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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탐방 - 역사의 한 장소에 서다 1

일본사(日本史) - 교토의 혼노지(本能寺)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3.01.09 01:47
  • 수정 2023.01.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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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탐방> 역사의 한 장소에 서다 

1. 일본사(日本史) - 교토의 혼노지(本能寺)

1592년 임진왜란, 우리 나라가 겪은 가장 큰 고통의 사건 중 하나이다.

그 고통의 기억은 임진왜란 이후 60년이 될 때마다, 임진왜란 1주갑(1652), 2주갑(1712)을 기억하는 행사를 조선 왕실에서 개최하게 만들었다. 잊지말고 기억하자는 의미이다.

심지어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우리는 임진왜란 6주갑 행사를 서울에서 진행했다

 1952년 충무로에서 열린 임진왜란 6주갑 행사
 1952년 충무로에서 열린 임진왜란 6주갑 행사

역사는 잊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는 순간 언제든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출발된 임진왜란, 그 출발점에 기억해야할 어떤 장소가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 158262.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사찰에서 아케치 미쓰히데가 사람들 앞에 섰다.

밤새도록 강행군으로 피곤한 1만여명의 병사들 앞에서 그는 칼을 빼며 말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사실 혼노지에 있던 사람은 적이 아니라 아케치 미쓰히데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 였다.

교토의 혼노지(本能寺)

 

일본 교토(京都)에는 청수사, 금각사, 광륭사 등 수 많은 유적이 남아있지만, 나의 가장 큰 관심은 혼노지(本能寺)이다.

사실, 혼노지는 어지간한 가이드북이나 패키지여행에서는 다루지도 않고 찾아가는 곳도 아니다. 러나 바로 이 혼노지가 일본사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곳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권력을 넘겨받았고, 그가 바로 일왕으로부터 새 이름을 하사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10년 후 임진왜란(1592)을 일으키게 된다. 역사는 만약(If)을 허용하지 않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도요토미에게 권력이 넘어갈 개연성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발발이 가능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된다.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 

 

오다 노부나가는 1467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계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오닌의 난 이후, 군웅할거의 혼란기였던 센고쿠시대(戰國時代: 중국이나 일본이나 전국시대는 혼란의 시기이다)를 종료하고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한 사가(史家)들의 평가는

시대를 앞선 과감한 혁신(수입한 신병기인 철포(鐵砲, 뎃뽀)를 적극적으로 활용, 다케다 신겐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과 개혁, 강력한 카리스마가 공통적으로 회자된다.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그때, 오다 노부나가는 소수의 수행원들과 혼노지에 있었다. 아마도, 최후의 전투에 앞서 작전을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병대를 자랑하던 최대의 라이벌 다케다 신겐을 물리친 후, 휴식을 취하면서 통일을 눈앞에 두고 끝까지 저항을 하던 모리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심복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모리를 공격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쪽으로 증원군을 요청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케치 미쓰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수행하는 대신에, '적은 혼노지에 있다'를 외치며 혼노지에 묵고 있던 노부나가를 공격, 결국 불타는 혼노지 안에서 자결하게 만들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도대체 왜, 20년 동안 충성을 다했던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게 되었을까? 미쓰히데의 개인적인 욕망, 불만, 쇼군에 대해 견제를 시도한 일왕이나 히데요시의 배후설 등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논쟁이 있지만 아직까지 그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100명이 안되는 소수의 호위들과 1만여명의 미쓰히데 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며 싸우다 결국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할복으로 49살의 짧은 생을 마치고 사망했다.

그리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권력을 이어받았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히데요시는 최전방의 병력을 이끌고 불과 며칠 만에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를 물리치고 노부나가의 권력을 물려받았다. 말단 병사로 한겨울에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했다는 일화로 유명해졌던 히데요시가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와 일본사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오다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혼노지의 변의 현장은 꼭 가보고 싶은 의미있는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혼노지는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했던 바로 그 장소는 아니다. 혼노지의 변 당시 화재로 불탄 것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에 의해 원래의 위치에서 좀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했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했던 옛 혼노지 자리에는 관련 표지석만 남아있다.

 

현재의 혼노지는 교토역에서 전철로 4정거장, Kyoto Shiyakusho-mae Station (京都市役所前駅) 부근에 있다. 지도상 대략의 위치만을 확인하고 찾아가는 바람에 좀 헤매다가 건물 사이에 있는 입구를 발견하고 반가웠지만 좁은 골목의 초라한 모습에 놀라웠다. (물론 안에 들어가보니 정문 출구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이쪽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오다 노부나가의 묘를 바로 만날 수가 있었다.

신장공묘(信長公廟)라 적혀 있으니 무덤이라기보다는 사당이다. 사실 오다 노부나가의 유해는 없다. 화재로 불타버린 당시에, 아케치 미츠히데 조차 찾지 못한 노부나가의 유해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묘().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 오다 노부나가의 사당이 많이 있지만, 묘실의 형식과, 또 혼노지라는 장소성 때문에, 이곳이 대표적인 오다 노부나가의 묘소가 되었을 것이다. 신년초라 그런지 이곳을 찾아와 기억하는 몇몇 일본인들의 참배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 쪽에는 혼노지의 변 당시 함께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묘도 보인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끼던, 그래서 함께 최후를 맞이한 부하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은 자신의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났고, 그 이후 우리 민족에게는 임진왜란이라는 오랜 고통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람은 떠나고 남겨진 작은 사당의 흔적만을 보고 있노라니 허망하다.

 

오래된 은행나무 고목만이 곁에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앞쪽으로 돌아오니 본당이 있다. 이 건물 또한 도요토미의 명에 의한 재건후 수차례 화재로 불탄 것을 1928년에 재건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몇몇 작은 건물들이 혼노지의 부속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돌아본 시점이 신년초라서 본당 안에서는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혼노지의 정문 앞은 시장통처럼 좁은 상가가 즐비하고, 정문에는 법화종 대본산 혼노지라고 씌여있다.

특이한 것은 혼노지의 노(), 글자이다. 자의 오른쪽 변이 갈 거()’자로 씌어있는 데, 이것은 가 일본어에서 히, 즉 불을 뜻하는 것이므로 불()이 물러가라()는 뜻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혼노지의 변 당시의 화재나 그 이후 수차례의 화재를 생각해보면 한편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목조건물은 늘상 화재가 가장 큰 문제이며 화재에 대한 이런 고민은 서울의 경복궁에서도 보인다.(광화문 현판을 검정 바탕에 금색 글씨로 한 것은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다)

한쪽에 세워진 석비를 살펴보면, 노부나가의 이름 앞에 贈 正一位라고 적혀있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생전에 從二位 右大臣이었으며, 사후 從一位 太政大臣으로, 1917년에 正一位에 추증되었다한다.

안내판에 의하면 1719년 조선 숙종때 통신사 행렬 346명이 혼노지에 숙박했다고 한다.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다른 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346명이 숙박할 정도의 당시의 규모와 시설을 생각해보면 현재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마치 혼노지 변으로 인해, 당시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것 처럼, 혼노지 역시 과거의 화려한 시대를 접고 작고 소박한 사찰로 남아있다.

혼노지의 변이 발생한 지 10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으로 시작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굴종의 시간을 보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종 승자가 된 것이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메이지유신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260여년 일본을 지배하는 지배세력이 되었다.

일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열심히 씻어 놓았더니, 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었고, 정작 그 쌀밥을 맛나게 먹은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정작 쌀밥을 누가 맛나게 먹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혼노지의 변은 다시 우리에게 역사의 중요한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우문현답 이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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