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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하면 대개 분열하나, 그러면 다시 패할 것이다

다가올 대선을 생각하며 장량(張良)의 혜안을 그리워하다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4.12 00:44
  • 수정 2021.04.1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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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행동거지 천만 가지(行止千萬端)

누가 옳고 그른 것을 알려나(誰知非與是)

-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중에서

한 유휴 장량
한 유후 장량(漢 留侯 張良)

패전한 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 군사학 사상 불후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당연하게도 승전에 주안점을 둔 책이다. 다만 저자는 예외적으로 한 장을 ‘패전’에 할애하여 ‘전투에서 패배한 뒤의 후퇴’를 다루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투에서 패배한 군대의 경우 물리적으로 입는 타격보다 정신적으로 입는 타격이 더 크다는 점을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전투에서 지면 군대의 힘은 꺾인다. 정신적인 힘은 물리적인 힘보다 훨씬 더 많이 꺾인다.” (『전쟁론』, 갈무리, 460쪽)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후퇴’는 이 타격에서 벗어나 다시 적과 맞붙기 위한 필수적인 경로다. 패배한 군대가 후퇴를 모른다면 결코 재기할 수 없으며, 이때 “후퇴는 당연히 힘의 균형이 다시 회복되는 지점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는 나폴레옹의 사례로 이를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1814년 브리엔(Brienne) 전투에서 패배하자 즉각 군대를 둘로 나눠 정 반대 방향으로 후퇴시켰다. 그러자 반불 동맹군 역시 병력을 둘로 나눈 데다 지극히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고 말았다. 

동맹군이 나폴레옹의 도주로에 집중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실수이자 나폴레옹에게 요행이었다. 이와 같은 요행은 전시는 물론, 현실 정치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와 정반대의 상황도 있는데, 패배한 군대가 힘을 회복하지도 않은 채 공격에 나서는 경우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첫 번째 전투 후에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한 군대가 멀리 가지 않아서 다시 전투대형을 갖춘 사례”가 이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지면 그 군대는 완전한 패배와 파멸에 빠질 것”이라면서 “이것이 전쟁의 원리”라고 단정했다.

4·7 보궐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참패로 끝나면서 당 내외에서 다양한 잡음이 일어나는 중이다. 그게 필연적인 후퇴 수순이 아니라 책임 전가와 갑론을박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것처럼 “패배한 군대가 멀리 가지도 않고 다시 전투대형을 갖추려는 시도”와 같다.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번째 전투를 맞이하는 일은 실제 전투나 현실 정치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에서 두 번째 전투가 대선이라는 사실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지적처럼, 전투에서 패배하여 불가피하게 후퇴했다면 무너진 정신력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그 회복을 최대한 빨리 앞당기려면 무엇보다 먼저 지휘관이 ‘독하게’ 나서야 한다. 

한 고조 유방
한 고조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정신력만으로는 패배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중국 한(漢) 고조 유방은 일개 평민 출신으로 서초패왕 항우와 맞서 쟁패를 벌여 숱한 패배를 맛보았다. 그럴 때마다 유방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장졸을 수습하여 단기간에 재기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팽성대전’을 들 수 있다. 기원전 207년 유방은 진나라 함양에 먼저 입성하고도 병력의 열세로 항우에게 잡혀 죽을 뻔하다가 모사 장량의 기지로 겨우 풀려났다. 

서초패왕 항우는 유방을 한중왕에 임명해 험지로 보낸 다음 틈을 보아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를 눈치챈 장량이 “한중에서 중원으로 나오는 천리 잔도를 모두 태워 항우의 의심을 지우도록” 건의했고, 유방이 이에 따르자 항우도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유방은 은밀히 군사를 준비하고 주변 제후국들과 손잡은 뒤 56만 대군을 이끌고 나와, 항우가 자리를 비운 초나라 본거지 팽성(彭城, 현 쉬저우)을 점령했다. 항우가 제나라 성양(城陽, 현 칭다오 근방)에서 발이 묶여 쉽사리 회군할 수 없을 것으로 본 유방은 항우의 진로에 대군을 배치한 뒤 전군을 쉬게 했다. 

하지만 항우는 정예기병 3만으로 방어군의 후방을 돌아 밤새 달려 단잠에 빠진 유방 연합군의 본진을 들이쳤다. 이 전투에서 유방 연합군은 항우군에게 철저하게 도륙당해, 사마천이 사기에 “시체가 수수(睢水)에 밀려들어 강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썼을 정도다. 

