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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헌신의 표상이자 법치의 모범”, 제갈량考(中)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6.02 15:21
  • 수정 2021.06.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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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람인 나관중은 제갈량을 흠모한 나머지 연의에서 반신반인의 경지로 묘사했다. 실은 이와 같은 생각이 당대에 민간은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도 만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지략과 무훈, 역사를 넘어 신화로 남아
대표적인 사료가 송대에 집필된 『십팔사략』이다. 송이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전승과 사료를 모아 방대한 전사를 쓴 증선지는 삼국지의 주요 전사를 제갈량에 할애했다. 

증선지가 묘사한 제갈량의 활약상은 나관중의 연의에 고스란히 이어졌다. 207년 유비가 서서의 추천에 따라 남양 땅 융중(隆中)에 사는 제갈량을 세 번 찾은 끝에 만났다는 삼고초려의 고사가 하나다. 이듬해 위의 침공에 맞서 오나라를 찾은 제갈량이 흔들리는 손권의 마음을 붙잡아 촉오 동맹을 끌어내 적벽대전으로 조조군을 대파한 것이 또 하나다. 

유비의 유지에 따라 어린 황제 유선을 받들어 정치를 보좌하게 된 제갈량이 신속히 민심을 무마한 뒤 오나라와 반위(反魏) 동맹을 맺어 정사를 안정시킨 것이 또 하나다. 운남의 만족 우두머리 맹획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일곱 번 사로잡고도 놓아준 칠종칠금의 고사나, 자신의 사후 위연이 모반할 것을 알고 양의로 하여금 미리 대비하게 하여 위연의 음모를 단숨에 제거하게 만들었다는 고사도 그 일부다.

이처럼 수많은 무용담을 낳은 촉오의 책사이며 신하이자 통치자로서 제갈량의 공적인 삶은 크게 형주 시절,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 그리고 유선 대의 남정과 북벌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초기 활동 무대를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살피면 산동성 기남현, 호북성 양번시 융중, 사천성 성도시, 섬서성 면현이 된다. 후일의 군사적 정치적 활동 범위는 북으로 감숙성과 섬서성, 동으로 장강 중하류, 남으로 귀주와 운남에 이르니 중국 중서부 일대가 대부분 포함된다.

후한 말 전란의 시대에 변방 형주의 초야에서 지내던 중 세상에 나온 제갈량은 지략과 실천으로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유비는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뒤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갖춘 끝에 제갈량을 영입했다. 당시 27세이던 제갈량이 유비에게 내놓은 계책이 유명한 ‘융중대책’ 또는 ‘천하삼분지계’다. 아래는 그 일부로 원문은 ‘제갈량집’ 초려대 1권에 실려 있다.

“장군이 만약 현주와 익주를 동시에 차지한다면 지형적 장애에 의존하면서 서쪽으로 융과 화합하고 남쪽으로 이와 월을 무마하며, 바깥으로 손권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안으로 내치에 힘쓸 수 있습니다. 그러다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편으로는 상장군에게 명령해 형주의 군대로써 완을 거쳐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하고, 장군은 손수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에서 출발한다면, 참으로 이렇게 하여 패업을 이룰 수 있으며 한 왕실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융중대책의 절묘함에 대해 이중톈은 『삼국지 강의』에서 이렇게 적었다.

“(제갈량의 말을 듣고) 유비는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막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앞이 환해졌다. (...) 제갈량의 계획에 따르면 유비는 나아가서는 중원을 통일할 수 있고 물러나서는 천하를 삼분할 수 있으니, ‘제업(帝業)’은 이루지 못해도 ‘패업(霸業)’은 이룰 수 있고, 패업은 이루지 못해도 ‘사업(事業)’은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융중대책은 후일 영웅호걸들이 대업을 논할 때 빠짐없이 인용한 계책 중의 상책이 되었다. 

제갈량의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유비가 남긴 말이 있다. 촉한 건흥 원년 223년 유비는 죽음을 맞아 유선에게 유조, 즉 임금의 유언으로 아래와 같이 명했다.

“한서, 예기를 읽다 틈이 날 때 제자백가의 책이나 육도, 상군서를 훑어본다면 더욱 뜻과 지혜가 길러질 것이다. 듣건대 승상께서 신자(申子), 한비자, 관자, 육도를 베껴 쓰면서 그 뜻에 전부 통했다 하고 그밖에도 읽지 못한 책이 없다 하니 네가 물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신뢰하여 “그와 나는 물과 물고기 같은 관계”라고 한 데는 이와 같은 지적 역량 못지않게 탁월한 인간미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유비를 회고한 출사표의 여러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출사표에서 그는 유비가 자신에게 나라를 맡긴 이유, 나아가 국가 성패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지략이 아닌 인품에서 찾았다. 

