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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이 만난 사람①] (주)코트라인 김기창 대표

1화. 말총머리에 쓰는 고무줄에도 특허받은 기술이 있다.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0.10.31 02:15
  • 수정 2020.11.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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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코트라인 김기창 대표의 특허가 적용된 서클밴드들. / 사진=코트라인 제공.
(주)코트라인 김기창 대표의 특허가 적용된 서클밴드들. / 사진=코트라인 제공.

1화. 말총머리에 쓰는 고무줄에도 특허받은 기술이 있다.

(말총머리 : 조금 긴 머리를 말꼬리처럼 하나로 묶은 머리 모양새. / 출처=표준국어대사전)

말총머리는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머리 스타일이다. 아주 간단히 긴 머리가 단정하게, 멋스럽게 정리되고 운동 등의 활동적인 생활에 편리하다. 심지어 머리가 긴 사람이 본격적으로 음식흡입(?)에 돌입하기 위한 준비 모드의 목적으로 머리를 정리하는 데에도 적격이다. 

이런 말총머리는 대개 고무줄로 묶는다. 아주 단순한 둥근 검정부터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제품들이 있다. 그런데, 이 머리 묶는 고무줄을 만드는 데에 특허받은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특허를 바탕으로 약 20년 이상을 성공적으로 사업을 운영해 왔고, 심지어 외국에서 로얄티까지 받은 사업가가 있다면?

시그널은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내실 있고 알찬 소기업을 경영하면서 체험한 이런저런 흥미로운, 그리고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일들과 교훈을 기꺼이 나누고 싶다는 사업가를 만났다. (주)코트라인의 김기창 대표가 그다.

늦은 가을 오후 서울 회현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 좋고 순한 인상의 김기창 대표는 외모에서 주는 느낌만큼이나 친절하고 세심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 머리 묶는 고무줄을 만드는 데에 특허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김) 당연히 잘 모르실 겁니다. 심지어 액세서리를 취급하시는 분들도 잘 모르시니까요. 저희가 특허권 방어를 위해 시장상황을 조사하면서, 판매하시는 분들을 만나서 특허권 침해에 관해 알려드리면 그제야 알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김 대표에게서 들은 특허권이나 그 방어에 관해서는 뒤에 소개하도록 한다. 일단 간략한 이력과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 대해 들었다. 김 대표는 1961년에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대전에서 다녔으며 충남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첫 번째 직장생활을 1988년 일본에서 시작했다.

의류 수출에서 액세서리로

- 영문학을 공부하셨는데 첫 직장이 일본이라는 점은 좀 의외입니다.

김) 당시 일본의 의류업계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을 원했습니다. 한국에서 의류를 생산해서 일본 시장에서 판매하는 업종이니까요. 물론 일본어도 배워야 했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현지에서 일본어 공부를 했습니다. 

- 의류업계에서 출발하셨군요. 

김) 그렇습니다. 당시 일본 시장에서 한국의 의류, 특히 여성 의류의 수요가 많았습니다. 품질과 기술력은 일본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지만, 생산단가가 거의 절반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옷을 한국에서 만들어 가져가는 일본 수요처가 많았지요. 저도 거기에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김 대표의 일본 직장생활은 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3년간 일한 후 귀국하기로 했다. 

- 능력도 인정받고 그쪽에서도 원했는데 왜 그만두고 귀국하셨나요?

김) 한국으로 돌아간다니까 회사에서 붙잡고 높은 연봉을 제시하더군요. 당시 국내의 정상급 대기업에서 받을 수 있는 연봉보다 훨씬 더 주겠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7남매의 장남입니다. 집안의 종손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홀로 계신 어머니도 돌봐드려야 했습니다. 일본에서 영영 머무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귀국한 김 대표는 당시의 인연을 이어서 한국의 제조업체와 일본의 수입업체를 연결하는 것으로 국내에서 첫 사업을 시작했다. 1991년경 시작한 의류 사업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시장 상황의 변화, 그리고 당시에 사업을 하든 직장에 다니든 누구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던 IMF 외환위기가 그의 사업과 인생에도 큰 전기가 되었다. 

