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2 12:02 (목)
“세상 다스리는 이치 터득한 이”, 제갈량考(上)
상태바
“세상 다스리는 이치 터득한 이”, 제갈량考(上)
  • 김선태
  • 승인 2021.06.02 0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는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의와 법도를 보여주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때에 알맞은 제도를 따랐으며, 성실한 마음으로 공정한 정치를 폈다. (...) 여러 사무에 정통하고 사물의 근원을 이해했으며, 명분을 따르고 실질을 구하여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았다. (...) 그는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인재로서 제나라 관중, 한나라 소하와 비교할 만하다.”
- 진수(陳壽),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제갈량은 선대 황제 유비의 명에 따라 평생 재상의 자리에 머물며 수렴청정하였고, 전장에서 보인 지략과 통치에서 남긴 치적이 모두 후세의 귀감이 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인물이다.

진서(晉書)에 따르면 진수의 부친은 삼고초려로 유명한 제갈량의 군사 마속의 참군(보좌관)이었다. 228년 제갈량의 첫 북벌에서 마속이 그릇된 책략으로 적장 장합에게 대패하여 참수될 때 진수의 부친은 머리를 깎이는 곤형에 처해졌다. 

이런 악연이 있음에도 진수가 저와 같이 평했으니 후일 나관중의 소설에 묘사 신인(神人)의 경지는 아닐지라도, 그 비범함에는 이의를 달기 어려울 듯하다. 

이에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제갈량의 실제 능력·내면·공과를 복원해 본다면 대략 아래와 같지 않을까 싶다. 

전장의 지략과 통치의 치적 모두 후세의 귀감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공신으로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복룡(伏龍)이다.

후한말 서주 낭야군 양도현(지금의 산동성 교남시 일원)에서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후일 오나라 대신으로 삼국 외교사에 이름을 떨친 제갈근이 친형이다.

회남의 예장(지금의 남창)과 형주의 주도인 양양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 12년을 보냈으며 15세가 되기 전 양친을 잃었다. 이에 한동안 백부 제갈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197년 제갈현이 죽자 거처를 옮겨 형주 땅 남양군 등현(융중)에 머물렀는데 스스로 농사를 지었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융중에서 교류하여 우정을 쌓은 인물이 많으니, 후일 유비에게 그를 와룡이라 소개했다는 서서(徐庶)가 그중 하나다. 27세에 유명한 삼고초려를 계기로 융중에서 나와 익주 성도를 중심으로 유비를 도와 촉한을 세웠다.

제갈량이 당대의 수많은 군웅 가운데 유독 세가 약하여 ‘버티고 설 땅 한 뼘 없었던’ 유비를 주군으로 삼은 이유는, 후한 말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한 그의 정치적 이념에 유비가 가장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송나라의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에 이렇게 기록했다.

- 제갈량은 황제의 권위가 이미 실추되어 한 왕조가 기울어지려 할 때 종친 중 걸출한 인물을 도와 끊어질 듯한 왕조를 다시 일으켜 옛 수도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당시 유비는 원소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어 남으로 도망가야 할 처지였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자진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손권은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었으며, 적벽에서 당대 최강의 제후인 조조를 격파한다. 209년 겨울이다.

『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지훈.
『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지훈.

제갈량은 이 과정에서 형양을 차지한 뒤 익천을 도모해 유비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승상의 직에 오른다. 

연의의 서술과 달리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오나라를 찾아 손권을 설득한 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조조군이 강해 대적하기 어렵다는 손권에게 “위의 날랜 기병이 3백여 리를 달려왔으니, 이것은 제아무리 강한 활에서 떠난 화살이라도 그 마지막은 노나라의 명주조차 뚫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말로 설득했다. 
이에 촉오 연합군이 위군을 대파하여 재기에 성공한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에 임명하고 3개 군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 

학자들 가운데는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 위나라 조정에서 제갈량의 존재를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한직에 머물렀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정사인 가후전에 조조가 한중 공략에 앞서 이미 “제갈량의 정치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 대목이 있다. 법정과 함께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만드는 등 익주의 제도 정비를 주도한 이도 제갈량이다.