항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유방을 집요하게 추적했는데, 독을 품은 유방은 수레가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자신의 두 아이(후일의 태자 유영과 노원공주)를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아이들이 세 번이나 떨어졌는데 부장 하후영이 그때마다 구해낸 뒤, 보다 못해 말했다.
 
“아무리 상황이 위험해도 정신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무고한 아이들을 왜 버립니까?” 

『제왕의 스승 장량』에서 저자 위리는 “당시 유방이 도주하면서 보인 행동은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추악한 행위”(189쪽)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처럼 독했기에 유방이 살아남아 재기할 수 있었던 점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독하기로 말하자면 로마의 전설적인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유방에 뒤지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서양 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한 명으로, 그 무게감이 얼마나 컸던지 근대 독일과 러시아 황제들이 자신의 호칭을 카이사르에서 따왔을 정도다. 

유방에게 패왕의 지위를 놓고 치렀던 기원전 202년의 해하(垓下) 결전이 있었다면, 카이사르에게는 로마 1인자 지위를 놓고 치렀던 기원전 47년 전후의 북아프리카 전쟁이 있었다. 

당시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귀환을 강력하게 반대하며 경쟁자인 폼페이우스군에게 막대한 화력을 지원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보다 몇 배나 많고 강하며 현지 왕국들의 지원까지 받는 폼페이우스-스키피오군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직전의 원정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정복한 카이사르는 그 명성을 앞세워 북아프리카 현지 부족장 상당수를 손쉽게 복속시켰다. 다음으로 그는 “적진을 살펴보기 위해 방벽 위에 오르는 일도 없이 오직 총사령관 막사에만 머물며 명령을 내렸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루비박스, 753쪽) 

한 달간의 숙고 끝에 카이사르는 전격적으로 총공세를 명령하여 스키피오군, 누미디아 왕국군, 게르만과 갈리아 용병으로 구성된 적의 연합부대를 완파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기원전 46년 4월, 전열을 정비한 폼페이우스군과 최후의 대결을 벌인 이른바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역시 ‘장막의 계책’으로 적을 섬멸했다. 

전면전으로 치러진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군의 전사자는 50명에 불과했는데 폼페이우스군 전사자는 1만 명을 넘었다. 

카이사르의 집권을 격렬히 반대하며 공화정을 옹호하던 로마 원로원의 소(小)카토가 패전 소식을 들은 뒤, 집 정원에서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검을 뽑아 자결한 일은 단테의 ‘신곡’에 인용되었을 만큼 유명한 일화다. 

카이사르의 방대한 전기를 펴낸 골즈워디는 “모든 여건이 불리했지만, 카이사르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764쪽)고 적었다. 

그런 카이사르의 ‘타고난 독기’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기원전 77년 무렵, 20대 중반인 카이사르가 배를 타고 소아시아 연안 팔마쿠사 섬을 지나다 해적들에게 나포되었다. 

청년 카이사르는 해적들과 지내면서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채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다녔고, 심지어 잠자는 데 방해된다며 해적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쳤다. 이렇게 38일을 보내자 해적이 카이사르를 인질로 잡은 게 아니라 카이사르가 해적을 경호원으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이어 배가 로마의 속주국에 도착해 카이사르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것으로 사태가 종료될 일이지만 카이사르는 신속히 속주국의 전함과 병사를 모아 팔마쿠사로 돌아가는 해적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해 버렸다. 훗날 카이사르는 “해적들에게 십자가형 대신 목을 찔러 신속히 죽이는 관용을 베풀었다”고 자랑했다.(위 『카이사르』, 128~130쪽)

이처럼 타고난 기질 덕에 카이사르는, 셰익스피어 희곡 ‘맥베스’의 문맥을 빌려 말하면, “넘치는 인정으로 인하여 지름길을 놓치는 경우도 없었고, 야심에 따라붙어야 할 지독함을 잃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한 카이사르조차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한 음모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주는 대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흉상, 기원전 44-30년, 바티칸 박물관 소장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흉상, 기원전 44-30년, 바티칸 박물관 소장

한 명의 지혜가 만명의 군대를 제압하는 이치 
한 고조 유방의 경우, 그는 고비 때마다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겼지만, 그중에서도 유후 장량(留侯 張良, 장자방)의 역할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장량은 원래 진시황에게 망한 한(韓)나라 귀족 출신으로 서초패왕 항우가 진을 멸하고 한의 재건을 허락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재상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항우는 한이 유방에 기울 것을 경계하여 얼마 안 가 한왕을 끌고 가 죽였고, 놀란 장량은 다시 유방에게 돌아가 영영 귀의해 버렸다.

