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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이야기?⑤ 리무진을 타고 온 신사

범주화의 오류가 초래하는 닫힌 세계

  • 기자명 김진욱/기획위원
  • 입력 2019.01.07 09:30
  • 수정 2020.03.2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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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욱/시그널 기획위원

 

[필자주] 자소서는 필자가 2016년 모바일 앱 개발회사를 퇴직하고 인생 이모작을 준비할 즈음 우연한 계기로 <랭어 연구소>와 협업하며 진행한 한시적 프로젝트였다. 자소서에 관심을 둔 이유는 몰개성을 양산하는 교육, 어른들을 포함한 동시대인들이 가진 마인드셋(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거울같았기 때문이다. 개성이 죽고 획일화된 사고가 극복되지 않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다해도 풍요한 정신적 삶은 요원할 것이다. 이 연재는 학생을 위한 글이 아니라 '자소서'를 소재로 우리들 고정관념을 반추하는 글이다(물론 자소서 작성에도 도움이 된다). 본 연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맥락전환의 기본원리 / 맥락전환은 쉬운가 / 자동반응 / 자동반응의 다양한 형태들 / 범주화의 오류가 초래하는 닫힌 세계 / 진실을 억압하는 통념들 / 논리와 표현 / 태도 그리고 서술 / 사실과 의견의 구분 / 싫은 삶의 대안적 가능성 / 맥락전환의 선각자들

 

1

한번은 등산학교 강의를 수강하는데 강사님이 수강생에게 질문했다. "산행의 목표는 뭘까요?" 다양한 답이 나왔다. 선생님이 정리했다.

“여러분, 산행의 목표는 집에 잘 돌아오는 것입니다.”

수강생들이 웃었다. “하하하”.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는 것은 산행에서 좋은 목표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정상을 갔다 한들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산 등정이라는 중간 목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산행에서 바람직한 최종 목표는 집에 돌아오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목적은 뭘까? 목적과 목표 이 둘은 비슷한 듯 다르다. 산행의 목적은 뭘까? 필자에게 묻는다면 '대자연을 호흡하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왜 집에 돌아오는가? 집에 돌아와야 대자연을 벗 삼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산행을 다음에 다시 할 수 있다. 요컨대 '안전하게 집에 돌아온다'는 목표는 '대자연과 호흡하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필자의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이때 대자연과 호흡한다는 목적은, 즐겁게 산행하고 집에 무사히 돌아온다는 목표를 통해 실현된다. 즉 목적은 목표를 통해 실현된다. 역으로 목표는 목적을 위해 복무한다.

*목표란 '활동을 통하여 이루거나 도달하려는 실제적 대상으로 삼는 것' 혹은 '조준, 사격, 공격 따위에서 눈으로 목적 삼은 곳을 정한 표'를 말한다. 반면 목적이란 ‘이루려고 하는 일이나 방향'을 말한다(다음 사전).

 

2

“입학 후 자기 주도적으로 본인의 꿈과 끼를 살리기 위한 활동계획 및 학교 졸업 후 진로 계획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십시오”라는 질문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이렇게 답했다.

“XX에 들어가면 수업을 잘 들으면서 XX 과목에 대한 기초를 튼튼히 할 것이다. 또한, XX와 관련된 책을 읽어서 관련 지식을 쌓겠다. 학년이 올라가면 심화 공부를 할 것이다. XX 위주로 공부를 많이 하겠다. 동아리 활동으로는 “XX”에 가입해서 교내 고사 예상문제들을 풀어서 내신을 관리를 잘하겠다. 하지만 공부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봉사활동도 하겠다. 졸업하고 나서는 XX대학교 XX대학 XX과에 입학해서 학문적 깊이를 더 할 것이다.”

십중팔구 보는 흔하디 흔한 답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XX대학, XX과를 목표로 한 이유, 즉 목적은 뭘까? 왜 이런 일들이 우리 어린 세대들에게 벌어질까? 위에서 응답자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십시오”라는 문구에 꼼짝 못 하고 사고가 묶여 있다. 이런 태도는 ‘구체적으로’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데서 온다. 

 

 

문짝 실험이라는 게 있다. 랭어 교수(하버드대 심리학과, 종신교수)가 실제 했던 실험이다. 롤렉스 시계를 찬 신사가 새벽 문을 두드린다. 잠이 덜 깬 당신이 놀란 마음에 서둘러 현관문을 연다. 남자 뒤에는 호화로운 리무진이 눈길을 끌며 주차되어 있다. 안면 하나 없는 이 남자는 잠을 깨워 미안하다며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친구들과 물건 찾아오기 내기를 했는데 만약 당신이 그 물건을 찾도록 돕는다면 보답으로 당장 현금 2만 달러를 주겠다는 것이다.

