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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방성호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네덜란드 로테르담 콘서바토리 부학장 권유로 지휘자 입문...명장 반열에 올라

  • 기자명 조봉수
  • 입력 2019.06.03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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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호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 사진=조봉수 기자

- 1997년 귀국해 수원시립교향악단서 금난새 영향 받아
- 2003년 수원시향 활동 중에 사재 들여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
- 2011년부터 2년간 '조수미 한국·아시아투어 공연' 도맡아..."가장 기억에 남는 여정 중 하나"

갑작스레 찾아온 불볕 더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초여름날 오후 방성호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났다.

방성호 지휘자는 수원 시립교향악단 부 수석, 수원 유스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용인 신포니에타 음악감독겸 상임지휘자 등을 거쳤으며, 현재는 2003년 직접 창단한 웨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겸임하면서 바쁜 연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특히 해를 거듭할수록 국내 음악계에서 웨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가 차지하는 위상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이의 운영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그의 명성도 점차 오르고 있다. 

마침 기자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로 방성호 지휘자를 찾아간 날은 제37회 천주교재단 자선음악회 '그대있음에'의 리허설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여져 있던 공연 당일이었다. 

이날 저녁 7시에 개막하는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해 방성호 지휘자의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테너 류정필, 명창 안소은, 가수 정동하, 뮤지컬배우 정영주·정성화, 클래식 보컬그룹 유엔젤보이스, 소프라노 박성희, 바리톤 고성현, 음악인 장사익 등 클래식계와 대중음악계에 익히 알려진 음악인들과 미리 호흡을 맞추는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한 방성호 지휘자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은 기자와의 일문일답.

 
기자: 음악을 처음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방성호: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중학 진학 직후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제 음악적 성향에 맞았던 클라리넷으로 악기를 바꾸게 됐어요. 그후 고교 졸업 때까지 클라리넷을 꾸준히 연마해 네덜란드로 유학 갈 실력을 갖추게 됐죠.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될 줄은 몰랐죠.

기자: 고교 졸업 후 바로 네덜란드 대학과정으로 진학하신 거군요?

방성호: 그렇습니다. 나중에 수도 암스테르담의 '암스테르담 시벨리움 콘서바토리에서도 수학한 적 있지만, 정규 과정은 네덜란드 제2의 도시인 로테르담에 있는 '로테르담 콘서바토리'에서 클라리넷 전공 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죠. 

기자: 그럼 지휘자 수업을 받은 것은 언제인지요?

방성호: 입학 초기에 그곳 부학장님이 절 한동안 관찰하시더니 하루는 제게 만약 지휘자를 해본다면 잘할 것 같다면서 이 과정을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부학장님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눠보니 지휘자라는 역할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조금씩 커지게 돼 그후 클라리넷 전공과 더불어 지휘자 과정도 꾸준히 이수할 동기부여가 된 계기였죠.

기자: 네덜란드 유학을 마친 후엔 어떤 행로를 택했는지요?

방성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게 1997년, 제가 32살때였죠. 마침 우리나라에 IMF 경제위기가 불어 닥쳤던 때라 문화예술계에도 찬바람이 불곤 했었는데 그 와중에 운 좋게 수원시립교향악단에 클라리넷 주자로 합류할 수 있었어요. 수원시향을 이끌고 계시던 금난새 지휘자님으로부터 지휘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한 많은 배움이 있던 시기이기도 했죠.    
그곳에서 세계적인 대가로부터 초임 지휘자까지 수많은 지휘자들을 접해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오케스트라라는 '큰 악기'를 한번 해봐야겠다"는 꿈을 더욱 구체적으로 품게 됐어요.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제공

기자: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WSO')를 창단하게 된 과정과 기억에 남는 활동을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방성호: 2003년 수원시향에 있으면서 사단법인 형태로 '웨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했어요. 수원시향의 단원 일부와 국내파 및 해외파 젊은 연주자들이 추가로 합류해 한국 클래식음악계에서 꽤 지명도 있는 진용을 갖추고 출범하게 됐어요.
2011년부터 2년 동안 '조수미 한국·아시아투어 공연'을 도맡아 진행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기자: 대기업이나 정부, 지자체 등의 지원은 없었는지요?

