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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이 간다 - 경북 문경 봉암사

1년에 하루,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하는 사찰 봉암사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1.05.21 15:02
  • 수정 2021.05.2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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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그널이 간다 - 1년에 하루 개방하는 경북 문경 봉암사

 

선열에 굶주려서 실컷 맛보고 싶은 이는 / 囂腹欲飫禪悅食

이 산중에 와서 전각을 한번 볼지어다 / 來向山中看篆刻

 

1,200년전 고운 최치원은 <()에 굶주린 자 이곳 산중으로 오라> 했건만, 그의 말처럼 이곳 산중에 가기는 쉽지 않다.

1 년에 한번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하는 문경 봉암사 이야기이다.

문경 봉암사 대웅보전
문경 봉암사 대웅보전

신라말의 왕위 쟁탈전은 귀족의 분열과 지방 호족의 기반 확대를 이루어왔다.

중앙 정부의 약화에 따른 지방호족의 성장은 새로운 사회 변화를 갈망하게 했다. 그 변화의 결과는 고려의 개국으로 이어진다. 불교 철학 역시 화엄과 유식 중심의 교종에서 혁신적인 선종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가, ()이었을까?

달마의 선이 당을 거쳐 신라에 이르니, 경전의 문구에 대한 이해에 빠진 교종보다,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실천하는 선종의 확장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고 그 중 하나가 지증대사 도헌의 희양산문, 바로 문경 봉암사이다.

지증대사의 입적후 신라 헌강왕은 마침 당나라에서 돌아온 천재 최치원에게 지증대사의 행장을 쓰게 한다. 최치원이 스스로 표현대로 하자면 <황제의 나라에 가서 이름을 급제자의 명단에 높이 걸고, 관직이 시어사에 오른 최치원이라는 자 ^^> 가 지은 지증대사의 비가 이곳 봉암사에 있다.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국보로 변경되었다.

지증대사 비- 최치원 글
지증대사 비- 최치원 짓고 혜강이 썼다

지증대사 비명의 후반부의 글이 바로 <선열에 굷주린 자, 산중에 와서 전각을 보라>이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불교계는 식민지 불교체제의 해체와 개혁을 위해 고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불교쇄신의 대표적인 모임 하나가 성철, 자운스님이 주도한 1947년의 봉암사 결사이다. 부처님의 법대로만 사는 도량을 만들자며 수좌들의 노동 일상화, 참선수행과 계율준수 등 개혁운동으로 큰 호응을 받았으나 곧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봉암사결사의 맥은 끊어지지 않아, 1982년 종단에 의해 봉암사는 수도를 위한 특별선원으로 지정, 희양산 일대와 함께 성역화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게 되었다.

결국 선열(禪悅)에 굶주린 대중들은

1년 중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봉암사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문경 희양산 자락에 있다. 희양산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줄기의 하나로, 최치원의 글에 의하면,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앞세운 듯한 기이한 형상이...병풍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든 듯... 하늘이 준 땅>이다, 그 남쪽 자락에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희양산 - 경북과 충북의  경계를 이룬다
희양산 - 경북과 충북의 경계를 이룬다

선종의 수행도량인 봉암사, 원래 일반인들에게 유명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SNS의 발달로 몰려드는 방문객으로 인해 <1년에 하루> 몸살을 앓는 곳이 되었다. 이전에는 멀리 떨어진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에서부터 길을 막고 셔틀버스를 운행했고, 가은읍과 관내 경찰 인력이 총동원되어 휴일인 석가탄신일을 쉬지 못하고 하루종일 봉사해야할 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2021년 석가탄신일, 코로나로 말미암아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못하고 차량통행을 허가하니 봉암사로 접어드는 곳곳의 빈터는 모두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다. 심지어 공사중인 비포장도로까지도. 차량의 행렬이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희양산 물줄기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자연이 주는 가능성을 증명하는 듯하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계곡은 청정 그 자체이다. 그냥 떠마셔도 좋을 만큼 맑은 물에, 물속의 하얀 모래까지도 투명하게 보인다.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않는다더니, 이 계곡 자락에는 흔한 민물매운탕집도 보이지 않는다

봉암사 계곡
봉암사 계곡

경내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따라, 계곡에서 울리는 맑은 물소리가 사찰을 향해 걷는 이들의 마음과 발길을 청량하게 만드니, 청정 도량의 청정자연은 사람도 청정하게 만든다.

