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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DMZ의 문화유산 2 - 파주 이서 장군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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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DMZ의 문화유산 2 - 파주 이서 장군 선정비
  •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승인 2021.05.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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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은 잘 알려지지 않은 DMZ의 문화 유적을 탐방,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 인조의 사나이, 이서(李曙)  덕진산성에 올라 남한산성으로 내려오다

왕조 사회의 권력 이양 방식은 다양하다.

동양에서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했던 요순(堯舜)시대에 선양(禪讓)이란 방식이 있었다.

요순우 상상도 - baidy.bom
요순우 상상도 - baidu

선양이란, 혈연과 상관없이 당대의 가장 훌륭한 인물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말한다. ()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선양을 했다. 이런 이상적인 사회를 흔히 대동(大同)세상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왕위계승은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자식에게 권력이 이양된다. 이를 사위(嗣位)라고 한다. 보편적인 권력 이양의 방식이다.

간혹 살아있을 때 자식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경우가 있다. 이를 선위(禪位)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정종에게, 정종이 태종에게,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였다,

사위와 선위가 일반적인 권력이양 방식이라고 한다면 조선의 독특한 권력 이양 형태가 반정(反正)이다. 반정은 말 그대로 바로 잡아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실 폭군을 신하들이 끌어내리면 보통은 주도한 신하가 왕이 되서 왕조가 변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에서 조선이, 중국의 대다수 왕위교체 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런데 조선은 신하들이 새로운 왕(현 왕조의 혈통)을 추대해서 반정이라는 형태로 이어간 특이한 경우이다. 연산군을 끌어내린 중종반정,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반정이 그러하다.

이 인조반정의 주역 4대장(김류, 신경진, 이귀, 이서) 중의 하나가 이서(李曙, 1580~ 1637) 장군이다.

이서 장군의 선정비가 민통선 안에 있다는 이야기에 DMZ생태 전문단체인 <에코휴 dmz> 회원들과 함께 찾아 나섰다. 장단부사 출신이고,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서의 선정비라 비교적 눈에 띄는 장소에 있을 줄 알았으나 떡갈나무 우거진 숲속의 선정비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숲속의 이서 선정비

덕진산성에서 읍내리를 향해가는 야산 길, 몇 차례 숲속을 헤맨 끝에 발견한 비는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 숲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일부러 눈여겨 살펴보아도 찾기 어려운 숲속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하얀 비, 2,000년에 문화재 조사를 했다는데 숲길 입구를 조금이라도 정비하고 안내판이라도 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서 선정비 - 비대는 묻혀있다

무심한 관리에 비해 선정비는 비록 비대는 흙에 묻혀있지만 예상보다는 상태도 좋고 크기도 2m 가까이 컸다.

兼防禦使李公曙善政碑 德被萬民 功滿一國

전면은 장단부사에 경기방어사를 겸했던 이서의 이름과 <덕은 만백성을 덮고 공은 나라 전체에 가득하다>고 적혀 있다.

天啓 四年三月 日 立

뒷면의 천계는 명나라의 제15대 황제인 희종(熹宗)의 연호로, 유추해보면 16243월이니 인조반정 다음 해에 세워졌다. 이서는 인조반정의 성공후 호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에 경기감사가 된다, 이로 미루어 이 선정비는 이서에 대한 축하와 공덕의 의미가 커보인다.

현재는 민통선 내부 일반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의주길의 중요한 도로였을 것이다.

사실 연산군의 폭정과 이상행동은 왕을 끌어내릴 중종반정의 명분이 분명했고, 고통받던 백성들의 지지가 역시 함께 했다. 그런데 광해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남아있다, 과연 광해군 시대의 정치가 반란을 통해 강제로 뒤엎을 상황이었는가? 물론 임란후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되는 궁궐의 건축(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등)이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은 분명했고, 인목대비 및 영창대군, 임해군등의 처리 역시 부적절했다지만, 반정까지 가는 것이 합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정치적인 행동의 결과라는 견해가 많다.

즉 반정과 쿠데타의 경계에 서있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의 병자호란까지 백성들 역시, 방관자이자 피해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세력은 조선 후기 사회를 장악했다. 인조 이후의 왕들이나 핵심권력 전체가 바로 인조반정 주역들의 후손이다. 때문에 기록과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근래에 등장했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의 근거가 어쩌면 인조반정일 수도 있다.

