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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투어 - 명품은 디테일에 있다

- 막고굴의 둔황을 가다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3.08.09 17:16
  • 수정 2023.08.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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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디테일에 있다

명동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 가면 <건축가의 손수건>이란 공공미술이 있습니다.

- 신세계 본점 아ㅍ
- 신세계 본점 아ㅍ

청계천 입구에 <스프링, Spring> 이란 작품을 만든 클래스 올덴버그의 또 다른 명작입니다.

 - 스프링, 청계천 광장 입구
 - 스프링, 청계천 광장 입구

여기서 그가 말한 건축가란, 20세기 세계 최고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인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s>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이 말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명품은 디테일에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파생되고 있습니다.

 

디테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칫 디테일의 함정에 빠지면 디테일은 신이 아니라 악마일 수 있습니다. 어떤 디테일에 집중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조선 건국의 주인공이 정도전의 발언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대리 스타일 부장이나 주사 스타일 장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디테일을 언급한 것은 둔황석굴의 명품 때문이기도 합니다. 란주에서 둔황을 가는 동안 제 머릿속에는 계속 디테일이란 단어가 맴돌았습니다.

사실 중국의 유명한 석굴은 거의 다 가보기도 했습니다.

둔황 막고굴을 포함해서 대동의 운강석굴, 낙양의 용문석굴, 란주의 병령사석굴, 쿠처의 키질 석굴, 투르판의 베제크리크 석굴 등. 각 석굴마다 시대와 사람의 향내가 달랐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막고굴은 좀더 절실한 느낌이었습니다.

미술사 전공이 아니기에 석굴과 불상, 벽화 등의 미술적 기교나 화려한 표현, 이런 것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석굴을 만들고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려온 평범한 장인들의 땀과 마음만은 배우려 했습니다.

2천 년 전부터 명사산의 끄트머리에 석굴을 파고 하나둘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만든 사람들, 상당수는 자본가와 권력자들을 위한 작품이었습니다만, 앞에도 언급한 종교적 신념과 돈이 현재의 둔황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700개가 넘는 이 석굴은 단지 기교가 아니라 불심으로 이루어진 명작들입니다.

그리고 자주 보고, 많이 접하다 보니 조금씩 차이를 발견하게도 됩니다. 큰 그림에만 매달리지 않고 작고 세세한 면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 이걸 디테일이라고 한다면 명작은 디테일에 있습니다.

 

둔황 막고굴은 700개가 넘는 석굴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400여 개의 석굴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관광객이 하루에 볼 수 있는 석굴은 10개 내외입니다. 그 많은 석굴을 다 돌아보려면 2달은 걸려야 할 듯합니다.

​그중 개방된 곳과 미개방, 특별개방 등 다양한 형태로 보존 조사 연구 중입니다. 다행인 것은 상당수 기초자료를 둔황박물관에 정리해 놓았다는 겁니다. (어색한 한글 번역도 있습니다. ᄒ).

막고굴 관람을 위해서 사전/사후에 둔황박물관을 들려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특별 공간인 45호 석굴을 둔황박물관에 그대로 복제해놓았습니다. 마치 실제 석굴 안에 들어온 것처럼, 복제된 공간임에도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특기를 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을 배치했습니다.

바깥쪽으로는 사천(인왕상?)을 배치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이 있습니다.

불교미술이 절정에 오른 당나라 양식으로 보입니다.

불제자 중 최고로 머리가 좋아서, 부처님 말씀을 전부 암송해낸 아난은, 공부잘하는 아주 똘똘한 청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중 우측 보살상은 정말 놀랍습니다.

 

뒷머리를 바짝 당겨 말아 올린 머리에 약간 흘기듯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저 도도한 표정이란, 불상이 아니라 미인대회에 나온 여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배꼽을 살짝 드러내고 약간 붉게 칠한 고혹한 입술도, 이곳이 석굴이 아닌 번화한 도시의 어떤 클럽에 온 것 같은 불경스러운 생각도 듭니다.

란주박물관에서 만난 소조 불상의 옅게 칠한 붉은 입술이 대비됩니다.

사실 보살은 인도의 비슈누라는 여신에서 모티브가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늘거리는 나삼, 육감적인 S 라인, 그리고 표정 등이 일반 불상과는 조금 다르기도 합니다.

진흙을 빚어 옷 주름을 표현해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배꼽 하나마저도 놓치지 않고 표현한 디테일이란, 정말 둔황이 변방의 공간이었는지는 큰 의심이 듭니다. 심지어 적당한 뱃살까지도 ^^

백제가 중국을 가는 그 길에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고 비춰주던 서산 마애불처럼,

하서주랑의 긴 목구멍을 떠나 본격적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가야 할 상인, 종교인들에게 둔황은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석굴의 향연이었을 겁니다.

여기서부터 더 거친 사막을 가야 하는 두려움과 그것을 무사히 마쳤을 때의 보상은 당시 부처라는 어떤 큰 힘에 기대게 했고, 무사히 길을 돌아왔을 때는 감사의 마음이 불심으로 표현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크로드는 무수히 많은 이들의 시신, 낙타나 말 같은 다양한 동물들의 희생 위에 성장할 수 있었을 겁니다.

수많은 석굴 안에 조의관을 쓴 한반도 특히 신라인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각종 둔황 관련 책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눈여겨본 것은 석굴 안의 소조상보다는 벽화, 특히 반탄비파상으로 일컬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비파를 등 뒤로 연주하는 모습에서 그간의 모든 관습과 틀을 깨는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미술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현대의 둔황인들은 잊지 않아 중심 네거리에 반탄비파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고귀하고 높은 것만이 사람의 마음에 남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일탈처럼, 틀을 깨고, 그간의 구습에서 벗어나는 길, 예술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둔황의 가능성이자 현재입니다.

막고굴은 각 언어별 해설사가 직접 인솔하며, 문을 열고 관람후 문을 닫습니다. 해설사의 성향에 따라 볼 수있는 굴의 내용과 굴의 수가 달라집니다. 저랑 다닌 한국어해설사는 코로나로 인해 4년간 한국사람이 없어, 말 배운 것을 다 잊었다며 힘들어 했습니다.

​비록 어색한 발음이지만, 너무 열심히 설명하고, 제가 좋아할 만한 굴을 몇개 더 보여주는 모습에 감사해서, 단어도 몇개 수정해주며 동업자 정신으로 ㅎ 작은 촌지(?)를 전달했더니, 굴 몇개가 덤으로 왔습니다. 인지상정이죠^^

​여담이지만 중국은 불전함도 큐알코드로 페이하는 시대를 달리고 있습니다. 저의 촌지도 물론 모바일 페이 였습니다. ^^

 

땡그랑, 띵동 어쨌든 성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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