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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DMZ의 문화유산 3 -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 묘

시그널은 잘 알려지지 않은 DMZ의 문화 유산을 탐방,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1.06.15 15:48
  • 수정 2021.06.1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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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과 도굴의 반전, 주인이 바뀐 고려 벽화묘

- 발굴과 도굴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이웃의 무덤을 탐하지 말라는 교훈이 아니더라도 사실 무덤을 건드리는 일은 동서양이 꺼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고금과 동서양이 다르지 않아 끊임없는 도굴과 발굴(발굴도 피장자의 처지에선 기분이 몹시 나쁜 일이다)의 역사는 이어져 왔다. 오늘날 박물관 유물의 상당수는 피장자의 동의 없는 부장품이다,

굳이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들지 않더라도 일제가 본격적인 조선 침략을 앞둔 시점에서 그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려청자였다. 청자의 나라 고려의 수도인 개성 주변의 많은 무덤은 이 시기에 상당수가 도굴당했다. 직접행동에 나선 일본인들, 하수인이 된 조선인들, 이런저런 다양한 도굴꾼들이 개성 주변 무덤을 뒤져 부장품인 청자를 모아 팔아치웠다. 그러한 청자의 대표적인 컬렉터 중의 하나는 조선 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가 청자에 대해 고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 왕실과 사찰의 예장품을 제외하고 대부분 청자는 당시 고려인의 생활용품이다. 생활용품은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사용하다 보면 이가 나가거나 자연스레 깨지게 된다. 어쩌다 몇 번 설거지를 하는 남편들이 그릇을 깨뜨려 얼마나 많은 부인의 원성을 들었던가……. 그러니 청자를 삼사백 년 동안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고려청자들은 무엇인가? 실상 대부분은 고려왕릉이나 권세가 무덤의 부장품이었을 확률이 높다. 무덤 안에 있었으니 오랫동안 원형 유지가 되어 왔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권력자들이 사패지로 하사를 받은 주요지역은 수도인 개성 주변이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한양과 개성 사이 파주, 장단, 고양에 걸쳐 상당히 많은 지역이 권력 집단의 사패지이거나 세력권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와 토지의 대물림은 현재로 이어져 왔다. 율곡, 황희 등은 쟁쟁한 이름들이 파주의 상징이 되어있는 이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민통선 DMZ 파주지역(개성과 가까운)은 그 땅의 후손들에겐 깨물지도 못하고 넘기지 못하는 목에 걸린 사탕이다. 달콤함은 느껴지는데 먹을 수 없는 안타까움의 대물림이다.

이곳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민통선 지역에 고려벽화 묘가 있다.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 묘 전경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 묘 전경

수천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 속의 벽화는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종교 또는 세계관이나 지역 간의 교류 등 기록으로 알 수 없던 과거에 대해, 비록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더라도 옛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분 벽화 대부분은 고구려인들의 것이다. 고구려는 무덤 내부에 다양한 생활 모습이나 염원이 담긴 벽화를 남겼고 중국 집안이나 북한 지역의 다양한 고분 벽화 중 상당수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반면에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는 고분 벽화가 상대적으로 드물게 나타나는데 이는 백제, 가야신라와 고구려와의 묘제의 차이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는 벽화고분이 등장하지 않다가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가 들어오면서 석실 벽화분의 전통이 상당수 되살아난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는 주로 화장을 했으므로 커다란 분묘를 만들 필요가 없었으나 왕실이나 귀족층에서는 여전히 커다란 석실묘를 조성하고 그 내부에 벽화를 그렸다, 이러한 고려왕릉과 귀족층의 대부분이 개성 주변에 조성되어 있어 현재 화려한 고려고분벽화를 연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이런 와중에 1990년대 초 현재의 민통선 지역에서 고려 벽화묘가 발견되었다.

사실 이곳은 민통선 안쪽이고, 청주한씨의 시제묘라서 청주한씨 종친회가 관리해 온 특수지역인데, 어느 날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고, 내부에 벽화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청주한씨 종친회의 양해를 얻어 발굴이 진행되게 되었다, 사실 조상묘를 발굴한다는 것은 후손들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발굴당시 1991년 묘소주변
발굴당시 1991년 묘소주변

당시만 해도 지뢰 사고가 빈발했고 지뢰 지역에 대한 안전조치가 다 끝나지 않은 환경이라 발굴단의 지뢰에 대한 공포심은 발굴현장에 상당한 위축감을 들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나 현지의 발굴 보조 인력의 30%가 지뢰 피해를 본 분들이라 긴장감이 더욱 컸다고 한다.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 묘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 묘

고려벽화 묘는 낮은 언덕 위에 청주한씨의 시제묘가 있고 그 위에 1기의 묘가 더 있는 상하 두 개의 묘, 하단 묘 옆에 장명등과 문석인 그리고 묘비가 있었다.