봉암사 일주문 - 기원하는 방문객
봉암사 일주문 - 기원하는 방문객

사찰의 영역임을 알리는 봉암사 일주문, 전면에는 희양산 봉암사라 적혀있지만, 후면에 봉황문이라 별칭을 두었다. 봉암사도 봉이니,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이 깨달은 봉황이 된 듯하다.

구부러진 나무 모양 그대로 다듬어 그랭이질 해서, 특이한 긴 초석에 올린 기둥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경내의 극락전과 더불어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일주문-기둥을 받친 초석이 특이하다
일주문-기둥을 받친 초석이 특이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일반적으로 천왕문이 있는데, 길가의 암석이 마치 문 기둥처럼 서 있어 들여다보니 나무아미타불이라 적혀있다

길 양쪽으로 문의 기둥처럼 서있는 암석
길 양쪽으로 문의 기둥처럼 서있는 암석

사찰의 경내는 마음을 비우는 세심천을 건너야 도달한다. 마음을 씻고 비워야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양산교라 불리는 홍예다리가 원래의 입구인 듯하나, 차량의 진출입으로 인해 나오는 길에 건너야 했다

양산교(홍예)
양산교(홍예)

대부분의 관람객은 계곡을 더 따라 올라가 경내에 가까운 계곡 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침류교(마애불과 경내의 갈림길에 있다)
침류교(마애불과 경내의 갈림길에 있다)

경내로 가기위해 용추계곡을 건너는 다리의 이름이 침류교(枕流橋)이다.

침류교 기둥
침류교 기둥(1994년에 세움)

<흐르는 물을 베고 있는 다리> 라니, 침류는 침석수류(枕石漱流)에서 온 말로 <돌을 베개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를 한다>는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은거함을 뜻한다. 그 말을 비틀어 <침류(枕流), 물을 베개 삼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는다는 것으로 세심(洗心)과도 어울린다. 그래서일까? ()의 머리 부분을 일부러 지운 듯 쓰지 않았다. 일부러 뺐다면, 베개 삼은 물에 씻기우는 사람의 머리를 떠올리게 한다.

강학의 공간인 남훈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마당이다. 대웅보전 앞에는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관불의식이 한창이다.

관불 의식을 하는 신도들
관불 의식을 하는 신도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탄신상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오시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며 걸었다는 아기 부처, 관불 의식을 통해 부처가 이땅에 오신 뜻을 새기고, 마음속의 번뇌와 오욕을 씻어낸다고 한다.

금색전(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금색전(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금색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금색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대웅보전의 서쪽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금색전(金色殿)이다전각 뒤편에 걸린 <대웅전>이라 써진 편액과 앞마당의 신라시대 삼층석탑, 뒤편의 희양산과의 비례를 보니 원래 대웅전 자리가 여기인 듯 한데, 현재는 새로 지어진 대웅보전에 자리를 내주고 금색전이라 불리고 있다.

대웅전 앞은 흰 연등의 행렬이 석가탑을 닮은 아름다운 삼층석탑과 어울려 소박하게 마당을 꾸미고 있다. 봉암사의 흰색연등은 다른 곳의 오색연등에 비해 특이했다. 

색칠하는 시간마저도 정진에 힘쓰라는 뜻이었다고도 전해지나, 대웅보전 앞을 채운 화려한 오색연등을 보니 때론 정진도 쉬어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금색전 앞의 삼층석탑은 아름답다.

봉암사 - 삼층석탑
봉암사 - 삼층석탑

불국사의 석가탑을 닮은 단아한 외형과, 대부분의 옛 탑이 상륜부가 남아있지 않은데, 이 탑은 다행히 원형을 갖추고 있다. 상승과 안정을 절묘하게 표현한 삼층석탑은 수양 도량의 가치를 더욱 드높여, 마음 허전한 나그네의 발길을 한참동안  머물게 하니, 바로 옆이 태고선원, 스님들의 수행공간이기 때문이다.

태고선원의 입구는 眞空門(진공문)이다.