후대에 명나라 이지(李贄)는 이 일을 두고 항우가 천하의 책사를 유방에게 보냈다며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유방의 한(漢)을 위해 훌륭한 군사 한 사람을 내쫓았으니 얼마나 멍청한가?”(『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182쪽)

장량의 진가는 이내 드러났다. 유방이 팽성을 점거했다 전군을 잃고 달아나, 장량을 불러 “말안장도 풀지 않고” 대책을 물었다. 이에 장량은 세 명의 장군에게 각각 영토를 나눠주고 그들과 연합해 대항하라 건의했다. 

사마천이 다음과 같이 적은 장량의 말은 두고두고 인용되는, 계책의 백미다. 

“경포는 초나라의 맹장이지만 항왕과 사이가 나쁘고, 팽월은 양(梁) 땅에서 모반하였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이용해야 합니다. 군왕의 장수 중에는 한신만이 큰일을 맡기면 한 방면을 담당할 수가 있습니다(당시 한신의 부대는 북쪽 제나라 방면에 주둔). 만약 어떤 지역을 떼어 내어 상으로 주고자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주어야만 초나라를 쳐부술 수 있습니다.”(『사기 세가』, 민음사, 835쪽)

적장과 자신의 부하에게 땅을 떼어주라니 지나친 파격에다 성사 여부도 불투명했지만, 유방이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니 전세는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이후 초한전의 고비마다 승리를 끌어낸 장량의 건의는 수를 셀 수가 없다. 

거꾸로 책사를 잘못 쓰면 그보다 큰 화근이 없다. 기원전 204년 유방이 형양에서 항우의 군대에 포위당해 오갈 수가 없게 되자 모사 역이기(酈食其)가 계책을 냈다. “옛날 주 무왕이 은 주왕을 멸할 때 했듯이, 천하 6국의 제후들에게 왕위를 주면 그들이 스스로 귀순하여 항우의 고삐가 절로 풀릴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방이 이를 받아들여 막 시행에 나설 무렵 장량이 득달같이 달려와 만류했다. 장량은 탁자에 있던 젓가락을 하나씩 분지르며 반론을 제기했다. “당장 유방의 군대는 고립무원의 처지인데 제후들에게 봉지를 내린다면 휘하 장수와 병졸들은 고향으로 달아날 것이며, 제후들은 승기를 잡은 초나라 깃발 아래로 몰려갈 것이 분명하니, 이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다. 

유방이 역정을 내며 역이기에 내린 인수(印綬)를 거두어들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후일 천하를 평정한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두고 “군막 속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판내” 자신을 도왔다며 비옥한 제나라 3만 호를 하사하려 했다. 유방이 장량과 더불어 일등공신이라 치켜세운 소하에게 식읍 1만 호를 내린 것과 크게 대비되는 조치였다. 장량은 끝내 사양하여 고향의 작은 고을 유현 2천 호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장량의 혜안은 어디에서 왔을까? 『장량』의 저자 위리는 장량이 일찍이 황석공이라는 기이한 노인을 만나 그에게서 받은 ‘태공병법’을 10년간 연마한 끝에 경지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장량의 탁월함은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주역 계사전에 “건은 천하의 지극히 강함이니 덕행이 항상 수월함으로써 험한 것을 안다(乾 天下之至健也 德行 恒易以知險)” 하고 또 “곤은 천하의 지극히 순함이니 덕행이 항상 간략함으로써 막힌 것을 안다(坤 天下之至順也 德行 恒簡以知阻)” 했다. 

장량은 여러 가지 문제가 엉키면 한 가지 실마리로 풀고, 한 가지 문제가 단단하게 막아서면 가장 약한 지점을 찾고자 했으니, 어떤 경우도 해결하지 못하는 법이 없었다. 사물의 변화를 그 근원에서 밝혀 지극히 조화로운 강직함과 온유함으로 대처할 수 있었기에, 그가 가히 ‘제왕의 스승’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탁월한 지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한 명의 지혜가 가히 만 명의 군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현실 정치에서도 충분히 타당한 지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혜안이 없다면 적어도 패배를 반복해 몰락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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