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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 창덕궁 인정전 유감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3.03.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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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진아, 인정전을 어찌하면 좋을까?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같은 궁궐의 정전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려진 병풍, 일월오봉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일월오봉도,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병(그려진 병풍)은 사실 조선이 가지고 있는 왕실 조형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참여하는 행사에는 항상 임금 뒤에 설치되고, 그 앞에 임금이 앉습니다. 행사 그림에 임금을 그릴 수 없어 일월오봉도로 대신하면 임금이 그날 행사에 참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 원짜리의 세종대왕 뒤 배경이 일월오봉도 입니다. 

 이런 디테일이 있듯이, 역사란 것이 꼭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월오봉도는 임금의 상징은 아닙니다. 임금의 상징은 용이나 봉황 같은 것이지요, 일월오봉도는 임금이 자리하셨음을 의미하는 그림입니다.

일월오봉도에 대한 해설도 여러 형태로 나뉘기도 합니다. 일월오봉도의 상징성, 즉 천지인, 삼재 의식에 맞추어 하늘--사람을 三字로 도식화하고 그 가운데에 덕이 많고 훌륭한 임금이 자리함으로 임금 王字가 완성된다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임금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은 훌륭한 사람임을 강조하고, 그래서 일월오봉도는 임금에게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준다고 생각됩니다. ^^

 

어떤 관점에서는 일월오봉도의 그림에 집중하면 굳건한 소나무와 바다로 흐르는 물을 보면,

조선 왕실의 번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꽃과 열매가 풍성하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냇물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간다는 조선 왕실의 굳건함과 영원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와 접목해보기도 합니다. 그 외 여러 해설이 있겠지만 그래도 궁궐에서 정전(政殿)의 상징성과 그 공간에서 일월오봉도가 가지는 상징성은 대부분 대동소이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복궁 근정전의 어탑과 어좌, 뒷면의 일월오봉도가 가지는 형식과 상징은 궁궐 정전 구성의 가장 근본이 될 것입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최근에 창덕궁 인정전 내부를 공개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습니다.

그러나 . 너무 많이 변해버린 인정전은 사실 굉장히 낯선 느낌입니다.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고종을 폐위하고 강제로 왕위를 순종에게 넘기도록 합니다. 그리고 1908년 순종의 창덕궁에 대한 대개조를 시작합니다.

일본에 의한 1908년의 대개조로 인해 바닥이 마루로 바뀌고, 어탑은 사라지고 <알현소>라는 일본 황궁의 형식으로 변경되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즉 임금이 권위가 바닥으로 내려앉아 버린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형적인 <내 머릿속의 조선 지우개>의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 밑면엔 사령(四靈, -봉황-기린-거북)을 배치하고 위로는 쌍봉(봉황은 일본 황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일본 돈에 뵤도인의 봉황이 등장합니다) 그림을 그려 놓았었습니다.

 

1960년대에 인정전 복원을 하면서 원형을 되찾아야 했지만 어탑만 세우고 일제강점기의 사령도는 그대로 두고 그 위로 다른 정전보다 작은 형태의 일월오봉도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순간 일월오봉도의 통행 기능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즉 근정전에서 상상되는 신하들이 대령하고 임금을 기다리고 있을 때, 휙 등장하는 신비로움도, 원래의 기능도 다 사라져버린 다소 어정쩡한 형태의 어탑이 되고 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탑 뒤의 계단은 통행이 아니라 청소도구를 쌓아놓는 곳이 되어버렸고,

 

인정전 북쪽은 문도 사라지고 통행이 안되는 곳을 변해버렸습니다. 우리의 정전은 사방이 열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막히는 벽이 없고 소통하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창덕궁에서 행사를 위한 임금의 이동 경로가 때론 인정전 북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등을 보면 인정전(내부)에서의 행차는 상당의 경우 인화문(仁和門)을 통해서 인정전을 들어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정확히 어느 방향으로 들어가셨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화문의 위치는 인정전의 뒤쪽이고, 인정전 뒤 복도 각이 앞과 옆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리고 행사도의 인화문에서 이어지는 복도 각과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 북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857년의 인정전 수리도감의궤를 보면 당가 부분에 여닫이용 문짝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통행을 오봉병으로 했다는 것이니 북쪽의 계단과 북쪽 문으로의 출입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오랜시간 법궁의 역할을 했습니다. 고종때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 상당부분 창덕궁이 모본이 되었을 겁니다. 2의 편전인 경복궁의 수정전이나 건청궁등은 창덕궁의 희정당이나 낙선재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근정전과 중화전 등의 예에 비추어 본다면 인정전의 북쪽 출입은 상당한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역사나 문화는 이렇게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생명력을 이어나갑니다.

 

실제 근정전의 북쪽 계단은 남쪽이나 동, 서보다 훨씬 넓어서 임금이 이용했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의 인정전의 경우는 변형된 형태를 1960년대에 복원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고찰이 없이 계단의 너비를 같게 설치해놓아 그 근원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굳이 이 논쟁을 하지 않아도 의궤에 보이는 원래의 형태로 되기에 돌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래 인정전 특별관람 같은 행사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습니다만, 샹들리에네. 전기네. 커튼이네.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궁궐에서 정전이 갖는 위계와 상징성입니다.

                                                             원래의 인장전 모습
                                                             원래의 인장전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어탑과 어좌가 갖는 배치와 상징이 조선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현재의 인정전 일월오봉도는 너무 갑갑합니다. 원래의 것도 아니고, 아마도 다른 용도로 제작되어 사용된 일월오봉도를 어탑 위에 그것도 사령도와 함께, 크기에 맞추어 올려놓아서, 그 본래의 의미도, 존재 이유도 모르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조선에서의 사령은 경복궁의 동서남북 사대문에 설치된 것처럼 각각의 공간과 역할이 있습니다. 한군데 떼로 모여 뒤에서 지켜보는 것은 일본이 좋아하는 주술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월오봉도는 뒤를 가리는 병풍이 아니고 하늘과 산, 바다 우리 강토에서 우리가 비롯되고, 임금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정전 어탑은 빨리 제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일본에 의해 잘못된 것이 이것 하나만은 아니지만 바꿀 수 있을 때 바로잡아야 합니다.

연진아, 이건 너도 원하는 것 아니겠니?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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