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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DMZ의 문화 유산 1 - 파주 서명선 묘역

* 시그널은 잘 알려지지 않은 DMZ의 문화 유적을 탐방,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1.05.16 14:55
  • 수정 2021.05.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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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의 사나이는 쓸쓸히 임진강을 바라보고...

<북학의 태동, 파주 서명선 묘역>

의리(義理)란 무엇인가?

우스개소리지만 한때 연예인 김보성이 의리의 상징처럼 회자된 적이 있다. 의리를 주제로 CF까지 나왔으니, 의리 하면 상남자 김보성인가?

그런데 200년전 임금이 인정한 진짜 의리의 사나이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면 영정조 시대를 말한다. 프랑스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등 세계사의 굵직한 변화의 시기에 조선은 영정조 시대를 거쳤다.

그 중, 정조의 등극 과정에는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 어떻게든 왕위에 올라 부친 죽음의 내막을 밝히고 명예 회복을 시켜야 했던 어린 세손,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자신들이 죽음으로 내몬 사도세자의 친자식이 왕위에 오른다는 끔찍한 미래는 노론 세력의 지속적인 저항과 공작을 불러왔다.

50년 넘는 왕위를 누려온 <건강인 영조>도 세월은 피할 수가 없었다, 177511월 영조는 스스로의 노쇠함을 한탄하며 세손에게로의 권력 이양과 관련한 발언을 한다,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니 ......어찌 만기(萬幾)를 수행하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전선(傳禪)한다는두 자()를 하교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우므로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영조실록 17751120>

즉 본인이 노쇠하여 일을 하기 어려우니 당장 왕위를 넘기고 싶은데 불편하면 세손에게 대리청정이라도 시키겠다는 것이 영조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세손의 외가인 좌의정 홍인한과 노론세력은 ,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 라며 반대하고, 심지어 "이 무슨 하교이십니까? 어찌 신자들이 받들 수 있는 일입니까? 차라리 부월(鈇鉞)에 복주(伏誅)되더라도 결코 감히 받들어 행할 수 없습니다.“ 라고 발언을 했다 영조실록 11>

홍인한 등 노론세력의 도끼로 찍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센 저항에 영조도 난감할 따름이고, 이 소식을 들은 세손과 홍국영측은 당혹함에 긴급히 대책을 세워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홀연히 등장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 서명선(徐命善, 1728~ 1791) 이다.

1755123일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기를,

"오직 우리 성상께서 임어하신 지 이미 50년이 되었습니다. 부지런하시고 노고하심을 하루같이 하시어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느라......선조(先朝)의 고사(故事)를 이어서 오늘날의 하교가 계셨으니, 이 대리(代理)하는 일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삼가 듣건대, 지난달 20일 대신이 입시하였을 때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감히 동궁(東宮)이 알게 할 필요 없다.’라는 말을 함부로 전석(前席)에서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저군(儲君)이 알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알아야 하겠습니까? ..... 그 무엄하고 방자함은 아주 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참(常參) 때에 전 영상(領相) 한익모(韓翼謨)좌우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또 무슨 망발입니까? ...... 그 말이 비록 무식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고 하나, 그 사실은 불충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나라 일이 이러하고 대신이 또한 이와 같은데도 옆에서 들은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삼사(三司)의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통곡하고 크게 탄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손수 상소문을 봉하고 직접 궐하(闕下)에 나와 경건한 정성으로 바쳐 우러러 성청(聖聽)을 번거롭히오니, 삼가 비옵건대, 성상의 밝으신 지혜를 혁연(赫然)히 떨쳐 펴시어 크게 밝은 명()을 내리시고 빨리 대신의 죄를 바로잡아 국가의 대사가 존중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하였다

영조의 뜻을 거역하고 망발하는 신하들을 처리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서명선의 상소를 계기로 상황은 급반전되어, 홍인한 세력은 퇴출되고, 결국 세손은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곧이어 영조의 죽음으로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임금이 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한 정조이다.

자칫 왕위에 오르지 못할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낸 은인, 서명선.

그에 대한 각별함으로 정조는 서명선. 홍국영, 김종수, 정민시 등과 동덕회(同德會라는 사모임을 결성, 해마다 123(서명선의 상소일)이면 정기모임을 갖고 비선 조직의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서명선 묘역
서명선 묘역

1791년 서명선이 세상을 뜨자 그에 대한 애도의 글을 정조가 내린다. 현재의 파주시 진동면에 자리한 서명선 묘에는 정조의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 비가 있다.