진공문
진공문

금강역사가 그려진 진공문의 양쪽 주련은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이다. 이 문안을 들어올 때는 알음알이를 없애라니, 알량한 학문과 지식을 버리고 마음을 살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묘유문
묘유문

<眞空에는 妙有가 있다>고 하여, 眞空妙有는 함께하는 글귀로 태고선원의 동쪽 문이 묘유문이다.

대웅보전의 동편은 극락전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극락전
극락전

겹 지붕에 석조로 된 절병통을 올린 모습은 전각이라기 보다는 법주사 팔상전과 비슷한 목탑의 느낌을 준다. 대부분 봉암사 건물이 근대에 중창된 것에 비하면 일주문과 함께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극락전 내부의 아미타불
극락전 내부의 아미타불

내부의 아미타불과 천정의 용 문양은 오랜 세월을 참선도량으로 지켜온 봉암사의 세월을 느끼게 한다.

뭐니뭐니해도 봉암사의 정수는 지증대사의 사리를 담은 승탑과 지증대사의 일생과 수행을 묘사한 고운 최치원의 지증대사 적조탑비이다

지증대사(824882)는 봉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다음해(882)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지증선사> 라는 시호와 <적조> 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한다.

지증대사 탑은 아름답고 당당하다

지증대사 탑
지증대사 탑

해질 무렵 폐사된 여주 고달사지 승탑에서 바라보는 고즈넉함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이다.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을 이렇게 아름다운 탑으로 만들어 낸 솜씨에,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 행복하다. 팔각원당형의 어쩌구하는 안내문을 읽기조차 무색하다.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과 기단의 정교한 조각들은 사자와 가릉빈가, 문비와 사천왕(四天王), 보살의 모습 등을 돋을새김하여 하나하나의 생동감이 마치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현실의 수호자들 같다.

지증대사탑의 사리장엄구 조각
지증대사탑의 사리장엄구 조각

불교를 몰라도 깨달음이 없어도 그저 하나하나 눈여겨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미소와 즐거움을 주는 것, 이것이 불심 아니겠는가.

왕방울만한 눈을 부릅뜬 거북모양의 서수가 등에 지고 있는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전체 높이가 4미터에 달해 저절로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지증대사 탑비
지증대사 탑비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 비문은 그의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중 하나이다. 아무리 천재였다하더라도 당나라에서 갓 돌아온 29세의 최치원에게 내려진 당대 최고의 지증대사의 비문은 짓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명을 내린 헌강왕에 이어 정강왕까지 죽고 진성여왕이 등극하는 복잡한 상황으로, 장장 8년여에 걸쳐 비문이 완성되었다 한다. 최치원이 음기에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 기간동안 3번이나 고쳐가며 글을 다듬었다하니, 유가의 천재가 담기 위해 고민한 불가의 고승의 행적과 사상이 어땠을 지 범인(凡人)으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비문은 약 5천여자로, 선종이 정착하는 불교사와 지증대사의 생애와 일화와 사상을 66의 인연으로 정리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글이 지어진 지 30여년이 지난 924년에야 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924년은 신라 경애왕 때이자 이미 고려가 개국을 한 이후였다. 그리고 비에 사용된 돌은 멀리 남해에서 운반해온 것으로, 경북 문경까지 운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비의 건립 주체가 상당히 큰 권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 주체들의 면면과 지역의 상황을 보면 당시 이 지역은 고려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이 짓고 고려인이 세웠다고 생각하면 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신라의 내용에 고려의 형식을 담았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문득 지증대사 비가 환히 나를 비추는 것 같다.

용추계곡 마애불
용추계곡 마애불

봉암사 뒤편 용추계곡의 마애불과 최치원의 백운대라는 각자, 그 외 정진대사의 비등 살펴보고 돌아봐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1년에 한번 개방하는 봉암사의 시간이 너무 짧다.

비문의 한 귀절에 <덕의 향기는 사방 멀리 치자꽃처럼 번져간다> 했으니, 그 향기 쉬이 사라지지않을 내년 석가탄신일을 또 기약함은 또 다른 깨달음을 위한 비움(眞空)이다.

 

* 봉암사는 1년에 한번밖에 개방하지 않지만, 초입에 최치원(야유암) 역사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개방 중이다. 봉암사 내의 최치원의 글씨와 생애, 그리고 지증대사비를 재현해놓아 최치원과 관련된 내용을 이해하기에 좋은 곳이다.

<우문현답 이현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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