방성호: 기업체의 스폰서나 정부지원 없이 제가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운영했어요. 시쳇말로 '교향악단 운영하던 지휘자들이 집 한두 채 날려먹는 일은 드물지 않다'고들 하는데 저도 그런 식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죠. 

기자: 수원시향을 완전히 떠나게 된 때는 언제인지요?

방성호: 제가 WSO를 2003년에 창단한 후 2011년까지는 수원시향의 부수석연주자와 WSO 상임지휘자를 겸임하고 있다가 2012년도에 수원시향을 사직하고 온전히 WSO만을 위한 길을 걷게 됐죠. 다시 말해, 지휘자라면 지휘자의 지위만을 가져야 하는데 지휘하다가 오케스트라 운영이 어려워지면 연주자로 전환하는 식의 모양새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커져 사임에까지 이르게 된 거죠. 

기자: 수원시향을 그만둔 후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방성호: 2012년 사표를 내기 전까진 수원시의 별정직 공무원으로서 호봉제에 따른 소득 보장 및 금융·대출·보험 등에서 좋은 조건을 누릴 수 있었으나 사직 후엔 사회적 제약이 많아지면서 냉혹한 현실에 처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번도 불평·불만·좌절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보람과 자부심으로 이겨낸 거죠.
특히 2014년 봄부터 2016년 겨울까지는 세월호-메르스-촛불정국이 이어지면서 저희 WSO도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거나 섭외 중이던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고통스러운 시절이 이어졌죠. 떠나는 단원도 많았고요. 

기자: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WSO의 최근 근황과 향후 전망은 어떨지요?

방성호: 2017년부터 서서히 WSO에 공연 요청이 늘어나고 세간의 평가도 더 높아지면서 지금은 내공과 에너지가 상당히 올라가 가히 국내 정상급 오케스트라 중의 하나로 인정 받게 된 상황이죠. 
그렇지만 정권 교체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로 정부나 광역단체·지자체 차원의 지원을 받은 적은 없어요.
향후 대북관계 개선으로 북측과의 스킨십이 강화되면 문화예술계 남북교류에 대한 사회 인식도 높아질 것이므로, 문체부의 지원여부를 떠나 저희 WSO의 공연 기회도 함께 늘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자: 클래식음악계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계 전반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방성호: 해방 이후 경제개발 일변도이던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문화예술 분야의 투자가 많이 미흡했음을 알 수 있죠. 이젠 북유럽 선진국민들과 견줄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춰야 합니다.
2차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강제 분단된 냉전 시기에 서베를린 시장이 시내 한복판에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추진해 당시 많은 서독인들에게 비난을 받았어요.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게 가장 절박한 시기라 강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국민들과 베를린 시민들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는 시장의 결기가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었기에 지금도 저들의 높은 자존감의 상징물로 기억되고 있죠. 
한국 사회에서 문화예술은 선택 사항이라는 인식이 아직 많아요. 지나보면 문화예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요소임을 알게 되죠.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만 있으면 실천이 잘 되지 않아요. 시민들의 근본 의식이 점차 바뀌어야 합니다. 

기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사례이군요. 올해 WSO 활동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방성호: 단원들 거주지는 서울, 용인, 수원, 성남 등 거의 수도권이지만 저희는 부산, 광주, 전주, 영광 등에서 최근 콘서트를 열었고 앞으로도 국내외 어디든 저희와 만나고자 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흔쾌히 갈 생각이에요. 현재 수원에 WSO 전용 스튜디오를 마련해 내부공사를 하는 중이에요.  

기자: 우리나라 음악교육 스타일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방성호: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높아 조기교육 붐이 지배적이죠. 하지만 음악을 배운다는 의미가 전공자를 위한 스파르타 형태의 주입식 교육이던 옛날 방식은 이제 재고해봐야 해요. 음악·미술·문학을 배운다고 해서 모두가 음악가·미술가·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편견도 깨면서 엘리트 교육에 대한 집착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고 봐요.
예컨대 가구나 전자제품 하나를 만들어도 그 안에 단지 기술만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 안에 음악·미술·사람의 감성 등이 다 녹아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죠. 금속 한 조각에도 호흡과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이 필요하고요. 
그런데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어릴 때부터 평소 생활 속에서 접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감성과 이해, 철학 같은 것들이 포괄적으로 구현되어야 창조적인 컨텐츠가 생성된다고 봐요. 

기자: 일반 시민들이 클래식음악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조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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