임진강가에 덕진산성이 있다. 덕진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조선시대에 이른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은 높지 않지만 강가에 있어 접안이 가능하고 주변을 조망하기 쉬워 군사적으로 주요한 장소였다. 

덕진산성 - 고구려때 부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왕족 출신의 무신이던 이서는 인조반정 당시 장단부사 겸 방어사였다. 광해군 당시 폐모논의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로, 모친상으로 삼년동안 물러나있던 이서를 집요하게 찾아와 설득한 사람은 임진왜란의 신립 장군의 아들 신경진이다. 국방 강화를 위해 덕진산성의 정비를 광해군에게 건의했던 이서는 그에 따라 덕진산성의 정비와 군사 훈련을 진행했고, 그 훈련된 군대로 광해군의 폐위 세력에 합류한다. 역사는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16233월 반정군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연신내)에 집결했다, 김류, 이귀, 이괄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 수백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한 이서가 합류했다. 이서가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 지명이 연신내(延臣, 신하가 늦은 곳)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으로 몰려가서 마침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강화로 귀양보냈다. 광해군은 강화에서 그리고 제주까지 옮겨가며 66세에 생을 마쳤으니, 쫒겨난 왕치고는 천수를 누렸다.

좀 늦게 도착하긴했지만, 만약 이서의 군대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반정의 성공은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록에는 <김류·이귀와 함께 의거를 공모할 때 장단(長湍)의 임지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으므로 군사들이 마음 속으로 그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사(靖社)의 공로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조 1317>라며 그의 공을 밝히고 있다.

이서는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공신에 책봉되어 호조판서에 오른다. 곧 완풍군에 봉군되고 연이어 경기도 관찰사에 오르니 인조의 실질적인 호위대가 된 것이다. 이괄의 난 때 잠시 파직의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지만 인조의 두터운 신임은 그를 한성과 경기를 방어하는 총융청사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했다.

병자호란의 위기를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일까?

이서는 남한산성을 답사하고 인조에게 <백제 시대에 남한(南漢)에 도읍을 세우고 지키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형승지(形勝地)입니다. 청하건대 이곳에 성을 쌓아 경도(京都)의 방패가 되게 하소서.> 라고 남한산성의 보수를 건의 하였다. 그리고 인조의 명으로 1년 만에 남한산성 성곽 수축, 개보수 공사를 완료했다.

남한산성 남문 - 지화문

163612월의 겨울은 추웠다.

이 추위를 틈타(강이 얼어 청나라 기병의 진군이 쉬웠다)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척화와 화친의 탁상논쟁이 한참이던 16371월 이서는 출병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쓰러진 후 숨졌다.

향년 57, 사위 채유후(蔡裕後)에게 '내가 죽어도 한이 없으나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패전을 당한 잊을 수 없는 치욕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남한산성 숭렬전

남한산성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 남한산성 건축 책임자였던 이서(李曙)의 위패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인조반정 4대장중 신립의 아들 신경진,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죽은 김여물의 아들 김류, 그리고 이귀, 이들이 걸은 정치적 행보에 비해, 이서는 마지막까지 정통 무인으로서 길을 걸었다.

그의 묘는 그가 태어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에 있다. 신숙주의 묘에서 멀지 않은 곳, 그러나 신숙주 묘의 안내판과 관리에 비하면, 선정비처럼 이서의 묘역도 초라하고 어수선하다. 안내판 하나없는 묘역에, 오래된 묘비와 오도일이 찬()한 신도비만이 이 묘소의 주인이 이서 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서장군 묘
이서장군 신도비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는 경기도를 떠나지 않았는데, 경기도의 마음속엔 이미 그가 자리할 공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덕진산성에서 바라보이는 초평도와 임진강

덕진산성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은 여전히 분단된 DMZ의 상처를 휘감아 흐른다.

국방 강화를 꿈꾸던 이서 장군, DMZ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직은 덕진산성을 떠날 수가 없다.

 

<우문현답 이현진>

* 이서 장군 선정비는 파주시 군내면 산57-2, 이서 장군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2-15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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