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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칼럼] 외교의 실패를 피하기 위한 조건

  • 기자명 연합뉴스
  • 입력 2018.12.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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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훈 논설위원 = 2000년 말, 임기를 두석 달밖에 남기지 않았던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막판까지 북한 방문을 심각히 고려했다. 하지만 임기 종료까지 남은 짧은 시간, 성공 확률이 더 높다고 봤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평화협정에 치중하기로 선택하면서 미국 대통령의 첫 방북 추진은 무산됐다. 클린턴의 기대와는 달리 팔레스타인 지도자였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서명을 거부하면서 중동평화협정도 체결되지 못했다.

클린턴이 중동평화협정 대신 평양행을 선택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 있다. 북미 간에는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생산 중단을 내용으로 하는 미사일협정이 그때 체결됐을 것이고,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도 지금쯤 성큼 진전돼 있었을지 모른다. "아라파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때 북한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클린턴의 뒤늦은 후회가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클린턴의 선택을 바꿀 외교에, 남도, 북도 실패했다.

[연합뉴스TV 제공]

 

18년 만에 또다시 기회가 찾아온 한 해였다. 시각과 진영에 따라 평가와 전망이 엇갈리지만, 2018년 12월 초의 한반도 정세가 1년 전보다 더 안정됐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제 안정과 관리를 넘어 평화정착을 위한 구체적 성과 수확이 문재인 정부 외교의 무거운 숙제로 던져졌다.

클린턴 정부 후반기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외교'의 근본적인 목적을 "다른 나라가 우리가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목적을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도구는 정중히 부탁하는 것부터 해병대를 보내는 것까지 다양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외교의 목적 달성은 효과적인 외교적 수단과 도구의 사용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되돌아볼 지점이 있다. 6월 북미 정상회담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한미연합훈련 중단 문제는 사전에 한국 정부와 정교한 협의가 이뤄진 발언이 아니었다. 9월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체결된 남북군사합의서 내용을 두고서는 한미 간에 완벽한 협의가 진행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징후도 표출됐다. 한미 워킹그룹 가동과 남북철도 연결을 위한 북한 내 철도 공동조사에 대한 제재 면제가 합의됐지만, 남북 경협의 속도와 제재 완화 등을 놓고 한미 간의 온도차가 다시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핵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로 한 비핵화 외교는 냉정히 따져보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 비관론을 펼치자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외교적 도구들의 사용조차 제대로 조율되지 않거나, 수단이 시의적절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최종 목표 달성은 더 어렵게 될 수밖에 없는 건 자명하다.

반대로 외교적 수단과 도구가 잘 준비되고 사용된다면 당장은 비현실적 목표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에는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올브라이트는 "준비만 되어 있다면 오늘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이 내일은 손안에 떨어질 수도 있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최종 목표 도달을 위한 외교적 수단들의 정교한 사용 로드맵 마련과 공감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북미 간에 신경전이 펼쳐지는 대북 제재는 결국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의 하나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끈 데에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대북압박 공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세가 바뀐 지금, 제재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제재 문제를 포함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전체 외교적 수단의 사용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 정교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때는 '연내 종전선언 추진'에 대부분의 무게를 두는 듯하다가 '대북제재 완화' 이슈 강조로 넘어가는 듯하더니 다시 '제재 유지'를 말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목표 도달까지의 설계도와 이행 세부계획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때문이라면 문제가 있다.

미국의 외교 석학인 헨리 키신저는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도덕보다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현실보다 이상에만 치우친 외교는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집중적인 노력이 펼쳐진 지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의 외교 수단은 현실에 기반해 제대로 설계되고 사용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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