“전한이 흥성했던 것은 어진 신하를 가까이 두고 소인을 멀리했기 때문이며, 후한이 쇠락했던 까닭은 소인을 친근히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함에 있었습니다. 선제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저와 함께 매번 이런 일을 도모할 때마다 환제와 영제의 일을 탄식하며 이를 원통하게 여기지 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 초려에서 나온 뒤로 선제로부터 직무를 위임받아 명을 행한 지 21년이 되었으니, 선제께서는 신이 공손하고 삼가며 신중함을 아시는지라 임종에 이르러 국사를 맡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학문적 성취와 뛰어난 인품이 있었기에 208년 조조의 침공으로 유비가 형주를 버리고 달아나려 할 때 제갈량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명을 받들어’ 홀로 동오를 찾아 심금을 울리는 말과 글로 촉오동맹을 끌어냈다. 당시 제갈량이 손권에게 올린 글 가운데 오월동주의 고사를 인용한 다음 구절은 삼국 시기 외교 논리의 백미로 꼽힌다.

“조조는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천 리 길을 달려 급습해왔으며, 여기까지 쇄도하느라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인데 전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종의 부대가 조조에게 투항한 것은 원래 압력 때문이지 결코 마음으로 기뻐하며 복종한 것이 아닌데, 또 전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황이 이러하므로) 장군께서 만약 오월의 무리로 중원에 대항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중원과 관계를 끊는 편이 나을 터인데, 만약 감당할 수 없다면 어찌 군대를 물리고 무기를 단속해 중원을 섬기지 않으십니까?”

이중톈, 『삼국지 강의』, 김성배·양휘웅 역, 김영사.
이중톈, 『삼국지 강의』, 김성배·양휘웅 역, 김영사.

황제를 대신한 통치, 원칙으로 내외의 도전 이겨내
유비가 관우 장비 두 동생을 차례로 잃으면서 복수에 매달린 뒤로 정사는 제갈량의 몫이 되었으니 승상 제갈량이 실질적으로 촉한을 다스린 기간이 모두 14년이다. 

그런데 제갈량은 외지인인 유비를 도와 유장으로부터 한중땅을 빼앗아 제위에 오르게 했으니 내부 권신과 호족의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무신으로서 대표적인 도전자가 그와 함께 유비로부터 탁고를 받은 토착 호족 이엄이다. 

제갈량은 후주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엄의 흉계를 비교적 상세히 밝혔는데 진수의 『삼국지 촉지 이엄전』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소신이 북벌에 나서면서 도향후 이엄에게 군대를 동원해 한중을 보호할 것을 요청하자 이엄은 자신의 군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엄은 오히려 기회를 틈타 다섯 개 군을 할양받아 파주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후 소신은 (조진과 사마의의 대군이 몰려와) 서쪽을 정벌하러 가면서 이엄에게 다시 한중 관리를 요청했지만, 이엄은 출병하는 대신 제 아들 이풍의 직위를 올려달라 하여 소신은 부득불 그를 도독에 임명했습니다. 중요한 사안을 판단함에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일이 헤아릴 수 없고, 심지어 전황을 논하고자 대장군이 그를 방문하면 병을 핑계로 달아났는데 대장군이 그를 뒤따르자 다시 도망갈 정도였습니다.”

말미에 제갈량은 “이엄의 마음이 그 지경까지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이를 놔두면 아마도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 탄식했다. 

그밖에도 이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갈량의 권위를 깎아내리고자 했는데 무엇보다 북벌을 방해하여 제갈량의 진군을 여러 차례 좌초시킨 일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231년 제갈량이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자 이엄이 군량미 지원을 맡았다. 진군 중에 폭우로 군량미 수송이 지연되자 이엄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날조한 조서로 퇴각을 명한 뒤, 돌아온 제갈량에게 “군량미가 충분한데 어찌 퇴각한 것입니까?” 하고 책임을 전가했다. 

이전부터 줄곧 이엄의 횡포에 시달리던 제갈량이 마침내 증거를 찾아 그로부터 자백을 받아냈고, 이에 이엄은 파면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문신들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가령 한중 땅을 유비에게 바치는데 앞장선 개국공신 법정(法正)은 지나치게 인정에 매달려 제갈량을 종종 곤경에 빠트렸는데, 실은 문신들을 대표해 제갈량을 공격한 자도 그였다. 

221년 유비가 살아 있을 당시 법정은 한(漢) 고조가 기존 법령을 간소화한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진(秦)나라 백성을 감화시킨 일을 들어, 제갈량의 엄격한 법 집행을 규탄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그 배후에 제갈량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토호 권신들이 합세하고 있었으니 이를 받아들인다면 권력 누수, 즉 레임덕을 초래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되려 법정을 질책했는데 그가 보낸 공개서한의 내용이 아래와 같이 강경했다. 

