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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흉상철폐논쟁을 보며

- 독립영웅을 추모한다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3.08.29 12:36
  • 수정 2023.08.2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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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서성 진중시 좌권현에 상무촌(上武村)이라는 작은 산골 마을이 있습니다.

이 일대는 몇 년 전부터 중국의 그랜드캐니언, 트래킹 관광으로 알려진 타이항산 지역입니다.

지금도 찾아가기 어려운 무척이나 먼 곳입니다.

이 작은 산골 마을에 자그마한, 그러나 소중히 관리되어온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름 없는 조선의용대 병사의 무덤입니다.

1942~43년 중일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은 <대소탕 작전>이라는 화북지역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그 일본군의 총공격에 맞선 치열한 전투가 이곳 화북지역, 특히 타이항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주덕, 좌권, 등소평 등 중국의 주요 인물들이 생존하였고, 그 뒤에는 밀양사람 석정 윤세주, 진광화 등 조선의용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총공세로 불안에 떨던 작은 마을에 어느 날 젊은 조선인 청년들이 찾아와 주둔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마을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상무촌 이 동네는 살아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조선의용대가 있어서였습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마을의 수호신이었습니다. 다른 마을이 다 파괴되었지만, 조선의용대가 보호해준 상무촌은 살아남았습니다. 이 상황을 7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십여 세였던 마을의 촌로가 생생하게 증언해줍니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은 철수했지만, 마을에 남겨진 시신은 마을 주민들이 잘 거두어 마을 산기슭에 무덤을 만들고 해마다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무명의 병사를 위하여, 마을 사람들은 돌을 깎고 다듬어, 존경의 마음으로 무덤을 만들고 보수하고 관리하고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1942~43년은 남북한이 분단된 것도 아니고,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름 모를 무덤의 병사에게 좌우의 남북의 이념이 있었을까요? 그때는 좌우도,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도 없고, 혹여 있더라도 그 목표는 오직 하나 조국의 독립이라는 일념이었습니다.

머나먼 외지에서 외로움과 배고픔 속에 일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게 만든 힘,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조국애였습니다.

 

이 무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언제까지 낯선 이국땅에 우리 동포의 시신을 버려둬야 할까요? 기나긴 항일 투쟁의 역사에선, 지도자도, 장군도, 이름 없는 병사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무수히 많은 이들의 희생이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이뤄낸 것입니다.

낭만적인 외교나 협상으로 조국의 해방은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의열단을 만들었고. 그 투쟁이 총독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고, 총독부를 공격하고, 일본의 앞잡이 종로경찰서를 공격한 이들, 그리고 그 무장투쟁의 정신이 이어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타이항산에서 일본군에 맞서 당당하고 장렬하게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들에게 사상이 있다면 오직 조국독립을 위한 사상이었습니다. 피 흘려 싸우지 않고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제국주의 식민지하 나라들의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중 한반도는 가장 모범적이고 치열한 독립전쟁의 상징이었습니다.

 

1910년 공식적으로 나라를 빼앗겼을 때 조선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이어갔습니다.

우선은 자결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 선생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자결합니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해서 누가 나에게 죽으라고 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나라가 500년간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단 하나도 죽는 사람이 없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면서 자결을 하십니다.

종로에서 민영환 선생이 그랬고, 안동의 이만도 선생이 떠났습니다. 60명이 넘는 분들이 분통하고 애통함에 자결합니다.

 

그러나 한편 일본으로부터 남작 등 작위와 은사금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살아갔던 이들도 있습니다. 상당수 조선 정부의 고위층들이었습니다. 이완용이나 윤덕영 등 우리가 말하는 친일파들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만주로 떠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임청각의 주인 안동의 석주 이상룡 집안이나, 서울의 이회영 집안입니다,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마련한 돈으로 그들은 서간도의 황량한 벌판에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준비합니다.

- 신흥무관학교 주둔지

신흥무관학교는 그렇게 탄생했고 그곳에서 훈련받고, 투쟁한 이들에 의해 청산리대첩, 봉오동 전투의 승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이런 이름들이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두 전투의 승리는 일본이 간도참변을 일으키게 하였고, 일본에 쫓겨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자유시 참변이라는 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이회영 6형제는 굶어 죽고 고문당해 죽고 막내 이시영 혼자 살아 돌아옵니다.

김좌진 장군은 어이없게도 조선인의 손에 돌아가시고 홍범도 장군은 멀리 카자흐스탄까지 쫓겨갔다가 최후를 맞이합니다.

 

-김좌진 장군 순국지 방앗간

몇십 년이 흐른 지금에야 이분들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고, 삶을 평가받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싸워온 분들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의 독립은 없었을 겁니다. 무지막지한 일본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싸워온 분들의 노력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합니다,

지금도 중국은 멀고 아득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부모 형제를 떠나 오직 새로운 나라를 위한 투쟁의 길을 걸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나간 것도 아니고, 아무도 영예로운 삶을 보장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독립군으로 싸우고 싶어 일부러 학도병으로 끌려나가 탈출하여 합류한, 김준엽 장준하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일생을 보냈고, 누군가는 일본에 협력하며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유령’에 보면, 일본군에 쫓겨 다친 주인공이 성당에 들러 치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왜 치료를 해주냐는 질문에 수녀님이 대답합니다.

‘보면 알아요, 나라 팔아먹은 이들은 행복하게 사는데, 나라 찾겠다는 사람들은 맨날 이렇게 다치고 상처 입고 힘들게 다니잖아요’

‘피 흘려 싸우지 않고서야 조국의 독립은 찾을 수 없다’라며. ‘2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외치던, 그 독립군의 흔적을, 항일 투쟁의 역사를 누군가 지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1933년 일제 강점기의 어느 날이 아니라, 2023년의 대한민국입니다.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에......

- 이현진(우문현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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