김)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일본으로의 의류 수출이 무난했습니다. 그런데 크게 두 가지 여건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제조시장의 성장입니다. 생산기반이 중국으로 이전되는 상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이지요. 그리고 일본 시장의 수입물량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 사업여건이 점점 나빠진 것이군요.
                
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IMF 사태를 맞게 됩니다. 다행히 저 개인적으로는 직접적인 타격을 크게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당시 제 아내는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신용이 좋은 은행원이다 보니 가까운 친척들에게 보증을 서고 또 돈을 빌려준 액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게 터져버린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뒤처리해야만 했는데, 결국 부족한 부분은 대출을 받아서 충당했어요. 알다시피 당시에는 금리도 엄청나게 높지 않았습니까? 애 많이 먹었습니다.

그때 몇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고 했다.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가격이 대략 2억 원이었다는 것을 김 대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은마아파트를 사려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은마아파트 한 채를 날렸지요.’라며 껄껄 웃었다. 

코트라인 김기창 대표
코트라인 김기창 대표. / 사진=코트라인 제공.

연구를 시작하다

- 그러면 머리 묶는 고무줄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김) 사실 90년대 중반, 의류 시장이 점점 축소되면서 돌파구를 찾다가 액세서리를 겸업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액세서리가 크게 성장하는 시기였거든요. 우리나라의 액세서리 디자인 능력과 생산기술은 단연 독보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지요.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남대문 시장에 액세서리 업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90년대 말의 어느 날, 저에게서 액세서리를 수입하던 한 일본인 파트너와 고무줄을 둥글게 연결하는 문제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고무줄을 둥글게 만들기 위해 양 끝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Tip이라는 금속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는데, 금속 관 모양에 고무줄 양쪽을 끼우고 압착해서 고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고무줄이 Tip에서 빠진다거나 머리카락이 Tip에 끼는 등의 문제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리고 접착하는 방식이 있는데, 양 끝을 잇다 보면 고무줄이 겹쳐진 부분이 두꺼워져서 보기 흉하거나 접착부분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 고무줄 양 끝을 이어붙이는 방법을 연구하시게 된 계기네요.

김) 일본인 파트너가 ‘나는 아무리 해도 예쁘고 튼튼하게 붙이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으니 머리 좋은 당신이 한번 해봐라’ 하더군요. 그때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어려움에 봉착한 사업에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점이기도 했구요.

- 사업은 계속하면서 연구를 병행하신 것이지요?

김) 그렇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요. 

- 얼마나 걸리셨나요?

김) 꼬박 일 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최초 특허 출원까지가 그랬고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보완작업을 했습니다.

연구와 실험을 혼자 하셨느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본인은 방향과 방법을 제시했고, 실제 실험은 부인이 하셨다고. 

김) 그 무수한 실험은 사실 아내가 맡아서 했습니다. 저는 재료와 아이디어를 제공했구요. 온종일 사업에 매달려야만 했으니까 직접 실험할 시간을 내기 어려웠거든요. 

- 사모님께서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김) 거의 일 년 가까이 셀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실험을 계속하다가, 한 열 달 때쯤 되었을 때 드디어 짜증을 내더군요.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하하.

결혼생활 내내 크게 다투어본 적이 없었다는, 심지어 보증 채무 문제를 처리할 때에도 아내를 나무라지 않았다는 김 대표답게, 다행히도 부인을 잘 다독여서 길고 지루한 발명 과정에서의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 막막한 길을 가신 건데, 어떤 생각을 하며 버티셨나요?

김) 그냥 꾸준히 했지요. 사실 저는 이 특허로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이 기술이 개발되면 제대로 터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했습니다. 실제로 저 아닌 다른 사람 중에 이 기술 덕에 크게 성공한 분들도 많구요. 

늘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집중하다보니 어느 날,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정리되면서 홀연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김) 한참 후에 알게 된 일인데, 일본에 유사한 특허가 있더라구요. 만일 제가 그것에 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어떤 선입견 비슷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지식이 때로는 새로운 발상을 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 언제 일단락이 되었나요.

