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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인 기업가, 실패한 경영자, ‘추악한 돈벌레’

일론 머스크, 비트코인으로 떼돈 벌고 ‘벼락 손절’에 투자자 조롱까지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5.1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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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지 말라구!’ 사진 올린 일론 머스크. / 사진=연합뉴스
‘당황하지 말라구!’ 사진 올린 일론 머스크. / 사진=연합뉴스

비트코인에 투자해 거금을 움켜쥐었던 일론 머스크가 느닷없이 자사 테슬라 결제에 비트코인을 허용하지 않기로 한 이른바 ‘벼락 손절’로 시장에 충격을 주더니, 그 직후 자기가 미는 암호화폐인 도지코인 띄우기에 나서 시장의 공분을 자아냈다.

머스크, 더는 ‘혁신적인 기업가’로 불리지 않을 것
머스크는 그다음 날인 13일(현지시각) “늘 그렇듯(As always)”이란 글과 함께 ‘당황하지 말라구(Don't Panic!)’라는 문구가 들어간 사진을 트위터에 올려 그간의 추종자들을 조롱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세계적인 ‘혁신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아온 기업가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그의 모습에 곳곳에서 “배신자”, “사기꾼” 등 격렬한 비난이 쏟아지는 중이다.

앞으로 일론 머스크에게 ‘혁신적인 기업가’라는 칭호를 붙여줄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반응하고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는 ‘실패한 경영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보다 한동안 ‘추악한 돈벌레’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다닐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수많은 유형의 기업가들이 나타났지만, 오늘날 학계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기업혁신’은 근대 경영의 산물이다. 기업혁신은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가 경제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술혁신을 통해 낡은 것을 파괴, 도태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 변혁을 일으키는 창조적 파괴 과정이 기업경제의 원동력이다. 후일 하버드 경영대학원 클레이턴 크리스턴슨 석좌 교수는 혁신을 ‘존속적 혁신’과 ‘파괴적 혁신’으로 구분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미래 성장 동력이 필요할수록 파괴적 혁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극단적이지만 톰 피터스는 “최고경영자는 최고파괴자”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획기적인 혁신을 추구하여 성공했거나 어떤 이유에서 실패하고 만 기업가들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론 머스크와 도지코인 이미지  / CG=연합뉴스
일론 머스크와 도지코인 이미지 / CG=연합뉴스

저가 전략으로 일관한 워너브러더스의 ‘혁신 실종’
미국 영화사상 손꼽히는 사건이 많지만, 워너브러더스는 100여 년간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강자로 군림해 왔다. 그중에서도 창립자인 워너가 형제들의 50년에 걸친 협력과 암투는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처럼 극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간 ‘해리포터’ 시리즈와 ‘매트릭스’로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자신의 영화로 받아든 오스카상만 100개가 넘지만, 107년 전인 1904년 워너 가의 네 형제는 영사기 한 대로 출발했다. 30년 뒤 워너는 미국 5대 영화사로 올라섰는데, 맏형 해리에 따르면 그 비결은 매우 단순해서 말하자면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찍고, 영화관을 인수하는’ 데 있었다. 손쉬운 성공에 심취한 해리 워너가 “정지(停止)는 후퇴이다”를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영화를 찍어 빨리 돌려야 하니 당연히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워너 형제들은 개의치 않았다. 워너가 메이저사로 올라서던 1930년대, 그들이 찍은 영화는 570여 편에 이른다. 개런티가 적다고 불평하는 배우는 내보냈고, 마찬가지 이유에서 ‘스타가 두 명씩이나 나오는 시나리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황이 휩쓸던 1930년대에 일련의 영화사들이 문을 닫았지만 워너는 오히려 승승장구했으니,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이 극장으로 밀려 들어온 덕이었다. 