“법정께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진나라의 통치는 실상 정도에 부합하지 않고 폭정을 실행하니 백성들이 이를 원망한 것입니다. 전임 통치자인 유장은 어리석고 유약해 엄정한 형벌을 관철하지 못하여 건전한 정치를 실행하지 못한 것이며, 촉한 지역의 군신들은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직위를 받고 그 직위마저 귀하게 여기지 않아 태만하고 나태하니 이로부터 폐단이 생겨난 것입니다. 마땅히 준엄한 형법으로 이들을 경계해야 법령이 실행될 수 있고, 그 후에야 무엇이 은혜인지 알게 됩니다. 은혜와 영화가 동시에 가지런해야 상하에 법도와 질서가 생기니,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삼국지 촉지 제갈량전』)

중국 백제성의 무후(제갈량) 사당. 백제성은 유비가 죽음을 맞아 후사를 제갈량에게 맡긴 곳이다.
중국 백제성의 무후(제갈량) 사당. 백제성은 유비가 죽음을 맞아 후사를 제갈량에게 맡긴 곳이다.

공정과 헌신의 표상, 법치의 모범이자 불굴의 전사
토호들이 홀로 서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는 그를 제압하지 못한 이유는 제갈량이 그야말로 공정과 헌신의 표상으로서 통치와 인사에 사익과 사견을 보탠 적이 없었고 공과를 구분함에 감정을 개입함이 없었고 상벌을 시행함에 상하를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개 시골 현의 공무원 출신이지만 강인한 절개로 거듭 무공을 세운 장의를 제갈량이 발탁했는데, 장의는 남만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워 보답했고 제갈량 사후에는 월 지방의 태수가 되어 15년간 남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강유는 시골 현의 하급 책사였는데 제갈량에 발탁되어 228년 약관 27세로 장군의 지위에 올랐고 제갈량 사후 대장군에 올랐다. 왕평은 “아는 것이라고는 글자 십여 자에 불과했다”는 인물이지만 제갈량이 그를 장군으로 삼았고 이어 요충지 수령을 맡겼다. 양홍이란 인물이 현의 하급관리로서 공무에 헌신하여 소문이 널리 퍼지자 제갈량은 그를 태수에 임명했다. 

이를 두고 진수는 『삼국지 양홍전』에서 “(기반이 없는 유비가 집권하여) 촉한 지역을 모두 평정한 것은 제갈량이 능히 당시 인재를 모두 중용했기 때문”이라 적었다. 

이 지점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갈량이 평생 일관되게 한 왕실의 중흥과 조적(曹賊, 조조)의 타도를 외친 데는 그 자신과 조조의 악연이 무관하지 않다.

제갈량의 고향은 서주 낭야군 양도현으로 삼국 당시 도겸 치하에 있었다. 후한말 헌제 흥평 원년 194년 여름, 조조가 2차 서주 공략에 나섰는데 이때 도겸은 유비의 도움으로 조조를 간신히 물리쳤다. 

당시 유비의 후원자인 공손찬이 유비를 별부사마에 임명하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와 싸웠는데, 유비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평원상에 임명했다. 그러던 중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자 서주목 도겸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도운 것이다.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탐욕에 눈먼 도겸의 부하 장기에게 죽자, 그 원한을 도겸에게 돌려 애꿎은 서주를 정벌한 것이다. 비록 조조가 물러가기는 했지만 무자비한 살육과 파괴로 서주는 가옥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태반이 죽거나 달아났다.

이로 인해 이듬해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일이다. 『삼국지 위지 장수전』에 따르면 조조의 만행으로 서주는 “천하 호구 열 중 하나가 겨우 살아남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조조 스스로 “백골이 들판에 나뒹굴고 천리 안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살아 있는 백성이 백에 하나니, 생각만 해도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이다” 하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무엇보다 제갈량의 고향인 낭야가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194년 여름 조조는 서주를 공격할 당시 낭야를 바라보며 “군대가 지나가는 곳은 남김없이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때문에 그 일대는 인적이 끊어지고 건물마저 잿더미로 화해 복구 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이로써 제갈량은 돌아갈 고향을 잃은 것이다.

제갈량이 전란에서 목숨을 부지해 남하했는데 그 와중에 형제가 생이별을 당했다. 이런 사정에서 형 제갈근은 계모와 함께 묘지를 지키고자 고향 양도현에 남았다 후일 강동으로 건너가 손권의 모사로 활동하게 된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를 섬기기로 하고 조조를 극도로 증오한 이면에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 더불어 융중은 동한 정권을 세운 광무제 유수의 고향이기도 해서, 제갈량이 천하 대업을 구상할 때 한 편 정치적으로 또 한 편 지리적으로 동기가 되어 주었다.

신출귀몰한 재사로서 제갈량은 연의에서 부각된 그의 일부 면모에 불과하니, 내정 책임자로서 제갈량은 공정과 헌신으로 일관한 법치의 모범이었고, 국방 책임자로서 제갈량은 가족과 고향 나아가 주군마저 잃게 한 불구대천의 흉적과 끝까지 맞선 불굴의 전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글·김선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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