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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연재]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4. 극복)

채희태의 시대진단 #7

  • 기자명 채희태
  • 입력 2020.06.04 11:54
  • 수정 2020.06.0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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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태의 시대 진단,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마지막 편입니다.


4.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가짜뉴스는 음모론과 달리 권력을 가진 둘 이상의 악한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또한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자신의 주장을 가짜뉴스로 인식하지 않거나, 못한다. 그저 자신의 심리적 생존 즉,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쯤으로 인식한다.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무모한 방법은 가짜뉴스에 직접적인 물리력을 가하는 것이다. 물리적 압력을 받은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자신의 이익(=생존?)을 지키기 위해 더 강력한 가짜뉴스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짜뉴스를 둘러싼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뉴스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만약 내가 단번에 가짜뉴스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말할 수 있다면 카페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2,900원짜리 커피나 홀짝이며 글이나 쓰고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시작했으니 어설픈 제언이라도 하는 것이 글을 시작한 이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들어나 보시라~

 

우리는 우리를 고통으로 내 몰고 있는 사회문제를 대할 때, 그 고통의 절박함에 쫓겨 조급한 해결책을 내놓아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속담으로 말하면 꽁꽁 언 발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오줌을 누는 격이다. 당장은 얼어있는 발을 녹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줌이 찬 공기를 만나 발을 더 꽁꽁 얼게 만들어 결국 동상에 걸리게 된다. 사회문제는 사회가 안고 있는 병이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기 전에 하는 행위가 바로 진단이다. 사회문제도 다르지 않다. 처방을 하기 전에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어설프나마 가짜뉴스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그 폐해를 언급한 것은 가짜뉴스를 객관적으로 진단해 보려는 시도다. 진단이 주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름 음모론이라는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도입해 보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제 어설픈 진단에 기초에 그 대안에 대해 고민을 해 보자.

가짜뉴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가짜뉴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가짜뉴스를 없애기 위해선 그 원인이 되는 이 사회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류를 없애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게 무슨 대안이냐고? 그 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일단 가짜뉴스가 판치는 이 사회를 견디는 수밖엔 없다. 그 고통을 견디기 싫어 조급한 대안을 내놓는 것보다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이 오히려 가짜뉴스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사회문제는 마치 수렁과도 같아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앞서 가짜뉴스를 정의하기 위해 음모론을 소환했던 것처럼, 가짜뉴스를 견디기 위해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을 가져와 보자. 만약 가짜뉴스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다면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을 프레임이라는 링 안에 가두어 놓고 시작한다.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더 강력한 프레임에 갇힐 수 있다고 조언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가장 강렬하게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짜뉴스도 대중들의 반응대중들이 가짜뉴스에 반응하면 반응할 수록 가짜뉴스는 더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하물며 확인되지도 않은 가짜뉴스를 바탕으로 섣부르게 입장을 정하고,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서로 물고 뜯는 것은 가짜뉴스의 생산자가 파 놓은 웅덩이에서 스스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프레임의 구조를 분석한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프레임의 구조를 분석한 "조지 레이코프"

얼마 전에 교육 거버넌스 관련 논문을 쓰며, 거버넌스를 하기 위해선 첫째, 주도를 걷어내고, 둘째, 상수가 아닌 변수를 조작해야 하며, 셋째, 현재의 이해관계가 아닌 미래를 합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전에 거버넌스에 대한 선행 연구를 살펴보며 거버넌스가 국가 정책의 실패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주도권을 시장(시민?)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정책의 실패 이전에 이미 우리는 시장의 실패를 경험했다. 국가와 시장은 대체가 아닌 보완의 관계다. 그런데 자꾸 서로의 책임을 물으며 네가 못했으니 내가 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진정한 거버넌스는 누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가진 역할과 시장이 가진 역할을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가짜뉴스에도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해 내는 사람을 죽여 없앨 수 없다면, 왜 가짜뉴스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지 살펴야 한다.

세상에 답이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짜뉴스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답을 회피하거나 쉽게 답이 없다고 얘기한다.

⓵  문제 해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신호처럼 사람들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답 없음'으로 처리한다. 하나의 사회 문제 안에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구조적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그 구조를 무시하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더 큰 구조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불행한 현실은 그러한 파편적이고 조급한 문제 해결의 결과다.

⓶ 책임의 전가하거나 회피한다.
사람들은 나와 사회 문제를 너무 쉽게 분리시킨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사회 문제와 완벽하게 독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효율적 생산을 위해 만든 '분업화'는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인간을 공동체에서 분리시켰고, '전문화'를 통해 분리된 개인의 이해관계를 이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시켰다.

⓷ 문제의 해결이 나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재화의 총량이 이해관계의 합을 훌쩍 뛰어넘은 말기 금융자본주의 속에서 객관적인 '공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한테 유리하거나 그나마 불리하지 않은 것은 공정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나타나는 눈앞의 작은 불이익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왜? 나의 불이익이 공적인 영역의 이익이 아닌 누군가의 사적 이익이 되는 경험이 누적되어 있으므로…

 


지금까지 가짜뉴스의 정의, 원인, 폐해, 그리고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설프디 어설픈 대안을 제시해 보았다. 대안을 제시하기 전에 분명히 나는 내가 제시하는 대안이 어설플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였다. 내가 제시하는 대안이 당연히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를 없애지 않는 한 사실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모든 개개인이 집단의 우위에 서 있는 지금, 사회문제의 해결은 오직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누구도 내가 아닌 타인에게 집단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일찍이 친절한 금자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친절한 금자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시스템을 탓하지도, 누군가에게 복수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친절한 금자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시스템을 탓하지도, 누군가에게 복수를 요구하지도, 그리고 가짜뉴스를 생산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나 잘하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가짜뉴스를 진단해 본 것이다. 부족한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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