이어 촉이 거듭 전공을 올리자 221년 제갈량은 신하들을 대표하여 유비를 설득, 제위에 오르게 한다. 촉한 황제가 된 유비가 제갈량을 승상에 명하니 그 지위가 종신토록 이어졌다. 

2년 뒤 영안 백재성에서 병세가 위중해진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아들 유선에게 “너는 승상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그를 아버지같이 섬기라”는 조서를 내린 뒤 눈을 감았다. 
이후 후주 유선이 황제로 즉위한 뒤 오장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제갈량은 승상으로 11년간 일했다. 

초기 제갈량 초상, 1609년 명나라 시기 작품으로 널리 통용되는 제갈량의 모습이다.
초기 제갈량 초상, 1609년 명나라 시기 작품으로 널리 통용되는 제갈량의 모습이다.

“임기웅변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닌 듯”
진수는 정사 삼국지에 정치적인 면에서 “나랏일은 크든 작든 가리지 않고 모두 제갈량이 결정했다” 적었고, 군사적인 면에서 “남중의 여러 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갈량이 국상을 마친 뒤 봄에 정벌에 나서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고 적었다. 

남중 정벌은 223년 유비의 상중에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고정·주포 등이 손권의 밀지를 받고 이민족과 합세하여 소란을 피웠는데 제갈량이 2년을 기다린 뒤 상복을 벗고 남정을 개시하여 반란을 잠재운 일을 말한다. 

이는 조조가 모사 곽가 덕에 북방 오환족을 궤멸시킨 일과 더불어 당대에 이민족과의 대결에서 압승을 거둔 양대 사건이라 불릴 만하다. 당연히 숱한 민간전승이 생겨나 나관중이 이를 채록하여 신화처럼 부풀리니 칠종칠금의 고사도 그중 하나다. 연의에 등장하는 올돌골이나 목록대왕 등의 일화는 창작이지만 맹획은 실존인물이다.

여세를 몰아 군사를 정비한 제갈량은 227년 위를 정벌하라는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에 나섰다. 이를 위해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먼저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며, 덧붙여 어린 황제에게 몇 마디 훈계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후일 ‘출사표’라 불리는 이 명문을 읽고 울지 않는 충신이 없었다 한다.

228년 봄 제갈량이 기산을 침공하자 남안과 천수, 안정 3군이 호응하고 강유가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그러나 위로 진군할 지름길에 해당하는 가정에서 마속이 제갈량의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해 장합에게 대패했다. 

제갈량은 울며 마속을 처형하고(泣斬馬謖)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었지만 달리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므로 승상의 사무는 그대로 이어갔다.

같은 해 겨울 제갈량은 다시 위를 침공해 진창을 포위하지만, 학소의 저지선을 뚫지 못한 데다 식량이 다 떨어져 귀환했다. 이때 추격해온 왕쌍을 물리친다.

229년 제갈량은 다시 위나라의 영토를 침공해 곽회를 격파하고 무도와 음평을 평정하여 그 공로로 승상에 복직했다. 231년에도 기산을 침공하여 상규에서 사마의의 대군을 대파시킨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고, 그때 추격한 장합을 목문에서 죽인다.

234년 제갈량이 10만 대군을 통솔해 오장원에 본거지를 구축하자 사마의는 지연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손수레(목우와 유마)를 사용해 식량을 수송하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시행한다. 

하지만 100여일 후인 그해 8월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죽으니 향년 54살이다. 죽음을 예감하고 사마의를 속여 사직을 보존한 그의 지략은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말로 후대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촉군이 물러간 뒤 제갈량의 군영을 돌아본 사마의도 “천하의 기재로구나” 한 마디로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일찍이 곽봉효(奉孝)는 오환의 대군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병귀신속(兵貴神速)의 기발한 계책을 내놓아 대승을 얻게 했다. 아쉽게도 제갈량은 이와 같은 기발함보다 신중함이 앞서 결정적인 국면에서 사마의의 대치 전략에 말려들곤 했다. 

진수가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평하면서 “해마다 군대를 움직이고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마 임기웅변의 지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인 듯하다”라고 말한 것이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중편에서 계속)

글·김선태 편집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