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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에게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모델’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9.01.07 13:21
  • 수정 2019.09.29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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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길/노동사회과학연구소 교육위원장

 

지하철을 타다보면 언제 부터인가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었다. 지하철이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스크린 도어가 있었던 건 아니다. 스크린 도어는 선로 추락 사고를 방지가 목적이다. 몇 년 전 시각장애인이 선로에 추락하여 사망한 사고가 계기가 되어 설치되기 시작했다.  장애인 단체가 요구해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지하철 선로 추락사고는 비장애인 안전에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스크린 도어 설치 이전까지 선로 추락사고가 년 80여건씩 발생했다고 한다. 그 중 장애인은 거의 없었다. 대신 젊은 여성들비중이 많았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 빈혈증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지금은 추락사고는 없다. 이렇게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기구가 비장애인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많다. 타자기와 전화기가 대표적인 예다.

타자기는 원래 시각장애인 필기도구로 발명되었다. 또 전화기는 농인 의사소통 보조도구로 발명된 것이다. 전화기를 발명한 벨의 직업은 농학교 특수 교사였다. 단순히 장애인 보조도구가 비장애인에게도 유용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태도는 장애인을 치료의 대상이나 격리의 대상으로 이해온 것이 지금까지 일반적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장애 원인을 개인의 정신적 신체적 손상에서 찾는다. 1975년 UN장애인 권리선언조차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권리선언에서 장애인을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신체적 능력이나 정신적 능력에 결함이 발생함으로써, 자신 스스로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없거나 부분적으로 갖출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1976년 영국 장애인 단체인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 장애인연맹(UPIAS)은 ‘손상’과 ‘장애’를 개념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상’은 사지 전체 혹은 일부분이 없는 것 또는 사지, 기관, 신체구조에 결함을 가진 것이고, ‘장애’는 신체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무시해 이들을 사회활동의 주류에서 배제시키는 동시에 사회 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러한 ‘손상’과 ‘장애’의 개념적 분리는 장애인을 인식하는데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장애 원인을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비장애인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휠체어 장애인이 이동에 제약을 받는 것은 개인의 신체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출입구에 턱이 있거나 혹은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이가 탄 유모차에도 해당되는 장애인 것이다. 결국 장애는 개인에 대한 의료적 치료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비장애인이 가진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모델’로 기존 ‘의료적 모델’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관점이다.

의료적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면 장애의 원인을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손상에서 찾게 된다. 그 해결책은 치료가 된다. 이에 따르면 장애는 의학의 진보에 따라 사라질 것이다. 과연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장애인은 줄어들까?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의학이 진보함에 따라 장애인은 더 증가한다. 이전 같으면 생존이 불가능했을 사람도 의학의 발달로 일정한 손상을 안고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문제는 의료적으로 접근할 때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는다. 장애는 의료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료는 손상을 진단하고 치료하지만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사회적으로 해결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문제는 장애인이 노동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데 있다. 물론 심한 중증 장애인으로 노동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는 예외라 하더라고 대부분의 장애인은 제한적이나마 단순노동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노동은 노동자체에서 배제된다. 이는 결국 사회에서의 배제로 이어지고 장애인 빈곤과 사회적 격리문제를 낳는다.

물론 봉건시대만 하더라도 장애인이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긴 했지만 사회적 노동에서 완전 배제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사용가치의 창출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사용가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창출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교환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노동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 격리되고 만다. 이런 자본주의 문제를 극복하거나 보충하는 사회적 구조개혁이 없이는 장애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점뿐만 아니라 연속적 관점도 필요하다. 비장애인인 경우 자신은 장애와 관계없고 생각한다. 의식적인 사람일지라도 장애를 사회적 문제로만 국한 시킨다. 그러나 장애인의 90%정도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그리고 비록 손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생애 주기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비장애인으로 성장했다 장애인으로 늙어간다. 갓난아이는 사실 복합 장애를 경험한다. 아이 개인은 손상이 없지만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며 이동도 못한다. 성장하여 비장애인이 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상실되면 장애인이 된다. 미국은 70세 이상 노인의 70% 정도를 장애인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장애문제는 누구나 경험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유아 아동 문제나 노인 문제도 큰 틀에서 본다면 장애 문제인 것이다.

장애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면서 사회적 문제이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로 여기거나, 장애인과 자신의 아이들이 함께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꺼리는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장애인 친구를 둔 아이가 그 친구의 불편을 덜고자 도움을 준 아이디어들이 세상을 바꾸는 혁신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다. 전화기나 타자기, 이메일등이 그런 예이다. 단순 대량 산업 사회가 저물어 가고 4차 산업의 시대가 가다오는 미래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획일성과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는 손상을 안고 있는 사람도 나와 차이가 있는 다양한 사람의 하나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다른 사람과 차이 있고 개성을 지닌 장애인이다.

 

필자: 신재길/노동사회과학 연구소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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