김) 2000년 1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침내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2001년 1월1일, 식구들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고는 방문을 굳게 닫고 들어앉아서 특허출원을 위한 서류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혼자서요? 변리사에게 의뢰하지 않고?

김) 네. 변리사에게 의뢰하면 비용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그 정도의 돈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일이든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제 방침입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할 수 있겠더라고요. 물론 나중에 보완할 내용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추가했지만,
일단 혼자서 한 70% 정도의 내용을 정리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을 투자해서 사업한다는 김 대표의 경영철학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정리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여하튼 김 대표는 특허를 내는 데에 성공했다.

- 현재도 특허는 유효하지요?

김)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특허에 대해서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특허침해가 너무 많습니다. 특히 오픈마켓에서 유통을 하시는 분들의 대부분은 모르시는 것 같아요.

김 대표가 작년에 특허단속을 하면서 적발해낸 건수가 무려 1,600여 건이고 올해도 현재까지 800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 특허권에 대해 고지하면 반응이 어떤가요?

김) 대부분은 몰라서 그랬다고 사과하고 바로 처리합니다. 실제로 몰랐을 것입니다. 특허가 있는 줄 알면 다 적법한 조치에 수긍합니다. 특허법이 워낙 엄해서 한번 걸리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요.

- 그 많은 업체를 일일이 다 상대해야 합니까?

김) 다행히도 요즘은 마켓플레이스 운영자에게 통보하면 거기서 입점자들에게 일괄적으로 통보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줍니다. 그러나 국내 최대의 포털 사이트 한 곳이 유일하게 이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이런 지적 재산권 문제는 거대 포털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4년간의 특허소송에서 일본 기업을 이겨 로얄티를 받다

특허를 내는 것뿐 아니라 특허권을 관리하는 것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여하튼 다음 단계로 김 대표는 이 특허를 외국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김) 일본의 액세서리 시장이 한국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이 특허를 등록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 일을 제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파트너에게 맡겼습니다. 즉, 그분이 특허등록을 진행하고 대신 독점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지요. 

일본에서 특허를 출원하자 곧 어떤 일이 발생했다. 일본의 한 회사에서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 회사는 다수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였는데, 김 대표에게 자신들과 사업을 제휴할 것을 제안해온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거절했다. 이미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터이니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그 회사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김 대표의 특허출원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때부터 일본에서의 지루한 소송이 시작되었다. 

- 외국에서의 특허권 소송이니, 힘든 일이었을 텐데요.

김) 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소송은 일본의 파트너가 진행했고 저는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식으로 진행했으니까 부담이 덜했지요.

소송 막바지에 일본 법원에서 저에게 직접 출두해서 시연하라는 요구가 있었는데, 저는 “내가 알려준 방법으로 거기서 하면 되지 구태여 내가 출두까지 해야 하느냐”며 거부했어요. 결국 현지 파트너가 법정에서 제 방법으로 시연하는 데 성공하여 특허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마침내 일본에서 특허가 인정되었다. 약 4년에 걸친 분쟁과 총 1억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 소송이었다. 물론 서로의 협약에 따라 현지 파트너가 주로 수행하고 비용도 낸 것이기에 상대적으로 김 대표가 지닌 압박이 크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큰 일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대가는 적지 않았다. 

- 그 후에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김) 일본 파트너로부터 꼬박꼬박 매출에 대한 로얄티를 받았습니다. 약 15년간.

- 지금도 계속 진행되는 사업인데, 왜 로얄티 제공이 중단되었지요?

김) 한 십여 년 되니까 그쪽에서 넌지시 얘기하더군요. 제작 원가도 많이 올라서 이윤이 전 같지 않다, 그동안 로얄티 많이 받았으니 이제 그만 받아도 되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 사장님, 인심도 좋으십니다. 

김) 네. 허허. 실은 제가 욕심이 많지 않습니다. 뭐 대단한 야망을 품은 사업가도 아니구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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