정조의 어제사제문 비
정조의 어제사제문 비

서명선의 묘를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파주시 동파리(과거의 장단군)는 민통선 지역이라 출입도 쉽지 않고(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인한 제재 등), 철자 하나 빠진 주소로 인해 엉뚱한 산속을 헤매기도 했다. 군부대의 사격훈련장을 지나 비포장길의 흙먼지를 뚫고 마침내 임진나루가 건너 보이는, 서명선의 묘소에 도착했다.

평탄한 언덕에 잘 정돈된 묘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조의 어제사제문 비였다.

어제사제문의 첫 문장은 의리였다.

義理主人 朝廷藎臣.... 조정의 오직 하나 의리의 사나이 ^^

8글자는 서명선에 대한 정조의 자기 선언이다..

橫縱兕虎 奮不恤身 흉악한 무리들이 설치는 와중에 분연히 일어나 몸바쳐 싸우고

維乙之冬 危如一髮 을미년 겨울 위태로운 순간에

卿乃忼慨 尺疏籲穹 비분강개하여 한 장의 상소로 알려

陰沴掃北 赫日揭東 음흉한 재앙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爲柱爲石 屢翦奸凶 기둥과 초석같은 신하가 되어 여러차례 간흉들을 처리하고

再安宗祏 十載協贊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며 십여년을 나를 보필했는데

......

昨臘一面 那料奄隔 지난 섣달에 한번본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니

同德之會 孰與爲樂 동덕회에선 누구랑 즐거움을 나누겠는가

欲寫隱卒 有淚漬紙 애도의 글을 쓰는데 눈물이 흘러 종이를 적시는 구나

정조가 그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했는지, 절절함이 비문을 온통 감싸고 있다.

세종대왕 혼자서 문화의 번영을 이룰 수 없듯이, 영정조의 르네상스 역시 뛰어난 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새로운 세계관과 철학을 지닌 신하들의 뒷받침이 되었는데, 그 중심축의 하나가 서명선 등 달성 서씨 형제들이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스승이었던 보만재 서명응, 그의 조언으로 정조 시대 중심축 규장각이 만들어졌으며 초대 규장각 제학이 서명응이다. 그의 정신을 이은 것이 동생 서명선, 서명응의 아들 서형수, 서호수, 서호수의 아들 서유구, 그 주변에 서유구를 가르친 연암 박지원, 정조의 익위사 홍대용 등이 함께 있었다.

우리가 북학이라 부르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의 태동, 백성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을 고민하고 탐구해온 그 중심에 있었던 서씨 형제들, 이들이 백성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이를 이어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곳이 바로 이 장단지역이고, 또한 서명선 묘에서 멀지 않은 남방한계선 너머에 서명응과 서유구의 묘가 있으며 마주 보이는 휴전선 너머가 연암 박지원의 묘이니, 이곳이야말로 북학의 태동지이다.

정조의 어제사제문비에는 한국전쟁의 흔적인지 총탄자국과 깨어진 흔적이 보인다.

 비의 음기에는 서명선의 조카 서형수가 지은 묘지명이 적혀있다. 작은 아버지 서명선의 일생과 키가 크고 수염이 풍성했다는 외모에, 친구를 귀천없이 사귀었다는 내용까지 있는 걸 보면 그가 단지 친족이 아닌 존경의 대상인 스승으로 서명선을 대하고 추억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비문의 글씨는 서명선의 사위이자 당대의 명필, 글자장 극옹 이만수의 글씨이다. 전서와 예서, 해서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명필은 우리의 눈을 호사스럽게 한다.

 

통제원의 간()방에 자리했다는 서명선의 묘에서는 건너편 임진나루가 보인다, 임진년 선조의 몽진의 기억부터 이괄, 정묘, 병자년의 기억까지 담고 있는 임진강, 그 위는 현재의 휴전선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장산 전망대이다.

장산전망대에서 보이는 임진나루 너머 서명선 묘역
장산전망대에서 보이는 임진나루 너머 서명선 묘역

서명선, 하나의 묘가 들려 주는 수많은 이야기를 안고, 임진강은 흐른다. 강물을 따라 역사의 굵직한 기억이 흐르고, 그 속에 DMZ의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서명선 묘역에서 내려보이는 임진나루
서명선 묘역에서 내려보이는 임진나루

* 서명선 묘는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산 16번지이다. 후손이 관리하는 넓게 조성된 농장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명선 선생의 정조시대의 위상과 정조의 어제사제문비를 생각하면 안내판 하나 없는 묘소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문현답  이현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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