당신은 속으로 ‘돈이 많아 보이지만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다. 남자는 문 앞에 선 채 자신이 필요한 것은 가로 90, 세로 210㎝ 정도의 나무판이라고 덧붙인다. 이쯤 되면 목공소나 근처 대형할인점으로 가면 될 것을 왜 그 남자가 당신 집 앞에 서 있는지 한심해지기 시작한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 새벽에 당신 집에서 그런 나무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 실험에서 새벽에 낯선 남자의 제안을 받은 대부분 사람은 주변에서 나무판을 찾아내지 못했다. 2만 달러를 받을 수 있는 제안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2만 달러가 될 수도 있는 나무판이 매우 흔하다. 남자와 대화가 이루어지던 현관문도 후보가 될 것이다. 또는 집안 식탁이나 서재의 책상도 마찬가지다. 나무로 만든 현관문이 결국 나무판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식적 발상이지만 집주인들에게는 그 상황에서 자기 집의 문짝이 나무판으로 맥락이 전환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의 고정관념은 이미 문과 나무판이라는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기능적 범주화'의 오류 속에 있다.

즉 문짝은 문짝이라는 기능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범주화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모아 하나의 종류나 부류로 묶는 것이다. 기능적 범주화란 문과 나무판이 각자 기능이 다르며 그것은 이미 고정 불변적으로 분류,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다).

위 자소서도 마찬가지다. 응답자에게 '구체적'이란 단어는 위 실험의 '가로 90, 세로 210센티 나무판'과 다를 바 없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응답자가 이해하는 구체성이란 ‘어느 과목’, ‘어느 동아리’, ‘어느 학교’, ‘어느 과’이다. 질문에서 ‘구체적’은 구체적 경험, 구체적 깨달음, 구체적 느낌, 구체적 생각, 일상 등을 자기가 세운 계획과 적절히 연계해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의미에서의 ‘구체적’이다.

하지만 응답자는 구체적이라는 말을 '굳이 상관없는 구체적 정보를 거론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쓸데없이 동아리명, 학교명, 학과명을 거론한다. 하지만 “S대 프랑스어과를 가서, 프랑스의 P대를 유학한 후 한국 Y대에서 교수가 되겠다”는 것은 구체적인 게 아니라 구체성의 무수한 예중에서 ‘학교, 학과’만 생각한 것이다. 범주화의 오류로 인해 '구체적'이라는 단어에 갇혔다. 자동 반응의 또 다른 예이다.

내가 가진 구체적 동기, 예컨대 평소 관심사와 관련된 내용, 아니면 내가 가진 직업, 꿈, 학교에 대해 실제로 탐색해서 구체적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어떨까? 그에 대한 나의 소견을 표현하면 어떨까? 예컨대 집에서도 가깝고, 졸업한 선배들도 훌륭하고, 내가 원하는 만화 분야 동아리도 있고 등등 무엇이 되었든 좋다. 구체적인 것은 무궁무진하다. 

 

3
졸업 후 진로 계획 즉 목표는 뭘까? 진로 계획이 꼭 무슨 학교여야할까? 그렇다면 무슨 학교 XX과를 왜 가는가? 그 과를 목표로 하는 목적이 무언가?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동기'나 '이유'없이 계속 '계기'만 말하는 것과 같다(이유와 동기, 계기의 구분은 4편 이시영 편을 참조할 것). 구체적 계획 없이 구체적인 형식만 늘어놓는 것과 같다. 형식이 아닌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라. 목적을 말하지 않는 자소서는 나(自) 없는 자소서 즉 소서(紹書)다.

반대로 '나'가 있는 자소서를 작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평소 생각이 뭐였는지 스스로 묻고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오늘 요지는 이것이다. (1)목표와 목적을 구분하라. 그리고 목적을 말하라.  (2)하나의 맥락, 즉 범주화의 오류에 갇히지 마라. 그리고 이쯤되면 다시 궁금해진다. 이게 자소서 작성만의 요지일까? 

 

____

필자: 1985~1996년 성균관대 수학. 전 인포허브, 네오엠텔 본부장 등 모바일분야 IT업계 19년 근무. 스토리텔링 회사 <꿈틀> 기획이사를 거쳐 현 미니기업 <투와캠프> 운영 및 자영업. 꿈틀 재직 시 엘렌 랭어의 한국인 제자들이 설립한 심리연구소 <엘 엠 아이 코리아>와 협업해 랭어 긍정심리학을 기반한 <마인드풀 자기소개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메가스터디 윈터스쿨> <알로곤 학원> 등에서 강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적 강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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