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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이 기억하게 하는 것

- 서울의 봄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3.12.0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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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이 다시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영화를 보는 내내 화가 삭여지지 않는다.

분노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분노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것도 사실이다.

 

영화가 끝나고 오래된 군가가 흘러나왔다.

대개 영화가 끝나면 엔딩곡이 나오기 전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뜬다.

그러나 내가 앉아 있었듯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80년대를 관통했던 나의 옛 시간이 떠오른다.

저절로 입에서 개XX 소리가 나왔다.

 

영화의 후반부 총소리에 놀라 나온 경복궁 주변 시민들을 <구경꾼으로 그냥 놔두라>는 전두광(전두환)의 말 속에 권력자들이 국민을 어떤 시각으로, 개돼지로 바라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도,

태연하게 인생의 마지막에 사과 한마디, 반성 한마디 없이 떠나간 놈,

정말로 국민이 구경꾼이나 개돼지인지는 전두환이 묻히길 바라는 파주시민들이 결정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수경사 이태신 장군(현실의 장태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눈앞에서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그게 군대냐?>

 

그렇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뻔한 결과지만 흔적이라도 남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의와의 타협을 받아들이고 합리화해 갔던가.

합리화는 또 다른 합리화를 낳고 불의는 포장되어 간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만들어 진 적이 있다.

태양을 마주하면 자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역사는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의해 균형과 중심을 잡아 나가는 것이다.

 

이후의 서울의 봄이 무너지기까지의 과정은 현대사에 알려져 있고, 여러 글에서 회자하고 있으니 언급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태신의 마지막 대사,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라는 대목에서 떠오르는 역사 속 몇 사람이 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1. 광양사람 매천 황현 선생

 

매천야록을 쓴 근대의 인물이다.

일본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길 때,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결하기 직전 이런 유서를 남기셨다고 한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지만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그렇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길 무렵 일본에 협력하여 작위 및 돈을 받은 상당수는 왕실과 고위관리들이었다. 오히려 백성은 의병투쟁에 나섰고, 또한, 분을 못 이겨 자결한 조선인이 60여 명이 넘는다. 황현 선생은 그중 대표적인 분이다.

<나라가 망할 때 죽는 선비 하나 없다면 조선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피를 끊는 말씀이다.

2. 명나라의 선비 방효유(方孝孺)

 

별칭이 정학선생(正學先生)이니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는 분이다.

명 태조 주원장이 사망한 후 주원장의 손자인 건문제가 2대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주원장의 아들인 주체(훗날의 영락제)는 연왕으로 있었다. 건문제는 각 지역에 봉해있던 삼촌들을 불러 한 명씩 처단하는데, 이때 연왕(현재의 북경)으로 있던 주체는 저항하며 난을 일으킨다. 이를 정난지변 이라고 한다. 전세가 뒤바뀌어 훗날의 영락제는 남경을 점령하고 이 과정에서 건문제는 행방불명(사망설 및 도피설)이 되고 결국 주체가 3대 황제 영락제로 등극하게 된다..

영락제는 본인이 이상적인 주나라의 주공()처럼, 훌륭한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며 황제 즉위 조서를 당대의 방효유에게 쓰게 한다.

이때 방효유는 1) 성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주공 단은 조카인 성왕이 어려서 대신 섭정을 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후 조카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떠난 분으로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다. 조선의 세조와 비교하면 대비가 되는 인물이다. 방효유가 바로 이런 질문을 했으니 영락제는 뜨끔했을 것이다. 영락제가 조카는 행방불명이라며 변명을 하자, 그럼 후손이나 형제라도 찾으라 하자 영락제는 분노한다..

2) 그러나 방효유는 연적찬위(燕賊纂位, 연나라의 도적이 제위를 찬탈하다)라고 적어내고 이에 영락제는 책형, 방효유를 찢어 죽인다. 직전에 영락제가 9족을 멸하겠다고 하자, 방효유는 10족이라도 상관없다며 맞선다.

실제 10족이 멸해졌는지는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불의의 황제 앞에 당당히 정의를 이야기한 선비 방효유,

결국, 연왕 주체는 남경을 떠나 북경을 새로운 수도로 선택한다. 아마도 여러 가지 꺼림칙한 상황들이 예측되었을 것이다.

 

3. 태종의 오른팔 하륜

처세술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여기선 처세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영락제와의 교차점에 있는 조선의 왕은 태종 이방원이다.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왕자의 난 등 즉위 과정은 두 번 거론할 필요가 없이 유명하다. 태종의 책사이자 오른팔이었던 하륜.

동생 때문에 임금이 된 형 정종이 서울을 다시 개경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왕위를 넘겨받았기 때문에 태종은 개성에서 등극한다. 그리고 한양으로 오고 싶어 했으나 여러 불편한 생각 때문에 창덕궁을 짓게 된다. 그러나 부친 태조가 건국한 경복궁을 버려둘 수는 없었다. 개성으로 서울을 옮긴 몇 년 동안 경복궁은 관리가 부실했다. 서편의 연못가에 있던 정자는 무너졌고, 그래서 태종은 그 정자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영빈관처럼 크게 중창을 한다. 그것이 현재의 경회루이다.

 

그리고 경회루가 완성되던 날,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름 몇 개를 나누어주면서 누각의 이름을 결정하게 한다. 사실 경회(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난다)만 빼놓고는 나머지는 놀고 즐기는 이름이었으니 신하들이 처음부터 경회루를 선택한 것은 자명하다. 이에 태종은 경회를 가지고 글짓기를 하게 한다. 이때 지어진 글 중 최고의 명문이 하륜의 경회루기이다.

 

<이제 이 누각을 다시 중수하는 것이 나라 다스리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고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선왕의 유업을 보전함이요, 흙을 단단하게 쌓고 연못을 깊이 파는 것은 그 기반을 굳게 함이며, 동량(棟梁)과 주석(柱石)을 크게 하는 것은 중임(重任)을 지는 데에 작은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요, 문설주와 문지도리를 알맞게 하는 것은 작은 것을 맡는 데에 큰 것을 쓸 수 없음이며, 마루를 높고 시원하게 하는 것은 총명을 넓히는 것이요, 층계를 높게 하는 것은 등위等位의 위엄을 엄정하게 하는 것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두려운 것은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요, >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두려운 마음을 가지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이다. 경회루를 낙성한 그 무서운 태종의 잔칫날에 그 오른팔이 하는 말이,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아래(백성)를 두려워하라니, 잔칫날에 어찌 이렇게 찬물을 끼얹는 말이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것이 조선이었다. 비록 충심으로 모시는 주군 앞이지만, 정의로운 원칙을 이야기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말로 목을 내어놓는 이 정신이 조선 500년을 끌어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엑스포유치가 뻔히 이미 물 건너갔음에도 대등, 역전 운운하며 달콤한 말을 늘어놓는 수하들과 이에 희희낙락하는 수장에게 맡겨진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다. 현실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자는 말 한마디 못하는 이들이 이 나라를 끌어가고 있다니, 부끄러움도 없는 이런 이들 때문에 국민은 속이 타고 분노할 일이다.

맹자는 無羞惡之心 非人也, 즉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 데, 겁박의 패거리들속에 안주하는 영혼없는 저 관료들이 바로 그 무리인 듯하다.

 

영화처럼, 그때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그 이후 더 많은 피와 땀이 길에 뿌려지고 닦이기를 수없이 반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봄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봄을 위해 피 흘린 사람들에 의해 얻어진 열매는 오히려 추운 겨울을 만들었던 이들이 향유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은 40년 전이 아니라 다시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본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나의 분노는 가시지 않는다.

이현진<우문현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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