1948년 미국은 독점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법을 바꾸어 대형 영화사의 영화관 소유를 금지했는데, 워너 형제가 이를 예측하지 못한 것만은 명백하다. 마침 이 시기는 텔레비전이 막 보급되던 때로, 전후 6000대에 불과하던 것이 2년 후면 600만 대로 늘어난다. 

우왕좌왕하던 워너는 형제들의 내분 끝에 회사를 팔아야 처지까지 내몰렸다. 결국 사업을 위해서라면 스캔들 조작도 서슴지 않던 막내 잭이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50년에 걸친 형제 경영은 막을 내렸다. 

이후에도 잭 워너는 끊임없는 저돌성으로 워너를 키워, 2009년 미국 영화 사상 최초로 연 매출 20억 달러를 올린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스트리밍 서비스로 세계 영화산업의 판도를 뒤흔든 넷플릭스가 등장한 이래 영화산업은 급격한 부침을 겪는 중이고 워너 사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워너 브러더스에게 새로운 혁신이 절실하지만 이를 위한 내적 동력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소니, 원점으로 돌아간 ‘전자대국 일본의 신화’
일본 소니 창업자인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는 태평양전쟁 시절 연구원으로 만났다. 전후 두 사람은 고국 기업들의 실력이 미국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의기투합해 소니사를 창립했다. 창립 초기에 전기밥솥, 전기방석, 녹음테이프 등 이런저런 전자기 제품을 만들었지만 회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늘이 도운 덕인지 그들은 미국에서 새 기회를 찾아냈다. 1953년 모리타가 비행기를 탈 무렵 미국에서는 트랜지스터 기술이 한물간 것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모리타는 웨스턴 일렉트릭으로부터 단돈 2만5000달러에 소형 트랜지스터 특허권을 사들였고, 4년 뒤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내놓았다. 몇 년 뒤 소니는 필립스와 공동으로 콤팩트디스크(CD)를 개발하여 다시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리타는 1989년 발간한 저서에서 소니의 성공이 “미래를 향한 끝없는 혁신의 결과”라고 적었다. “우리는 10년 앞을 내다보며 사업을 집중하는 데 반해, 미국인들은 그저 10개월 앞의 이익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얻어낸 기술을 응용하여 세계 시장을 석권한 경험이 그를 고무시켰음은 물론이다. 

전하결합소자라 불리는 CCD 개발은 그중에서도 극적인 경우다. CCD는 미국 벨 연구소가 화상 전화기를 만들기 위한 원천 기술로 개발했다. 이 기술을 의뢰한 AT&T는 상용화에 실패하여 후속 연구 지원을 포기했고, 마침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찾던 소니의 이와마 사장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CCD 개발에 나서 5년 뒤인 1978년 CCD 카메라를, 다시 1985년 컬러 비디오카메라, 즉 캠코더를 선보였다. 소니사는 이후 세계 최대의 CCD 공급원이 됐고 캠코더는 1990년대 중반까지 소니사 이익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원래 소니가 CCD로 의도했던 디지털카메라는 삼성전자의 차지가 됐다. 소니가 자만에 빠진 90년대 말, 삼성전자는 IMF 위기를 겪으며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내놓았고 주로 소니의 CCD를 내장한 이 제품은 고급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했다. 

비단 그뿐이 아니다. 소니는 90년대 들어 절정을 누리는 듯했으나 일본 경제의 거품이 빠지면서 함께 내리막길을 걸었다. 최강이던 가전 시장에 이어 반도체 시장까지 차례로 내주던 소니는 90년대 말 2년의 시차를 두고 창업자인 이부카와 모리타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화려하던 1세대를 마감했다. 

창업자들이 정상에서 잠시 주춤한 탓에 치른 대가는 너무 컸다. 2005년 모리타 아키오의 장남인 히데오는 탈세 혐의로 64억 엔을 추징당했는데, 그는 사업이 실패할 때마다 소니 주식을 팔아 재기하려 했다. 그런데도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계속 무리수를 두었고, 그로써 모리타 집안에는 애초 가업이던 양조장만이 덜렁 남게 됐다. 창업주의 혁신이 한계에 달하면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일어난 결과다. 

