 받기 위해 필수로 다녀가던 장소였고, 초간정 주위를 100번 돌면 문과에 급제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 유생이 99번을 돌다 현기증이 나서 난간 밖으로 떨어져 죽자 그의 장모가 도끼를 들고 와서 기둥을 찍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초전 권창륜의 편액
초전 권창륜의 편액

처음에 지어졌던 초간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초간정은 1870년 예천 권씨 후손들이 새로 지은 것이다. 입구에서 보면 좌측 정면 2칸은 방을 들였고, 물이 흐르는 계류 쪽은 ㄴ자형으로 마루를 놓고 계자 난간을 둘렀다.

어느 자리에서 보더라도 아름다운 풍광이지만, 특히 마루에 걸터앉아 내다보는 기암괴석과 그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는 절경이다. 그 절경 속에 예천이 나은 대서예가이자 권문해의 후손인 예천 권씨 초정 권창륜의 편액과 글씨는 한층 더 초간정의 내력와 정취를 한층 더 깊게 한다.

* 흐르는 강물이 만들어낸 용의 형상, 육지 속의 섬 회룡포

강물이 굽이쳐 돌아가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물돌이동 하면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안동의 하회마을을 떠올리지만, 같은 낙동강 지류의 하회마을보다 더한 물돌이동이 회룡포이다.

물이 휘어져 돌아나간 정도를 비교하면 하회마을은 버선발, 회룡포는 호박에 비유한다고 한다. 흐르는 강물이 휘돌아쳐서 마치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트림을 하는 듯한 회룡포는 육지속의 섬 마을이다. 산줄기가 태극모양으로 휘감겨 있는 한복판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회룡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모습
회룡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모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회룡포 마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회룡포 마을

건너편 장안사쪽의 회룡포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자연이 그려낸 한폭의 그림이다.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가고, 그 내성천이 좀 더 흘러 낙동강, 금천을 만나 함께 하는 곳이 과거 경북 내륙의 운송중심지였던 삼강나루이다. 문경과 예천 안동이 만나는 곳, 그 삼강의 상류에 회룡포는 자리하고 있다.

내성천을 건너가는 뿅뿅다리
내성천을 건너가는 뿅뿅다리

전망대에서 내려와 강변의 속칭 뿅뿅다리를 건너 만나게 되는 회룡포마을은 너른 백사장과 드라마 가을동화 등 각종 촬영지로도 손꼽히는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조성된 둘레길과 한적한 강변을 따라 걸으면 깊은 산골에라도 와있는 듯, 산과 들, 강이 만드는 한편의 교향악을 듣는 듯, 힐링의 감정을 느끼게도 된다.

회룡포 사계 - 회룡포마을 제공
회룡포 사계 - 회룡포마을 제공

예천지역은 문경과 안동의 사이에 있다. 지형은 소백산, 월악산 자락과 낙동강 사이에 있어 경북내륙의 험지처럼 생각됬지만, KTX 청량리-안동 구간의 개통으로 영주나 안동을 통한 접근성이 더욱 좋아졌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지만 당일 여행은 늘 아쉬움속에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바쁘게 한다. 코로나가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들지만 허락된다면 1박이나 2박의 시간을 보내도 좋을 내륙의 보물,  예천이다.

< 이현진 우문현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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