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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말한다-11] 아프고도 아름다운, ’기억’ 이야기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4.13 14:23
  • 수정 2021.04.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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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문학과지성사.
『충분하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문학과지성사.

[시그널=김선태 기자] 무심코 집어 든 시집에서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여간해선 부정할 수 없는 기억의 본질에 관한 금언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 이야기다. 작가는 생전 ‘시단의 모차르트’라 불리며 폴란드 국민 작가로 추앙받았고 한국에서는 시집 『끝과 시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9년 86세의 고령으로 『여기』를 출간한 뒤 후속 시집 제목을 미리 『충분하다』로 정했지만 3년 뒤 미처 마무리를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2012년 4월에 출간된 이 시집은 시인의 유고집이 되었다. 한국어판에는 『여기』의 시들을 함께 싣고, 육필 원고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본들을 첨부했다.

내 기억에게 나는 쓸모없는 청중이다.
기억은 내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바라지만,
나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헛기침을 하고,
듣다가 안 듣다가,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간다.

때로는 기억이 들러붙어 있는 것에 진저리가 난다.
나는 결별을 제안한다. 지금부터 영원히.
그러면 기억은 애처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건 바로 나의 마지막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기억과 공존하기엔 힘겨운 삶」 중에서

스웨덴 한림원은 쉼보르스카의 시를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시어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시인들이 언제 어디서든 할 일이 많다는 의미”라며 자신의 관점을 설명했다.

마치 기억에 관해 그녀가 쓴 짧은 구절들이 시공을 넘어 오늘 여기 사는 독자에게 당연히 울림을 줄 것이라 확신하는 것처럼.

그 결과 시인에게는 사물, 역사, 문학, 문명, 그리고 인간의 실존 같은 철학적 주제들이 일상의 언어를 통하여 음악처럼 서로 넘나들며 녹아든다.

삶의 한 순간 어떤 종류의 지혜를 발견할 때, 자연 속 사물에서 본연의 가치를 발견할 때, 이성과 감성이 어느 한 지점에서 마주칠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맑은 시어를 쏟아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건져 올리는 그녀의 비범함에 세계의 평단이 경의를 표해 왔다.

시인이 지닌 시선의 힘은 매우 강하다. 그것은 종종 번득이는 통찰로 다가와 우리의 사유를 붙잡는다.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도 그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 「경우」는 돌풍으로 오직 한 장의 잎사귀만 달랑 남은 나무를 묘사하는데, 그 잎의 독무(獨舞)가 오래 갈 수 없음을 이런 식으로 예감한다.

이 경우
폭력이 가담을 한다,
당연하게도
폭력은 이따금 농담을 즐기니까.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이 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의문이 되기도 한다.

「강요」에서 인간의 한계를 토로하는 대목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고민해야 함을 보여준다.

가장 서정적인 시인들조차 그러하다.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자들도
끊임없이 씹고, 삼킨다,
한때는 성장을 지속했던 어떤 대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들과 화해할 수가 없다.

깊은 사유의 샘에서 지긋하게 압축해 길어 올리는 글이기에 난해함은 미덕일 수도 있다.

쉼보르스카의 많은 시들이 독자들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숙고하게 만든다. 물론 평범한 일상을 보통 사람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잡아낼 때도 있다.

이 시집에서 거의 유일한 ‘연시’라 할 수 있는 「공항에서」는 그와 같은 장면을 살짝 엉큼하고도 유쾌하게 그렸다.

그럴 때도 딱 필요한 단어만으로, 연인들의 침실을 훔쳐보기라도 할 듯 은근한 시선의 이동만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 팔을 벌린 채 서로를 향해 달려온다.
활짝 웃으며 소리친다. 드디어! 마침내!
둘 다 두꺼운 겨울 외투 차림,
두툼한 털모자에,
장갑,
그리고 부츠,
하지만 단지 우리의 육안으로만.
그들 자신은 이미 알몸이니까.

다른 시 「이혼」에서는 당사자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과 사물들 심지어 자동차와 시집들의 입장에서 이혼에 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누구나 한 번 생각해 보았음직한 많은 경우들을 나열하다, 살짝 맞춤법 교본을 빌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쓸 때 어떡하면 좋을지” 꼬집으며 이렇게 추가한다.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이름을 분리하기 위해 마침표를 사용해야 하는지.
 

자연의 조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작은 기쁨 하나를 놓치지 않는 시인의 감성은 넉넉한 포근함으로 우리 가슴에 오래 머문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에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 그게 자연의 귀결임을 인정하는 대목이 그렇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닥치게 될 낮이나 저녁’이며 ‘달력에서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고른 수많은 날짜 중 하나’이고, ‘자연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전능함’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삶은 얼마나 허무할까?

그러나 아주 이따금
자연이 작은 호의를 베풀 때도 있으니
세상을 떠난 가까운 이들이
우리의 꿈속에 찾아오는 것.

사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기억의 되새김을 통해, 쉼보르스카는 독자들에게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펼쳐줄 수 있음을 기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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