일론 머스크 / 사진=연합뉴스
일론 머스크 / 사진=연합뉴스

“기업가는 이윤이 아니라 창조의 기쁨에 이끌려야”
기업가가 한눈팔지 않는 경영으로 혁신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는 기업가가 아니며 단지 사업체를 운영하는 관리자일 뿐이다. 기업가에 대해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슘페터는 이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간파했다. 

그는 역저 ‘경제발전의 이론’에서, 사업체를 소유하는 것은 기업가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고 적었다. 그보다는 기업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결합을 수행하는’ 경우에만 기본적으로 기업가이며 따라서 기업을 순환적으로 경영하는 데 그친다면 그는 ‘단순한 관리자’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결합’이 오늘날 ‘기업혁신’으로 이해된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영에 임하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슘페터는 한마디로 기업의 모든 활동이 혁신의 대상이며 기업가는 이 모든 것에 집중함으로써 비로소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슘페터가 지적한 대로 혁신적인 기업가는 본업인 기업활동에 집중하여 사업을 지속해서 도약시킴으로써 경제 발전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기업가의 핵심 동기가 이윤 추구라는 견해는 옳지 않으며 오히려 ‘창조의 기쁨’이 그의 행동 원리를 결정한다는 것이 슘페터의 결론이다. 

무려 한 세기 전에 펼친 슘페터의 주장을 음미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가 오늘날 기업가의 행동 원리를 적절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슘페터는 ‘경제 발전의 이론’을 쓰던 당시 부상하던 독일 기업가 막스 그룬디히를 분석한 바 있는데, 이후 이 기업가의 행보는 슘페터의 예측을 그대로 따랐다. 그에게서 우리는 기업가가 자신의 사업에서 열정적으로 혁신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갇혀 버리느냐에 따라 기업의 존폐가 결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다 파멸에 이른 그룬디히
2003년 4월 14일, 전기 제품으로 수십 년간 유럽을 호령하던 독일 그룬디히사가 73년의 생존 끝에 문을 닫았다. 창업자 막스 그룬디히는 22살 때 라디오 가게를 차려 8년 만에 100만 마르크 매출을 달성했고, 이후 라디오, 텔레비전 시장에서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슘페터는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그룬디히를 기업가의 전형으로 묘사했다. 

슘페터는 “작업장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즐거움”이 그룬디히의 에너지원이라고 설명했다. 이윤은 그의 핵심 동기가 될 수 없었다. 하나의 제품에 만족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제품에 몰두하는 그에게는 끊임없는 혁신이 더 중요한 자세였다. 슘페터에 따르면 그룬디히는 “내면에서 활활 타는 승부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장인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고집이 그의 운명을 가로막았다. 그는 자신 아닌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회사의 모든 업무에 관여하려 했다. 자신이 가장 공을 들여 영입한 직원마저 경쟁사로 떠날 정도였다. 슘페터가 말한 대로 그는 “쉬지 않고 일하는 것, 그것 이외에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는 혁신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기업과 직원들의 혁신을 가로막는 이 경영 스타일은 20세기 초에 성공한 수많은 기업가에게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룬디히가 자기만의 왕국에서 호령하는 동안 세월은 흘러, 1980년대에 회사는 비디오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과 격돌했다. 비싼 가격에 비해 디자인이 뒤떨어진 회사의 제품은 참패했다. 1983년 당시까지 2700만 대의 라디오와 3300만대의 텔레비전을 만들어낸 그룬디히 사는 이듬해에 필립스사에 경영권을 넘겼다. 하지만 1996년 필립스마저 철수하자 한때 4만 명을 넘던 그룬디히사 직원은 1800명으로 줄어든 채 폐업을 신고했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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