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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나라, 조선

  • 기자명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 입력 2024.03.1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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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나라, 조선

손기정 투구
손기정 투구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역사 문화 답사는 걷기와의 싸움이다.

최근에 중국 황궁 황릉 답사를 4박 5일 다니면서 걸음 수를 측정하니 하루에 2만 5천 보가량을 걸었다.

어째 입술이 부르트더라니? 꽤 많은 걸음을 걸었던 모양이다.

걷는 것은 좋아하는 데 뛰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체중으로 인한 하중이 부담을 주기 때문에 좀 빠르게 걷는 것을 좋아한다.

전국에 둘레길이 500여 개가 넘으니 온 나라가 둘레길이다.

왜 이리 걷는 걸 좋아하는지 알아보니, 사실 우리 배달의 민족은 달리기의 민족이다.

 

중국의 사료를 보면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천리인(人) 열 명과 천리마(馬) 한 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천리마는 이해가 가지만 천리인은 무엇일까? 천 리면 400km이다. 서울–부산을 하루에 갔다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대단하다.

후한서(後漢書)》에는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절할 때에는 한 다리를 꿇고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질친다>고 하였다.

원래 달리기를 잘하는 민족이었다라니, 일제 강점기에 베를린에서 우승한 신의주 출신의 손기정선수가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는 마라톤 민족이다. ^^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를 배출한 나라는 십여 개 국가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거기에 끼어있으니 달리기의 민족이 맞다. 그래서 배달의 민족이 뜬 것일까? ㅎ

 

과거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령과 정보의 신속한 전달이 중요했다.

봉수대를 이용해 전쟁의 발발 같은 내용은 알릴 수 있지만, 국가 내부의 공문 같은 것은 반드시 인편이 필요하다.

보통 말을 떠올리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말의 수가 많지 않았고, 국토의 70%가 산악인 우리 지형은 때로는 말보다 사람이 편리할 때가 있다.

그때는 한양 아래로는 수레가 다닐 길도 그리 발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걸음이 빠른 사람이 필요하다. 이렇게 공문을 지니고 전달하는 보직을 보장사(報狀使)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이 역참에 배치되어서 말 대신 발로 공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변변한 신발도 없는 아랫사람들이 수백 리를 달려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옛 기록은 보장사가 좀 지체하더라도 크게 죄를 묻지 말라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보장사는 아니지만 달리기를 잘해서 성공한 관리들도 있다.

조선 말기의 이용익이 그러하다.

 

이용익(李容翊·1854-1907)은 함경도 사람으로 보부상 출신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훗날의 명성황후)는 장호원으로 피신을 하였다.

이때 명성황후와 고종과의 비밀 연락을 맡은 사람이 이용익이다.

서울과 장호원은 200리(80㎞)이다. 이용익은 하루에 왕복 400리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였다.

축지법을 썼던 것일까? 이용익이 달리면 발은 보이지 않고 두루마기만 팔랑팔랑 보였다고 한다.

 

야사에는 민영익의 소개로 발탁된 이용익이 잘 달린다는 소문을 듣고, 명성황후가 테스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용익을 전주에 보내 문서에 출발시각을 적어 서울로 가져오게 했더니, 아침 8시에 전주를 출발, 한양에 밤 8시에 도착했다고 하니, 500리길 200여㎞를 12시간 만에 도착한 셈이다.

지금으로 환산해보면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온종일 달려야만 하는 속도니 정말 대단한 달리기 실력이다.

 

어쨌든 달리기 실력만으로 발탁된 것은 아니겠지만, 고종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재정을 책임지는 탁지부 대신에 올랐으며, 고종의 후원으로 보성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발이 빠른 것도 중요했지만, 세상을 보는 눈도 빨랐다.

 

국가의 공문만이 아니고 개인과 개인 간에도 소식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우체국이 없던 시절에는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오가는 인편이 없으면 제때제때 소식을 전하기가 어려우니 몇 달 치 편지를 한꺼번에 보내는 일도 많았다.

흔히 멀리 유배 간 선비들의 집안과 서신 왕래가 유명하다. 대개 집안의 하인 같은 일꾼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민간에서도 이런 편지를 전달하는 전문직들이 생겨났다. 이들을 전인(傳人)이라고 불렀다. 일정한 품삯을 받고 전문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전인도 빠른 발이 중요했다. 머 배달의 민족 출신이니 그 발이 오죽 빨랐을까? 품삯도 꽤나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춘향전에 <춘향이가 방자에게 열냥을 주고 이몽룡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장면이 있다. 열 냥이면 당시 한 달 월급에 가깝다. 방자는 두 연인 사이에서 전인 노릇을 하며 쏠쏠히 주머니를 채웠던 모양이다. 그 돈으로 향단이의 마음을 샀는 지는 모르지만, 방자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하인처럼 부리는 아랫사람을 의미한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편지의 수요는 늘어나고 쓸모있는 전인의 수는 한정되어서, 점점 비용이 올라갔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처럼 몇 번지 몇 호라고 주소가 정해져 있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대문 근처의 김 아무개에게 전해주시오>라고 보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 정확히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전인들은 현대판 내비게이션이었을까?

주소가 정확히 정해진 1896년 이전에도 전인들은 아주 문제없이 자기 일을 해내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전인들은 길눈이 밝았을 것이다.

1884년 우정국이 생겼을 때 체전부(우체부)를 뽑으며 역참의 역졸을 우대했다고 한다. 역졸들은 길눈도 밝고 걷기 체력도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한동안 전인들의 활약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인은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듯하다. 기술의 발달은 의존성을 높인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지도만으로 길을 문제 없이 잘 찾아다녔다. 오늘날은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미아가 된다. 지금은 목적지를 입력하고 기계어가 말하는 대로 따라다닌다.

용불용설, 인간의 길 찾기 능력은 점점 퇴보되어 가는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리 잘 달렸을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나도 그 점을 괴이하게 여겨 늘 까닭을 연구해 보곤 하였다. ......동(東)은 움직인다는 뜻이고, ‘동쪽 사람들은 생동(生動)하기를 좋아하는데, 만물(萬物)도 땅을 저촉(觝觸)해서 생겨난다.’ 하였으니, 저촉도 움직인다는 뜻이다. 동쪽 사람들이 걸음이 빠르고 또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만물이 땅의 기운을 저촉해서 생겨나는 동쪽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생동(生動)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라고 서술되어 있다.

 

바야흐로 열심히 뛰어다녀야 할 계절이다 !

 

- 이현진 우문현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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