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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 뒤끝 작렬의 끝판왕, 정조

- 현대에 정조를 떠올리는 이유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3.10.21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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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존경과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있는 왕의 하나는 정조입니다.

삶의 역정이 특이하게 했기에 늘 변화와 화두의 중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임금도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근래에 일이 있어 융건릉 창덕궁 그리고 서오릉을 다녔습니다.

사도세자(장조)의 융릉
사도세자(장조)의 융릉

 

대부분 정조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 인간 정조를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때문에 조선 후기 개혁의 아이콘으로 표면화된 정조의 위상과는 좀 다른, 뒤끝 작렬 어쩌면 다른 시각으로 보는 정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조가 임금이 되는 과정은 어찌 보면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주에서의 죽음 이후에 세손으로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춰가며, 쉽지 않은 군왕교육의 고개를 넘어 마침내 살아남아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세자생활 막판에 몰아닥친 외가(홍 씨)의 괴롭힘도, 서명선의 상소에 힘입어 물리치고 극적으로 등극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서명선을 의리의 사나이라 시작하는 묘지명으로 애도한 것은 가장 정조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고 권좌에 오른 정조의 입지전적인 모습입니다.

이제 왕이 된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정신과 유훈을 잘 지키고 좋은 정치를 하면 될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폐세자의 아들이 아닌 비록 일찍 사망했지만, 효장세자의 아들로 영조의 뒤를 이었으니 이제 차분히 왕으로서의 숙명과 업무만 처리하며 살아가면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조의 빈전 앞에서 아직 왕위계승의 먹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한 첫 내용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였습니다.

모여있는 대신의 절반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진대, 그리고 효장세자의 뒤를 이었다는 새 임금의 첫 발언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니......

순간적으로 조정은 꽝꽝 얼어붙었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어서 <불령한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 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하겠다."> 라고 밝힙니다.

,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선언했으니 살아남으려는 신하들이 갑자기 알랑방귀를 뀌면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어쩌고, 신분을 어쩌고 하면서 끼어든다면 엄하게 벌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하면 안 된다는 선왕 영조의 유언이 있었으니 함부로 알랑알랑 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위기에 순간에 살아남을 방도를 찾던 사도세자 죽음의 연루자들은 실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라는 것이냐. 다 덮고 가겠다는 것이냐……. 이런 논쟁이 한동안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정조 1년 어느 날, 아직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가시지 않은 2월 초 정조는 문득 신하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온고지신이란 무엇이냐>

<임금이 말하기를,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무슨 말인가?" 하니, 이유경이 말하기를"옛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초학자(初學者)는 이렇게 보는 수가 많은데, 대개 옛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정조 121>

 

굉장히 좋은 뜻입니다.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을 다시 돌아보면 그때는 몰랐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니, 이것만큼 학문의 연계성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을 것입니다.

요샛말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과거에 있던 일을 다시 자세히 살피면 그때는 몰랐던 진실, 즉 그때와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지나친 저의 억측일까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가 선전포고라면, <온고지신>은 이제 과거사진상위원회의 발족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야말로 사도세자파엔 연이어 들려오는 끔찍한 선언입니다.

등극했으면 나라의 디자인을 새로이 하고, 화합으로 잘 끌어나가는 것이 임금의 모습인 듯한데, 정조는 아버지라는 과거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1살에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목도한 자식의 트라우마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마 당시에 PTSD에 대한 치료도 제대로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실록에는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오릉에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이 있습니다.

비록 후사는 없었지만 40여 년을 왕비로서 영조를 내조했고, 특히 다른 후궁들의 자식을 잘 돌보았고, 결정적으로 영조의 트라우마인 어머니 숙빈최씨, 육상묘를 건설하여 현재의 청와대 부근인 칠궁의 출발을 열 때 큰 노력을 기울인 인물입니다.

후사는 없던 부인이지만, 정성왕후를 위해 영조는 아버지 숙종이 있는 서오릉 한쪽에 자리를 만들고, 옆에 우허제(왕비의 오른쪽을 비워둔다. 왕을 위해)로 빈 곳을 두고, 본인이 훗날 들어가서 아버지 곁에서 부인과 잘살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인공 맘대로 진행되면 얼마나 무료한 나날일까요?