묘역의 서수와 부서진 장명등
묘역의 서수와 부서진 장명등

 

문열공 한상질 묘비
문열공 한상질 묘비

묘비에는 문열공 한상질의 묘라고 적혀있고 음기(뒤편)는 상당히 마모되었지만, 한상질의 13대손이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래의 벽화묘가 한상질의 묘라고 생각되었다. 한상질(韓尙質)은 조선 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이란 국호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세조 때 권신 한명회의 조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발굴 내내 청주한씨 문열공 종중의 관심과 후원이 이어져 왔다.

벽화묘 내부의 십이지신 벽화
벽화묘 내부의 십이지신 벽화
묘 천정의 성수도
묘 천정의 성수도

무덤 내부 4방향의 벽체에서는 십이지 동물의 형상을 그려 넣은 12명의 인물상이 발견되었고, 천정에는 밤하늘의 별자리 그림을 그려 넣은 성수도(星宿圖)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부족하나마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고려벽화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발굴과정에서 발견한 묘지석(무덤 주인의 이름, 행적 기타 내용을 적은 돌)으로 인해 대반전이 일어난다, 묘지석에는 증시창화권공묘명(贈諡昌和權公墓銘)이라 적혀있어 내용을 일부 판독한 결과 묘의 주인은 한상질이 아니라 고려 시대 후기의 길창부원군 권준(權準)의 묘로 밝혀졌다.

새로 세워진 권준 묘비
새로 세워진 권준 묘비

오랫동안 청주한씨의 시제묘로 여기고 600여년간 제사를 지내온 청주한씨 종친회에 멘붕이 오는 순간이다.

결국, 이로 인해 안동권씨 창화공파 종중과 청주한씨 문열공파 종중 사이에 분묘기지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게 됐다, 그리고 소송 끝에 대법원은 안동권씨 종중에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판결하게 된다. 한상질 사후 6백 년 만에 무덤의 주인이 바뀌게 된 것이다. 도굴 흔적이 없었더라면, 발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청주한씨 종중에는 깊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실 안동권씨와 청주한씨 가문은 서로 혼인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사실 권준은 고려말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준 6학사중의 하나인 권부(權溥)의 아들이다. 아버지 권부의 학문적 위치와 권준의 활약으로 권준 집안은 고려 후기의 명문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권준의 차남 권적(權適)의 사위가 공민왕 때의 권신인 한수(韓脩)이다. 한수의 무덤도 고려벽화 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다그리고 한수의 차남이 한상질이니 사실상 권준과 한상질은 외증조부와 외증손자 관계이다. 청주 한씨 쪽에서도 외가와 관련된 제사를 600년 지내온 것이니 굳이 기분 나쁠 일은 아니다

한상질의 부친, 유항 한수묘
한상질의 부친, 유항 한수묘

고려말, 개혁을 시도하던 공민왕은 반개혁세력의 반발과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본인이 꾸린 자제위들에 의해 거꾸로 시해를 당하게 된다 (자제위 사건). 당시 승승장구하던 권준의 후손들은 공민왕의 시해와 관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고, 사위였던 한수는 몰락한 처가(안동 권씨)의 제사를 잇고, 송도 등지의 세거지에서 권부와 권준의 학통도 계승하게 된다. 즉 몰락한 안동권씨의 뒤를 청주한씨 집안에서 돌보게 된다, 아직은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어떤 이유로 현재와 같은 상황(역적 집안이 된 무덤의 주인을 숨기기 위해서거나 혹은 혼동이 오게된)에 부닥쳤을 가능성이 크다. 도굴로 인한 벽화묘의 발굴로 분묘기지권과 묘의 주인 등 문제가 새로이 정리되게 된 것이다.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고려벽화 묘의 발견은 벽화보다는 오히려 민통선 지역 권력자들 연구에 흥미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곡리의 고려벽화묘, 근처의 유항 한수 묘, 철책 너머의 또 다른 흔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끊임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 벽화묘는 민통선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 연구의 가능성이자, 남북교류의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갈지에 대한 또 하나의 물꼬이기도 하다.

철책이 우리의 마음마저 갈라놓을 수는 없기 떄문이다.

< 우문현답  이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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