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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광주에서 삼각산과 한강을 바라보다 [최철호 칼럼]

  • 기자명 양동균 명예
  • 입력 2018.12.1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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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천혜의 요새_남한산성에서 바라 본 삼각산과 한강

 

[미디어파인=최철호의 한양도성 옛길] 김훈의 ‘남한산성’ 책 속 글을 생각하며 세찬 바람속에 남한산을 오른다, 피난길이 아닌 순례길이라 여유있다. 전쟁터가 아닌 힐링터라 성안과 성밖을 시나브로 거닌다. 남문을 지나니 성곽길이 이어진다.

 

정상을 향하는 길은 힘들지만 상쾌하다. 성곽길 따라 한참을 오르니 암문이 보인다. 머리를 숙이고, 암문을 통해 성밖을 나선다, 성벽은 높고 성돌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남한산성은 4개의 문과 16개의 암문이 있다. 유난히 암문이 많다, 역사의 현장이다. 남한산성 영화를 생각하며 걸으니 벌써 정상이다.

 

▲천혜의 요새_광주 남한산성에서 바라 본 한강과 서울

 

남한산 정상은 479.9m이다. 동서남북 중앙에 장대가 있다. 3개의 옹성과 4개의 성문 그리고 4개의 장대가 있었다. 현재 유일하게 서쪽에 남아 있는 2층 누각의 장대가 위엄이 있다. 2층 누각은 대표적인 산성의 장대이다. 수어장대다. 수어장대에 올라 먼 발치를 바라본다. 저 멀리 한강과 삼각산이 손에 잡힐 듯 한뼘 크기다. 남한산 정상에 성을 쌓으니 남한산성이다. 한양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산 836.5m에 북한산성을 쌓고, 한강 아래 남한산에 남한산성을 쌓아 행궁지로 삼았다. 우리나라 산성 중 시설이 가장 잘 완비된 천혜의 요새다.

 

남한산성과 광주의 유래를 찾아서

 

▲남한산성 정상의 수어장대_4개의 장대 중 유일한 위엄있는 모습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중요한 접경지다. 한강을 지배하는 자 천하를 지배한다며 삼국이 치열한 공방전을 하였던 곳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강 유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백제 온조왕때 한강을 끼고 도읍지 성을 쌓는다. 하북 위례성과 하남 위례성은 백제의 도읍지이었다. 한강 아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지어 376년간 백제의 한성도읍지를 이어간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는 웅진도읍지와 사비도읍지로 금강을 따라 천도한다. 신라 문무왕때 산 정상에 해가 가장 길어 일장산(日長山), 주장산(晝長山)이라 하였다. 이 산에 성을 쌓으니 주장성이다. 산 깊고 물 많아 철옹성의 시작이다. 남한산성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축성하였다.

 

고려시대 한강 아래 하남(河南)은 광주(廣州)로 불리는 넓고 큰 너른 고을이었다. 몽골의 침입때에도 강화도와 광주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거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경기도라는 이름전에는 양광도라 하였다. 한양도성 밖 양주와 한강 아래 광주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이며 중심지다. 광주부는 광주 유수부(留守府)라 하여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직할시와 같은 곳이었다. 북쪽에 개성, 서쪽에 강화, 동쪽에 광주, 남쪽에 수원에 유수부를 각각 두었다.

 

▲남한산성 4개의 성문과 16개 암문 중 하나_성밖에서 바라 본 성안

 

군사, 교통의 요충지 너른 도시 광주를 거닐다

 

광주는 남한산성을 품고 성안과 성밖에 펼쳐져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삼각산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의 외성을 쌓았다. 한강 아래 남한산 자락으로 산과 산 사이에 성벽을 쌓고, 성문을 연결한다. 주봉인 청량산 중심으로 연주봉, 망월봉과 벌봉을 연결하고, 성벽과 산성을 잇는다. 또한 우물을 파고, 농사를 짓는다. 우물 80여곳, 샘 45곳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산성을 쌓았다. 남한산성 11.76km 돌로 쌓은 국내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남한산성 4개의 성문 중 남문_지화문

 

성을 쌓고, 행궁을 조성한다. 임금이 거처 할 행궁은 상궐(上闕)과 하궐(下闕)이다. 종묘와 사직단도 만든다. 좌전우실이다. 종각까지 만들어 한양도성의 축소판으로 활용한다. 또한 남한산성 동서남북 성문에 현판을 건다.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의미있는 이름이다. 동문인 좌익문(左翼門)과 서문인 우익문(右翼門),남문인 지화문(至和門)과 북문인 전승문(全勝門)이라 짓는다. 정조는 어떤 의미로 좌익문과 우익문의 이름을 남겼을까. 병자호란 47일간 버티었던 그 추위가 몰려온다. 대설 추위에서 동지로 넘어가는 동장군의 기세가 느껴진다. 해가 떨어지고 추워진다. 주전론의 김상헌과 주화론의 최명길의 논쟁을 잠재우는 글씨다. 역사의 아이러니와 깊은 뜻이 숨겨져 가슴 절절하다.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앞 비석군

 

한양도성처럼 남한산성은 과연 누가 쌓았을까? 전국에서 동원되어 성을 쌓았다. 특히 전국 8도의 승군이 동원되었다. 남한산성 주변에는 승려들을 위한 사찰이 많다. 망월사, 옥정사, 국청사, 동림사, 개원사, 천주사, 한흥사, 장경사등 성안에 절이 있다. 이곳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전국 8도 승군의 주석처이며,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 수비하던 곳이다. 나라를 지키고 국가의 방위에 승려가 동원되었으니 항마군(降魔軍)이라 하였다.

 

철옹성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철옹성 남한산성 성밖에서 바라 본 높은 성벽

 

380여 년전 남한산성에서 청군 10만 대군애 맞서 47일간 항전한 곳이다. 남한산성에 주전파와 주화파가 난립하는 동안 강추위와 굶주림에 군사는 죽고 백성은 떠난다. 결국 남문을 통해 피난 온 인조는 서문을 통해 삼전도에 나가 항복 의례를 한다.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목숨을 보존하며 긴 암흑기에 접어든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천혜의 요새이다. 난공불락 철옹성이다. 전략을 가지고 전술을 짜고 역사를 살핀다면 역사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행궁지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단이 있는 임시수도_남한산성 한남루

 

남한산성 가는 길은 역사의 답사길이다. 한강을 거슬러 하남을 거쳐 광주향교를 보고, 광주 남한산성에 가보자,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역사와 문화, 자연을 만날 수 있는 한양도성 옛길을 이어보며 시간여행해 보자.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의 장이다.
600여 년의 숨결이 문화속에 머문다.
4계절 24절기 강추위 속에도 성곽길은 늘~ 따뜻하다.

 


▲최철호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저서)‘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최철호 소장]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지리산관광아카데미 지도교수
남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외래교수

 

저서: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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