영조가 승하했을 때는 그 자리로 들어갈 것을 분명히 했었는데,

<능호(陵號)에서는 장차 홍릉(弘陵)의 위쪽 빈자리에 봉안할 것이기 때문에 장릉(長陵)과 명릉(明陵)의 전례에 따라 그대로 홍릉이라 하기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즉위년 312>

동시에 사도세자의 수은묘 개건도감을 설치하고 <장헌>이란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수봉관을 임명하고,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바꾸고, 사당을 경모궁으로 하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정조는 느닷없이 신하들에게 영조의 새로운 능자리를 찾으라 명합니다.

이때 신하 중 황해도사 이현모가

<홍릉 오른쪽의 비워 놓은 자리는 곧 대행 대왕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선왕께서 오늘날의 처지를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처리해 놓기를 지극히 자세하고 원대하게 하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그랬더니 정조는 <할아버지가 찍은 놓은 것이 여기뿐이 아니다, 좋은 자리를 찾는 것은 당연히 후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을 하며, 이현모를 직에서 도태시킵니다.

그리고 굳이 동구릉에 자리한, 효종의 옛 자리로 옮깁니다.

동구를의 선두주자, 태조이 건원릉
동구를의 선두주자, 태조이 건원릉

 

그런데 그곳은 현종 때 병풍석이 계속 갈라지고 물이 고여 파묘하고 여주로 옮긴 효종의 옛 자리인데, 갑자기 <이미 증험해 본 땅이 마치 기다리고 있은 듯합니다, 불암산의 정간의 면목이 모두 이곳을 향하고 있으니, 진실로 완전한 대지(大地)입니다, 산을 보아 온 지 50년이지만 이와 같은 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라는 신하들의 의견 속에서 길지로 둔갑을 합니다.

머 실제 그 자리가 길지 인지 아닌지 제가 평가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영조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입니다.

아마도 배봉산 자락에 버려지듯 방치된 아버지의 수은묘를 보고 와서 눈물을 흘렸던 정조의 마음이, 서오릉에서 아버지 숙종과 부인 곁에서 편안하게 살겠다는 영조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정조의 소심한 복수라면 너무 과도한 생각일까요?

정성왕후 홍릉 - 옆자리가 비어있다
정성왕후 홍릉 - 옆자리가 비어있다

 

그 바람에 영조는 동구릉에 자리하게 되고, 애꿎은 불똥은 할머니 정성왕후에게 떨어져서 홍릉은 옆자리에 찬바람이 시리게 비어있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능역을 조정해서 단릉으로라도 알차게 해주면 좋으련만, 이가 빠진 동그라미처럼 비어있습니다. 정성왕후는 무슨 죄였을까요?

이쯤 되면 진짜 뒤끝 작렬입니다.

정조의 위대함과 그의 업적을 폄훼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를 좋아하기에 자꾸 아쉬움이 남습니다.

<과인의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이미 등극을 한 이상, 임금은 개인의 아들이 아닙니다. 나라의 지도자이자 대표, 국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과 행동은 모두 공적입니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조의 또 다른 마음은 결국, 현륭원의 이장과 화성이라는 신도시의 건설로 이어집니다.

아쉬움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국가를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천주학이 유행한 것은 신학문이라는 개념이 컸기 때문입니다. 즉 세계는 광대한 사상과 학문 교류의 물결이 몰아치던 시기입니다. 우리와 이런저런 악연을 맺어진 일본은 이미 임란 전에도 유럽으로 유학생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귀국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전쟁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동아시아를 넘어 보다 넓고 다른 세상과의 교류가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규장각에서 그렇게 아끼고 돌보던 신하들을, 그 똑똑한 정약용을 화성 건설현장에서 일을 시킬 것이 아니고, 당시에 유럽으로 신학문을 위한 유학을 보냈다면 나라의 미래는 어땠을까요?

규장각의 사검서가 파리의 세느강을 거니는 모습은 저의 발칙한 상상일 뿐이었을까요?

 

정조라는 거대한 숲을 제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며칠간 관련된 지역을 다니다보니,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정조를 돌아보는 것도 해설하는 처지에선 과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절거립니다.

임금의 자리가 주는 공적인 무게를, 현대의 지도자들도 교훈으로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정조의 뒤끝작렬이 현대엔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뭉현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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